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비유가 의미하는 것: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다가오는 임박성
1. 예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종말론적 임박성
예수 비유가 주는 메시지는 나사렛 예수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개통과 동시에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임박성이다. 19세기 자유주의자들(리츨 등 문화기독교주의자들)은 예수 비유에서 윤리적 도덕적 의미를 천착해 냄으로써 비유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를 지상에서 이루는 윤리적 도덕적 공동체로 해석하였다. 예수는 지상에서 윤리적 공동체를 이루는 모범적 교사로서의 도덕적 인물로 묘사되었다. 그럼으로써 비유가 지니고 있는 역동적 실재인 하나님 나라의 임박한 실재를 드러내는 종말론적 역동성이 전적으로 도덕적 윤리적 이상 속에서 간과되었다.
영국의 신약학자 도드(C. H. Dodd)는 예수 비유 해석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하면서 독일 학자들이 주장한 임박한 종말론은 거부하였다. 도드는 종말론을 기독론에 연결시켰다. 세상 종말로서의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도래한다는 것이다. 도드에 의하면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지만 실상은 그리스도를 하나님 나라의 참된 모습으로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으로써 도드는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 을 제시하였다.
여호야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는 도드의 실현된 종말론을 수정하여 수용하면서 “현재 실현되는 종말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불트만 학파들이 제시한 견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비유란 예수 자신의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창작물로 여기는 견해로부터 역사적 예수의 본래적 언어로 되돌아가고자 하였다. 그는 독일 학계의 임박한 종말론 사상을 완화시켜 계속 유지하면서 다드의 실현된 종말론을 수용하고자 한다: “예수의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막 4:11)로서 가득차 있다. 말하자면, 실현의 과정 속에 있는 종말론에 대한 인정(the recognition of ‘ an eschatology that is in process of realization)이다. 성취의 시간은 왔다. 그것은 청취자들 모두에 흐르는 긴박한 주목이다.” 예레미아스는 도드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시간적으로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였고 군중들에게 가까이 오심을 여러 비유로써 설명하였다고 본다.
예레미아스는 『예수의 비유』에 대한 도드가 이룩한 본질적 해석의 선(線)으로부터 퇴각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공헌을 다음같이 피력한다: “나의 고유한 공헌이란 예수의 비유적 가르침의 가장 최초로 얻을 수 있는 형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예레미아스는 ”예수 자신의 그 말씀으로 가능한 근거되어지는 대로 되돌아가고자(a return, as well as grounded as possible, to the very words of Jesus himself) 한다. 그는 초대교회로부터 되돌아가서 예수 비유들의 본래적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며, 예수의 본래적 목소리를 다시 듣고자 시도한다. 예레미아스는 실현되어가는 종말론을 다음같이 피력한다: “강한 자가 무기를 버리고, 악의 힘이 퇴각하며, 병자가 치유되며, 나환자들이 깨끗해지며, 큰 빚이 탕감되고, 잃은 양이 집으로 돌아왔고, 아버지 집의 문은 열려 있으며, 가난한 자와 거지들이 잔치에 초청되고, 대가 없는 주인의 친절은 그의 삯을 충분히 지불하며, 모든 자들은 큰 기쁨으로 충만하다.” 그는 그의 저서 『예수의 비유』 마지막 문장으로 다음같이 피력한다: “주의 은혜로운 해가 시작되었다. 그 이유는 말씀마다 비유마다 그 뒤에 숨어 있는 영광이 빛나시는 그분, 주께서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오늘날 라칭거 같은 보수주의자들에게 임박한 종말론을 초창기 예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생긴 한 측면으로 이해하는 시도도 있다. 저자의 견해에 의햐면 예수의 비유들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신자들이 깨어서 경성하여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 종말론적인 책임을 각성시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2. 비유의 본질: 하나님 나라의 인격적 화신(化身)인 예수와 그의 십자가의 신비를 지시
