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익 목사(벧샬롬교회 담임)가 12일 TGC 코리아 복음연합 홈페이지에 ‘참음, 그리스도인의 아비투스(habitus)’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김 목사는 “우리는 승리주의적 사고 체계로 기독교와 복음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규정하고 재단하기가 너무 쉽다”며 “승리주의적 사고에서 그리스도인의 표는 성공하는 것이고 1등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고 체계는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에 부합하지 않으며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표는 무엇일까”라고 했다.
이어 “참음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에 대해서 적대적이거나 호의적이지 않았던 세상 앞에 보여준 기독교 고유의 경이로운 삶의 특징이었다”며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믿는 바를 따라 행하고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했고 그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는 참음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원형경기장에서 죽임을 당하면서도 적대적 불신 세상 앞에 참음의 덕 즉 ‘아비투스’를 보여주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아비투스(habitus)는 라틴어에서 파생한 단어로,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사회학적 용어로 처음 사용했다”며 “이 용어는 후천적인 배움을 통해서 무의식중에 또는 위기의 순간에 반사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행동 양식을 의미한다. 한 집단에 속한 구성원들에게 아비투스가 형성되면, 아비투스는 바깥 세계에 그들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특징이 된다”고 했다.
또한 “참음의 아비투스는 오늘날 번영신학의 틀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복음의 역설을 보여준다. 초기 교회는 신약성경이 많은 곳에서 참음(인내)을 믿음의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했다(마 10:22; 24:13; 막 13:13; 눅 8:15; 21:19; 롬 8:25; 딤후 2:12; 히 10:36; 12:1; 계 13:10; 14:12 등). 신약의 저자들과 함께 초기 기독교는 참음 곧 인내를 믿음의 본질이라고 이해했다”며 “참음의 아비투스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말 보다, 삶과 삶의 방식으로써 기독교와 복음을 세상 앞에 보여주는 표가 되었다”고 했다.
그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준 참음의 아비투스는 박해의 상황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고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였다. 게다가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배우는 것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따라 사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며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세례를 주기 전까지 그들의 삶 속에 그리스도인의 아비투스가 형성되었는지를 시험한 뒤에야 비로소 세례를 베풀었다. 아비투스의 교육에는 믿음으로 인해 순교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서 세례를 받기까지는 적어도 3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참음의 아비투스를 배움으로써 시작되었다. 참음은 초기 그리스도인의 독특한 아비투스였다”고 했다.
이어 “우리는 참을성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유튜브를 1.5배속 또는 2배속으로 돌려보는 시대이다. 우리에게서 멀지 않은 근대선교역사만 보더라도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나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 같은 선교사들이 한 사람의 영혼을 얻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는지를 알 수 있다”며 “하지만 우리는 기다리지 않는다. 원하기만 하면 초고속으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시대를 경험하고 살아간다. 목사들은 경쟁 사회에서 더 빠른 속도로 성장의 성과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압력을 받는다. 1970년대 교회성장의 물결을 타고 메가처치들이 등장하며 수많은 교회들이 교회성장이라는 지상 목표를 내세우면서, 한국 기독교에서 참음의 아비투스는 사라지고 말았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지금, 21세기 한국 기독교의 아비투스는 무엇인가”라며 “우리는 무엇으로 그리스도인됨을 바깥세상에게 경이롭게 보여주고 있는가? 성공과 1등이 됨으로써 그리스도인 됨을 증명하려는 유아적 승리주의 사고에서 벗어나, 우리가 잃어버린 기독교의 아비투스인 참음을 회복해야 하지 않을까? ‘모든 참음’을 통해 복음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초기 그리스도인의 아비투스인 참음, 즉 인내의 발효가 초기 기독교의 성장 동력이었다는 앨런 크라이더의 말을 우리는 좀 더 진지하게 들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라고 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