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24일 취임한 제18대 박근혜 대통령은 역사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다. 대통령 취임 전부터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과 5.16군사정변에 대한 역사인식 문제로 곤욕을 치룬데다가, 전임 대통령들이 남겨 놓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재임기간 내내 정치적으로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2011년 8월 30일 헌법재판소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두고 ‘부작위(不作爲) 위헌’이라고 판결하기까지 2006년 7월 이 헌법소원이 제소될 당시의 노무현 정부는 물론, 2011년 8월 헌재 판결 당시 이명박 정부도 이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부족한 상태에서 일본과의 협상에서는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박근혜 정부로 이관되었다. 게다가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으로 발생한 한일관계의 파국까지 겹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취임 후의 첫 번째 3.1절 기념사에서 한일관계 개선에 많은 관심을 표명하면서, '역사는 미래를 향한 자기성찰'이라는 역사인식으로 일본의 태도 변화를 촉구하였다.
역사는 '자기성찰의 거울'이자 '희망의 미래를 여는 열쇠'입니다. 한국과 일본, 양국 간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역사에 대한 정직한 성찰이 이루어질 때, 공동번영의 미래도 함께 열어갈 수 있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일본이 우리와 동반자가 되어 21세기 동아시아시대를 함께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역사를 올바르게 직시하고 책임지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 세대 정치 지도자들의 결단과 용기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한국과 일본이 아픈 과거를 하루빨리 치유하고, 공영의 미래로 함께 나아갈 수 있도록 일본 정부는 적극적인 변화와 책임 있는 행동을 해야 할 것입니다. - 박근혜 대통령, 「제94주년 3.1절 기념사」 중에서
이 같이 취임 초부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 관계 정상화를 주장한 박근혜 대통령은 이듬 해인 2014년 3.1절기념사와 광복절 경축사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촉구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24일 한일의원연맹 일본측 대표단을 접견한 자리에서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한일관계 새 출발에 있어 첫 단추"라고 강조했다. 취임 2년 차가 끝나가는 데도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성의 있는 반응이 있어야만 '한일 정상회담'을 거론할 수 있다는 기존 태도를 유지한 것이다. 이처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에 한일 외교의 전부를 걸다시피 한 박근혜의 맞 상대는 2012년 12월 총리로 취임한 아베 신조(安倍晉三)였다. 아베 역시 보수 자민당 내에서도 강경 보수파로 꼽히던 정치인이어서, 한·일 간의 외교적 갈등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70주년을 맞이 한 2015년에도 두 나라의 갈등은 진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한·미·일 삼각 동맹을 강화하려는 미국에게도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였고, 이에 미국은 노골적으로 박근혜 정부를 압박했다. 2월 27일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정무차관은 "정치 지도자가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진전이 아닌 마비를 초래한다. 이는 앞으로 몇 달간 오바마 행정부가 지속적으로 강화할 메시지다"라고 덧붙여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란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정부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도 아베 총리의 '전후 70주년 담화'를 비판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조속한 타결을 당부하였다.
오늘은 '광복 70주년'이자 '건국 67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날입니다.... 그동안 정부는 역사 문제에는 원칙에 입각하여 대응하되 두 나라간 안보, 경제, 사회문화 등 호혜적 분야의 협력관계는 적극 추진해 나간다는 입장을 견지해왔습니다.... 1965년 국교정상화 이래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등 역대 일본 내각이 밝혀온 역사인식은 한일관계를 지탱해 온 근간이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어제 있었던 아베 총리의 전후 70주년 담화는 우리로서는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역사는 가린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살아있는 산증인들의 증언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조속히 합당하게 해결하기를 바랍니다. - 박근혜, <광복 70주년 및 건국 67주년 경축사> 중에서
이렇게 박근혜 정부 출범 후 2년 가까이 대치하던 한·일 양국은 12월 28일 서울에서 열린 '한일 외교장관회담'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합의가 타결되었다. 기시다 외무대신과 윤명세 외교부 장관이 공동 발표한 합의문에는 일본 정부에서 ①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아베 총리의 사죄 표명 ②한국 정부가 설립하는 위안부지원재단에 일본 정부 예산 출연, 한국 정부에서①한국 정부는 이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 ②한국 정부는 주한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 문제 해결에 적극 협력을 약속했다. 이와 함께 양국 정부는 향후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상호 비난・비판을 자제할 것을 합의하였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합의안 타결은 한일 양국의 입장 차가 극명한 상황에서 이뤄낸 정치적 타협이었다. 특히 위안부 문제의 배상금을 일본 정부 예산으로 지급하고, 정부 책임을 명시한 총리의 사죄까지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상당한 성과였다. 그러나 합의문이 발표된 후 "합의문의 비공개부분이 존재한다"는 소문이 나돌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중심으로 진보 성향의 시민단체들이 연계한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무효와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전국 행동'을 발족하고, 한·일 위안부 합의 무효를 위한 조직적 행동에 나섰다.