비유들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풀어주는 열쇠는 예수의 십자가다. 비유는 원래 이해를 용이하게, 무엇을 쉽게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예수는 오로지 이런 목적으로 비유를 이용하셨다. 비유는 한편으로는 마음을 열어 듣고 감동을 받는 사람들과 다른 한편으로 마음을 닫는 사람들을 구별한다. 비유는 이를 들으나 마음을 닫는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기가 된다(막 4:11). 그래서 비유는 숨겨진 언어, 수수께기로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소개하는 것이다. 비유가 이해 용이성과 이해 불가성은 이를 듣고 수용하는 인간의 마음상태에 달려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부활하시고 대속을 이루신 후에는 성령을 주심으로 제자들에게 더 이상 비유가 아니라 명료한 언어로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알려주셨다. 예수는 고별 담화에서 말씀하신다: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요 16:25). 예수의 모든 비유들은 은연 중에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감춤으로써 십자가의 신비를 말한다. 비유는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가는 길을 암시해주기 때문에 세속적인 종교권력자들로부터는 강한 저항에 부딪친다. 그 두드러진 예가 악한 포도원 농부(소작인) 의 비유다. 악한 포도원 소작인들은 아들이 포도원의 상속자임을 알고 그를 죽이고 포도원을 차지하고자 한다.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포도원의 악한 농부들이 바로 자기 자신들을 가리키는 것을 알고는 예수를 잡고자 하나 군중들을 두려워하여 감행하지 못한다. 이들은 결국 나중에 예수를 체포하여 십자가에 처형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예수의 비유 그 자체가 십자가로 가는 여정이 된다. 예수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는 농부만이 아니라 땅에 뿌려지는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된다. 그리하여 그의 죽으심과 부활은 많은 열매를 맺어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기독교가 세워지고 복음이 지속적으로 선포되는 것이다.
비유는 그 근원적 의미가 십자가의 신비와 희생의 원리를 제시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적인 자연적인 사유방식으로는 비유들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없다. 이성적으로 자연적으로 깨달으려고 하면 할수록 비유는 더욱더 닫히고 이해하는 자는 강팍하기에 이른다. 비유의 의미는 더욱 더 숨겨지고 은폐된다. 그러나 우리의 사유가 회심을 경험하게 될 때 비로소 비유들은 그 숨겨진 의미들을 우리들에게 드러낸다. 권력지향적 인식이나 자아중심적 인식에서 벗어나 자기 비움과 자기 포기의 태도에 이를 때 비유의 진정한 의미들은 드러난다. 전형적인 예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다. 당시 유대종교의 계급사회에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사마리아인들은 당시 유대사회에서 혼합족속으로 멸시당한 자들이었고 사회적 통념으로는 이들은 결코 강도만난 자의 참된 이웃이 될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이러한 종교적 위계질서로 닫혀있는 사회를 향하여 예수의 비유는 강한 폭발력을 지니고 유대종교인들의 위선들을 폭로하였던 것이다. 유대사회의 관점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사회의 원로요 유대인 삶과 행동의 모범으로 간주되었으나 이들은 실생활에서는 가장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로부터 멀리 있는 자로 파악되었다. 이에 반해 사마리아인은 그 사회에서 이방인이었으나 강도 만난 자의 진정한 이웃이 되었다. 진정한 종교는 율법의 굴레를 깨뜨리고 율법의 정신(의, 인, 신)에 접근할 때 어려움을 당한 자들에게 자비와 긍휼과 정의에 도달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내용은 하나님 나라의 실재이신 인격으로 자신을 드러내신 메시아 예수 자신이다. 예수는 하나님 사랑의 진정한 징표로서 그가 제시하시는 비유들의 주인이시다. 예수는 유월절 축제의 신비 가운데 계시며 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드러내신다. 그는 표적을 요구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요나의 표적을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 12:39-40). “이 세대는 악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눅 11:29-30). 예수는 십자가에 처형되어 속죄제물이 되시고 죽으시고 사흘 후에 부활하셔서 인류의 구속을 성취하심으로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셨다. 그럼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가져 오셨고 우리 마음 속에 중생을 통한 하나님 나라를 가져다 주셨다. 예수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인격적 현존(personal presence)이신 예수를 구주로 믿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직의 삶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예수의 비유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실재이다. 하나님 나라는 역사 전체에 구속(救贖)의 전기(轉機)를 가져온 가장 결정적인 실재로서 이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실존과 삶와 역사를 변혁시킨다.
