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학술원(원장 김영한 박사)이 11일 오후 서울 양재 온누리교회에서 ‘리꾀르의 윤리’라는 주제로 제92회 월례포럼을 개최했다. 이날 서혜정 박사(파리개신교대학)가 ‘폴 리꾀르(Paul Ricoeur)의 윤리’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서 박사는 “철학자 폴 리꾀르(1913~2005)의 윤리는 먼저 삶에 대한 긍정에서 시작한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면서 주체는 미래의 삶을 열어간다. 즉 창조의 세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하다’는 생각에 기초를 둔다”고 했다.
이어 “여러 창조물 가운데 한 일원으로서의 자기(soi)를 상정하는 리꾀르는 니체의 영웅주의적 주체가 아닌, 겸손의 주체로서 이 땅에서 타인과 더불어 ‘좋은 삶’을 추구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낙관론적 자세를 지향한다”며 “다만 헤겔의 목적론은 지양하고 이 땅에서 죽는 날까지 좋은 삶을 추구하고자 노력하지만, 그 완성이란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에서 이뤄진다고 주장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철학적 이성과 성경적 신앙을 두 축으로 한 리꾀르의 윤리는 행동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실천적”이라며 “리꾀르의 윤리란 선·좋음 등의 가치를 욕구하는 자율적 의지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즉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본성과 일맥상통한다. 다만 그 방향성이란 ‘도덕’이라는 규범과 의무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서 박사는 “윤리는 ‘좋은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원적 욕망이라면, 도덕은 의무론적 관점에서 이를 ‘구속하는 효과’를 지닌다. 이처럼 리꾀르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봤지만, 로마서 5장에서 죄가 깊을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크고 넘쳐난다는 복음에 주목했다”며 “즉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 인간은 ‘가능한’(capable) 인간이 된다고 봤다. 인간 자체보다 하나님의 은총에 희망의 근거를 둔다”고 했다.
또한 “리꾀르는 인간은 말하고 행동하며 책임질 수 있는 존재로서, 한 사회의 언어는 악과 부패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봤다. 즉 부패가 있는 곳엔 언어의 부패도 있다”며 “그럼에도 인간은 타자, 법정, 제도 앞에서 책임질 수 있는 존재라고 봤다”고 했다.
때문에 “리꾀르는 인간의 삶에 존재하는 악과 욕망이란 끝이 없기에 금지·제한의 규정으로 통제해야 함을 주장했는데, 이를 위해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를 강조했다. 즉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을 타인에게 행하지 말라’는 부정의 형식”이라며 “이는 마치 십계명의 ‘살인하지 말라’, ‘도덕질 하지 말라’ 등과 같은 규정으로 의무를 취하며, 이 도덕의 문제는 타자로 확장된다”고 했다.
그러나 “리꾀르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배려’를 강조하며, 이는 도덕적 의무보다 ‘좋음’이라는 윤리적 자율성을 취하기에, ‘배려’를 토대로 ‘우정과 사랑’을 공유하는 타자와의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했다. 여기에는 사람뿐만 아니라 제3자적 익명의 존재인 ‘제도’도 포함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리꾀르는 이웃사랑에 있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며, ‘누가 나의 이웃인가’의 문제보다 ‘내가 누군가의 이웃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전환한다”며 “‘선한 사마리아인’ 본문에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제사장과 레위인은 ‘사회 계층’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한 개인’으로 지명됐다. 여기서 리꾀르는 강도 만난 사람을 외면하고 지나친 두 사람은 제도·역사의 주류로 대표된다면, 사마리아인은 제도 밖의 한 개인으로 봤다. 이처럼 제도는 정의·질서의 영역으로 사랑의 원리가 자리하기 어렵지만, 인격과 인격이 만날 때 제도를 초월하는 상호성을 가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고 했다.
이어 “근대 합리주의는 인간을 ‘언어, 도구, 제도’에서 출발한다고 규정지으며, 마치 군대 조직이라는 전체 구조에서 한 군병이 전체를 위해 존재하는 익명의 시민으로 전락시켰다”며 “즉 ‘기능과 역할’을 중시하는 사회로 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웃 사랑은 제도가 아닌 작은 공동체 안에서 존재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리꾀르는 제도는 이웃사랑의 전제인 질서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도구로, 사회적 권위란 지배가 아닌 봉사를 위해 존재해야 함을 강조했다”며 “임금 착취·인종차별 등 집단적 불행으로 고통 받는 이들은 예수님의 형상을 띈 ‘소자’라며, 사회구성원보다 ‘우리'라는 개념으로 제도권에서의 이웃 사랑을 실천하자고 강조했다”고 했다.
서 박사는 “리꾀르는 이웃 사랑을 구현한 사회제도란 공정과 정의 속에서 개인을 억울하게 만들지 않는 ‘삶의 보호’에 중점을 둔다고 봤다. 즉 칼뱅이 국가제도의 존재이유가 교회를 보호하는 측면이 있다고 강조한 것처럼, 제도도 성경적 이웃 사랑의 정신을 확장하고 넓히는 데 일조해야 함을 주장했다”고 했다.
반면 “사회 제도가 ‘우리’라는 이웃 사랑의 정신에서 위배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땐, 그 사회를 비판하고 제동을 걸 수 있다”며 “리꾀르는 개인·우리·제도 등 모든 주체가 ‘이웃 사랑’ 정신을 실천하는 데는 종말론을 목표로 한다고 주장했다. 즉 ‘개인’ 혹은 거대한 ‘우리’가 언젠가 종말의 심판 가운데 선다는 생각에서 기인한다”고 했다.
서 박사는 “리꾀르는 인간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입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과 죽음이 존재하는 사회의 현실 속에서도, 그 약함을 개혁할 수 있는 희망적 존재라고 봤다”며 “그런 점에서 리꾀르의 철학이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지평은 개인에서 사회 전 영역으로 확장돼야 한다고 강조한 점에서 칼뱅의 개혁주의적 윤리관을 지닌다”고 했다.
한편, 이날 논평에는 정기철 박사(전 호남신대), 앞서 개회사에는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 1부 예배 설교는 조은식 목사(전 숭실대 교목실장)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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