한편 2014년 1월 14일자 <뉴욕타임스>는 자국 역사교과서에 대한 한국과 일본 지도자의 인식을 비판하는 사설을 실었다. '정치인과 교과서'라는 제하의 이 사설에서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이 과거 일본 식민통치와 이후의 독재정권 시기가 역사 교과서에 반영되는 걸 꺼리고 있다며, 애국주의를 내세워서 일본군 위안부 기술과 난징대학살 등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범죄를 축소하려 하는 일본 아베 신조 총리와 비교했다.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와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은 각각 자기 나라에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반영하는 새로운 고등학교 역사교과서를 밀어붙이고 있다. 아베는 문부과학성에 애국주의를 고취시키는 교과서만 (검정) 승인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그가 주로 우려하는 것은 2차 대전 시기에 대한 것으로, 그는 부끄러운 역사의 장(章)으로부터 초점을 이동시키고 싶어 한다. 일례로 그는 한국 '위안부' 문제를 교과서에서 밀어내길 바라며, 또한 (중국) 난징에서 일본 군에 의해 저질러진 대학살을 축소하려고 한다. 그를 비판하는 이들은 그가 일본의 전시 침공들을 지워버리고 위험한 애국주의를 부추기려 한다고 말한다.
박근혜는 일본 식민통치와 탈식민 이후 남한의 독재가 교과서에 반영되는 걸 우려하고 있다. 그는 일제 식민통치에 부역한 한국인들 문제를 축소하고 싶어 하며, 지난 해 여름에는 교육부에 새 역사 교과서를 승인하게 밀어붙였다. 이 교과서는 일본에 협력했던 이들이 '강압에 의해 그랬을 뿐'이라고 쓰고 있다. (현재 한국의 전문가 집단과 엘리트 관료 중 다수는 일제 식민통치에 협력했던 가문 출신들이다.) 학자들, 노조들, 교사들은 박근혜가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며 비난해왔다.
아베와 박근혜는 모두 전쟁이나 부역에 민감한 가족적 배경을 갖고 있다. 일본의 패전 이후 연합국은 아베의 조부인 기시 노부스케를 A급 전범으로 체포했다. 박근혜의 아버지 박정희는 식민통치기 일본군 장교였으며 1962년부터 1979년까지 남한의 군사독재자였다. 두 나라에서 역사 교과서를 개정하려는 이런 위험한 시도들은 역사의 교훈을 위협하고 있다.
이상의 사설에서 알 수가 있듯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놓고 박근혜와 아베가 외교 전쟁을 벌였지만, 국내적으로는 각기 역사교과서 문제로 심각한 갈등을 빚게 되었다. 박근혜 정부의 교육부는 2015년 9월 「2015 개정 교육과정」을 고시하고, 11월에는 중학교『역사』와 고등학교『한국사』교과서의 발행을 검정에서 국정으로의 전환을 확정했다. 이어 10월 13일 박근혜 대통령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올바른 역사 교육을 위한 국가의 역할을 주문했다. 이것은 2005년 1월 한나라당 대표시절 "역사에 관한 일은 국민과 역사학자의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경우든지 역사에 관해서 정권이 재단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과 정반대 입장이었다.
결국 박근혜 정부는 국정 역사교과서 편찬 작업을 강행했지만 곧바로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2015년 10월 전국 주요 대학의 사학과 교수들이 국정화 교과서 집필을 거부하였고,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시민·사회·교육단체 등으로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가 결성되어 전국적인 반대 투쟁에 돌입하였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투쟁은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위안부 합의 철회 투쟁' '사드 배치 반대'투쟁' 등과 연계되었고, 여기에 '세월호 사건' '최순실 게이트' '문화계 블랙리스트' 등 전방위적인 박근혜 정권 퇴진운동으로 확산되었다. 결과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이 퇴진하자, 2018년 8월 15일을 건국70주년으로 기념하려던 계획도 무산되고 말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었던 박근혜에게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잘못 해결한 대통령이라는 꼬리표가 붙어다닌다. 그런데 2015년 연말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합의'가 발표된 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지난 20년을 회고해보면 박근혜 정부처럼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 시간과 노력을 많이 할애한 정부가 없었다"고 했다. 주무 장관으로서의 자화자찬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이 말은 진실이었다. 위안부 문제를 협상하면서 "이 문제가 해결 안 되면 다른 한일 관계도 없다"며 배수진을 쳤기 때문에 3년 6개월 동안 한일 정상회담이 열리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는 실제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위안부 할머니들의 배상 권리를 만들어줬다는 생색만 내고, 박근혜 정부는 '굴욕 협상'을 했다고 욕만 먹은 꼴이 됐다는 안타까운 소리도 들린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상대가 아베 총리였다. 1952년생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녀인 박근혜와 기시 전 총리의 외손자로 1954년생인 아베, 두 사람은 너무나 흡사한 성장과정과 역사인식을 갖고 있었다. 보수적 이념을 내세우고 과거의 영광 재현을 앞세우는 리더십은 닮은 꼴이다. 두 사람의 정치 이념을 압축해 보면 내셔널리즘에 기반한 경제부흥이다. 대일본제국 부활을 꿈꾸던 아베의 등장은 '전쟁 가능한 일본'이라는 메시지를 일본인들에게 심어주었고, '한강의 기적'을 재현하려는 박근혜는 창조경제를 통한 '한국의 부활'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두 사람의 이면에는 '고독'이라는 키워드가 공통적으로 존재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정치활동으로 인해 혼자 자란 아베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18년 동안 은둔생활을 한 박근혜는 '고독'을 통해서 승부사의 기질을 품게 되었다. 그런 두 사람이 집권 초기의 오랜 시간을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다툰 것이다. 현안이 산적해 있는 한일 외교로서는 낙제점이라고 해도 틀림없었다. 게다가 국내에서는 역사 교과서 문제로 시민사회의 반대에 부딪쳐서 곤욕을 치른 것까지 닮았다. 편향된 역사인식을 가진 두 정치 지도자의 잘못된 만남이 빚은 결과였다.
김형석 고신대학교 석좌교수((재)대한민국역사와미래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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