3. 푹스의 예수 비유 설교 이해: 현대인의 실존을 새롭게 조명하는 언어사건
독일 마르부르그의 신해석학자 푹스(Ernst Fuchs)는 언어를 존재사건으로 이해하는 하이데거의 존재 이해를 예수의 비유 설교 이해에 적용히였다. 예수는 비유의 회화(繪畵)적인 면을 수단으로 하여 청중들과 이해를 나누는 실존 이해의 세계로 들어간다. 예수는 그의 비유를 통해서 일상적인 관념을 무너뜨린다. 예수는 하나님의 편에 서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를 배운다. 예수의 비유 설교는 평면적인 인식적인 논의와는 대조적으로 청중들 안에 사랑을 일깨우는 창조적인 사건이다. 예수의 비유는 단지 기술적으로 관례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되며 오늘날 현대인의 실존을 새롭게 조명하는 언어사건(Sprachereignis)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푹스가 시도한 예수 비유 설교에 대한 신해석학적 접근은 다음 세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 비유의 그림같은 성격은 단순히 설교적인 고안이 아니라 예수와 청중들과 함께 나누는 공동세계를 창조하는 수단이다. 예수가 농부, 가정 주부, 부자와 가난한 자에 관하여 말할 때 그는 단지 접촉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 세계 속에서 청중들과 함께 있다. 청중들은 공동세계를 가짐으로써 그들 사이에 언어 사건이 일어난다. 언어 사건 속에서 이해가 야기되며 비유의 실존적인 의미가 드러난다.
둘째, 삶과 실재에 대한 관례적-일상적인 관념은 새로운 언어 사건(Sprachereignis)에 의하여 도전되고 동요된다. 푹스는 여기서 하이데거의 “일상성”(Alltäglichkeit) 개념이 지시하는 “퇴락성”(Verfallenheit) 개념을 수용하고 있다. 퇴락성이란 관례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말한다. 이러한 퇴락성으로 특징되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 언어 사건을 통해서 새롭고 창조적인 어떤 것이 들어선다. 하이데거가 존재 개념을 기능 개념으로 설정하는 데 반해서, 푹스는 예수의 인격과 창조적인 말씀을 사용한다. 푹스는 마태복음 20장 1절-16절의 포도원 품군의 비유를 해석한다. 먼저 온 자는 나중 온 자보다 더 많은 삯을 받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동일하게 받는 삯 때문에 주인에게 불만을 토로한다. 그러나 나중 온 자에게 먼저 온 자와 동일한 급료를 주는 주인의 친절은 주인의 고유 권한이다. 비유의 세계에 들어감으로써 청중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주목한다. 청중들은 여기서 예수의 메시지를 경청한다. 그것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긍휼에 소망을 가진 자에 대한 약속이다. 창조적 언어사건은 일상적 언어성에 의하여 고안된 형상을 깨뜨린다. 여기서 청중들이 비유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비유가 청중들을 해석하고 있다.
셋째, 청중들은 언어사건을 통해서 예수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래서 청중들은 그들이 예수와 더불어 갖는 세계와 하나님의 새로운 비전을 발견한다. 푹스에 의하면 이 비전이란 죽음의 지점에 이르는 자기 포기이다. 자기 포기란 십자가와 사랑의 길을 간 예수 자신의 결정을 따라감이다. 여기서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나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중요시되지 않고 그것의 실존론적 의미성이 주제로 드러난다. 역사적 사건보다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주장을 포기하도록 하고 예수의 십자가 길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비전으로 결단하게 하는 언어 사건이 중요시된다.
저자의 평가에 의하면 여기서 푹스 에벨링 등으로 대변되는 신해석학파는 불트만과 그의 학파들이 시도한 실존론적 해석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신해석학파도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보다는 실존론적 의미를 더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기초하지 않는 실존론적 해석이란 후기 불트만 학파가 지적한 것처럼 기독교의 메시지를 공중누각에 두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의 경시는 신해석학파의 복음서 메시지 이해를 역사적 사실보다는 실존론적 사건을 중요시하는 신영지주의의 사고에 머물게 하는 위험성에 노출시킨다. (계속)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 상임대표/숭실대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영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