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세상 심판 비유(마 25:31-46)
(1) 영광의 보좌에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하시는 인자
예수는 세상 심판(the World Judgment) 비유로 하나님 나라 진리를 가르치신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배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 31-46).
엄격히 말해서, 위의 문장은 비유가 아니다. 단지 비유적인 요소인 목자, 양, 염소, 실제적 분리 등이 있으나 미국의 복음주의 신약학자 칼슨(D. A. Carson)이 마태복음 주석(, Matthew,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Vol. 8-1, Frank E. Gaebelein(General Editor), )에서 제시하는 바 같이 내용은 세상 종말 심판에서 일어날 사실에 대한 예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목자, 양, 염소 등은 실제적으로 일어날 세상 끝날 메시아적 분리를 설명하기 위한 비유적 요소다. 세상 심판(the World Judgment) 비유에서 인자가 오셔서 세상의 심판관으로서 각 사람들을 행위대로 갚아준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 16:27).
“인자”란 다니엘서에 예언된 하나님의 왕권을 가지고 오는 메시아이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13-14). 인자의 오심 안에서 하나님 왕국은 완성된다.
인자는 고통당하는 자들과 지극히 작은 소자들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이신다. 실천적 행위가 없는 인류동포주의는 무가치하다. 심판은 모든 민족에게 내려진다. 최후심판의 잣대는 궁핍과 고독에 빠진 소외자들에 대한 자비로운 사랑의 실천 여부(與否)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2) 선인과 악인에 대한 유신론적 이원론
비유는 우주와 역사에 대한 최종 심판과 유신론적 이원론을 말하고 있다. 유신론적 이원론은 조로아스터교가 말하는 선신과 악신이 영원한 대립과 상호 균등을 이루는 이원론이 아니라 악신(惡神)이 선신(善神)에 의하여 정복되는 성경적 이원론이다. 유신론적 이원론이란 선하신 하나님의 주권이 역사와 우주를 지배한다. 양과 염소를 구분한다. 오른편에 서는 자와 왼편에 서는 자를 구분한다. 선인과 악인을 구분한다. 선인과 악인은 존재론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한 일에 따라서 결정된다.
선인(善人)은 형이상학적으로 그렇게 태어나거나 선험적으로 운명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일상적인 행한 일 속에 그의 정체성이 나타난다. 선인은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 악인(惡人)은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마 25:42-43).
예수의 비유는 단지 선과 악, 선인과 악인의 대립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들이 주권적인 하나님의 판결 아래 선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러한 영벌과 영생을 판결하고 집행하는 자는 임금인데 이 임금은 인자요 하나님이시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1-3). 그러므로 단순히 이원론이라고 하지 않고 유신론적 이원론(theistic dualism)이라고 말한다.
(3) 우주와 역사에 대한 최종심판
예수의 비유는 역사와 우주의 원리에 대한 선의 원리와 악의 원리 사이의 대립을 말하지 않는다. 비유는 선인들과 악인들을 구분하는 선과 악이 인간이 일상적으로 행하는 삶의 행위에서 드러난다고 말한다.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선을 행한 자는 선인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악인이다. 선인들에 대하여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악인들에 대하여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45).
예수가 가르치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사상은 최후 심판의 기준으로서 놀라운 방식으로 내적 통일을 드러낸다.(마태복음 25장 31절-46절 해설, 『해설•관주 성경전서』, 독일성서공회판, 63-64.) 임금은 선인들과 악인들에 대하여 해당하는 영원한 판결을 내린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 25:46). 종말의 심판에서 악한 자들은 심판받고, 악한 신들(사탄과 귀신들)도 심판을 받아 불구덩이에 던짐을 받는다. 선인들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한다”(마 25: 34b). 악인들은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간다“(마 25: 41b).
역사와 우주에는 목적과 심판과 영생이 있음으로써만 우리가 사는 삶은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역사와 우주가 헬라적인 세계관에 따라서 끊임없고 돌고 도는 영겁의 회귀(eternal return)라고 한다면 우리 삶의 진정한 의미는 없고 단지 영원한 현재(eternal presence)만이 의미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현재란 실존적인 결단 속에 찰라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결단과 더불어 지나간다. 영원한 현재란 순간으로 머물지 아니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은 허무에 빠져들어가는 것이다. 영생이 있어야만 우리 삶에는 의미와 목적이 있는 것이다.
(4) 하나님 나라에 걸맞는 인간성이란 지극히 작은 소자를 돌보는 성품
선인과 악인의 비유는 단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던” 6가지의 선한 행위라는 도덕적 윤리적 행위를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다.
6가지 선한 행위의 핵심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b)라는 말씀에 있다. 그 선한 행위를 누구를 위하여 했는가이다. 이런 모든 선한 행위는 직업상으로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서, 내면적 도덕적 의무감 이행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그리스도에게 하듯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사렛 예수는 지극히 작은 사회적 소자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였다. 역사와 우주 가운데 하나님 아들이 임재하시는 것은 단지 앞으로 미래에서 구름타고 오시는 묵시록적인 우주론적 재림만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날 우리 삶의 한 가운데서 지극히 작은 사회적 약자들 가운데 임재해 있으며, 자신을 저들과 동일시하신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에서는 종교적 제사보다는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것이 하나님에게 열납되는 제사(시 4:5; 시 51:17, 19; 히 13:16)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비종교적 익명적 임재의 모습이다. 우리의 선한 양심과 가난하고 사회적 병약자들과의 연대 속에 주님은 그 가운데 증오자가 아니라 화평자와 긍휼자와 평화를 심는 자로서 그 가운데 계신다.
6가지 선한 행위가 최종 심판의 기준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복음은 행위 심판(the judgment according to the works)이 되어 버린다. 6가지 선행이란 복음을 받아 칭의를 받은 사람의 선한 삶의 열매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는 주님에 대해 빚진 자로서 이웃의 궁핍한 상태에 대하여 긍휼을 가지고 이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을 돌본다는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서로 사랑하라는 이웃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계속)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 상임대표/숭실대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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