최근 수년 전부터, 나는 매 주일 칼럼을 쓰고 있었다. 들리는 말로는 국내의 모든 교파의 교역자들과 평신도들 그리고 선교사들과 해외동포를 합하면 적어도 10만여 명이 필자의 글을 읽고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이 글들이 묶어져서 <목사가 왜 욕을 해>, <목사가 왜 정치를 해>라는 책이 출판되어 인기리에 팔리고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3년 동안 한 주일도 빠짐없이 매주 칼럼을 쓰는 것은 여간 부담되는 것도 아니고, 소재의 한계도 있고, 정권과 교권을 동시에 깨우는 것에 독자들의 감동을 일으키는 것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때는 밤잠을 자지 못하고, 밤을 꼬박 세우면서 화제를 생각하다 보면 새벽 2~5시까지 집필을 하였다. 읽는 분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읽고 댓글을 달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지만, 내 입장에서 보면 한 주제를 가지고 사투를 벌이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는 지금도 첫잠에서 깨어나서 새벽 1시에 이 글을 쓰고 있다. 왜냐하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이자, 신약의 순교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전령자로서 길을 닦는 선지자 세례요한의 거침없는 욕설, 차마 입에 담기도 민망한 그의 욕설 때문이다. 일반인의 인식은 목사와 장로는 욕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라는 별명을 가진 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요한은, 거친 야생마처럼 당시의 종교와 정치의 지배층과 특권계급을 향해서 듣기에도 섬뜩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그렇다면 선지자 요한은 왜 이런 욕을 했을까? 선지자라면 좀 스마트하게, 표준말로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또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주어야겠지만, 나실인인 세례요한은 거침이 없었다. 나실인은 본래가 여호와의 참 종교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고, 독주를 마시지 않고, 시체에 손을 대지 않고, 머리털과 수염을 깎지 않는다. 또한 나실인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고, 절제와 순종을 삶의 원리로 살아간다. 그런데 선지자 세례요한은 나라 빼앗긴 가난한 백성들에게 좀 더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고, 간담이 서늘하고, 불쾌하고, 입에 담지 못한 욕을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에게 무차별 퍼부었다.
세례요한의 본래 사명은 광야의 소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닦는 자의 사명을 받았다. 때문에 그는 불도저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언덕을 깎고, 골짜기는 메꾸고, 돌덩이는 골라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이룩하실 <하나님의 나라> 건설의 전위대였다. 당시 사람들 특히 바리새파 사람들은 종교인이었지만, 성경적 신앙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기득권 사수, 스팩, 혈통, 역사적 관습, 전통을 지키고 화석처럼 굳어있는 종교 행위를 신앙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들의 속은 예수님이 말씀한 데로 썩어 냄새가 났다. 한마디로 겉만 화려하게 횟가루를 발라놓은 무덤같은 종교였다. 또한 사두개인들은 정치가들로서 내세도, 천사도 믿지 않으면서 제사장직을 독점하고 있었고, 유대 최고법정인 산헤드린 공회를 완전 장악하고 있었던 철두철미한 세속인들이었다. 이 자(者)들의 생각에 자기들은 뼛속까지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유대교의 교육을 확실히 받고, 토라를 외우고 있으니 구원은 이미 얻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자기들만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자(者)들을 향해 <독자의 자식들!>이라는 세례요한의 폭탄적 메시지는, 당시 정치 집단과, 종교 집단을 향한 엄청난 욕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욕을 해도 좀 비유적으로 점잖게 할 수가 없는지? 선지자답게 권고와 위로와 평강을 줄 수 없는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좋은 말로 이렇게 말했으면 어떨까? 마치 교황이 말하듯, “여러분 행복하세요!”, “서로 용서하고 평화를 말하시오!” 등등… 분명 좋은 말이다. 오늘의 목사님들도 좋은 말을 많이 한다. “인간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 “자존심과 자긍심을 가지세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세요” 등등… 분명 이 또한 좋은 말이다. 하지만 이런 말은 성경도 아니고, 복음도 아니다. 만약 요즘 세례요한처럼 불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는 교회에서 즉시 쫓겨날 것이고, 이단으로 소송이 제기될 것이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선지자의 소명과 사명자로서, 생명 걸고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 받는다!”고 피맺힌 열정으로 절규하며 고함쳤다. 왜 절규하며 욕을 했는가? 혈통과 스팩과 전통에 단단히 굳어진 돌맹이처럼 희망 없는 자들에게는, 부서지고 가루가 되는 <회개>의 과정이 있어야 복을 받고, 비로소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선지자 세례요한이 거친 광야에서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대놓고 직사포로 욕을 한 것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타는듯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은 그들에게 “하나님은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할 수 있다”고 전했다. 즉 돌처럼 굳어지고 이스라엘 광야에서 굴러다니는 돌맹이처럼, 천한 것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권능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무능하고 타락한 인간은 자기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으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가능하다는 복음을 제시했던 것이다. 때문에 세례요한의 메시지는 바울의 신학과 다르지 않다. 세례요한은 바로 그 당시 종교개혁자이다.
선지자 세례요한! 그는 그냥 거친 욕쟁이가 아니고, 돌덩이 같은 인간을 갖고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만들 수 있다는 오직 하나님의 은총(Sola Gratia)의 복음을 증거했었다.
정성구 박사(전 총신대·대신대 총장)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성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