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선 선교사는 건신대학원대학교 신학과 찬양인도학 교수, 극동방송 '내 삶의 노래로' 진행, CTS TV '내가 매일 기쁘게' 고정 패널, 전 대전시립합창단 소프라노 단원으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전하고 있다.
그는 “다양한 사역을 하고 있지만 20여 년 전에는 이렇게 살 거로 생각하지 못했다. 돌아보면 15살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은 하나도 없고, 어딘가에서 연락이 오거나 누군가 불러줘서 하는 일들로 살아가고 있는데, 저는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이 너무 재미나고 신나는 사람으로 바뀌어 버렸다”며 간증을 시작했다.
지선 선교사는 아빠의 학대로 엄마가 집을 나가면서 15살 나이에 남동생과 함께 대전의 친척집에서 살게 되었다. 학교에선 왕따를 당하고 심각한 영양실조로 질병의 고통을 당하면서 외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 그를 학교 음악선생님이 교회로 데려가 주시고, 성악을 가르쳐주었다. 3대학생이 되어 교수님들의 도움으로 베를린 유학을 준비하던 지선선교사는 모든 관계가 깨어지고 결핍된 상태였기에 행복하지 않았다고 했다. 어느 날 비행기 티켓을 들고 큰집 앞을 지나던 길에 인생의 뒤를 돌아보면서, 처음으로 은혜라는 글자가 남의 글자가 아니라 내 글자가 되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늘 코피가 나고, 근심,걱정으로 위와 장이 꼬여서 응급실을 갔었는데, 언제부턴가 병원에 가지 않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를 찾아서 거짓말을 하고 서울에 갔다 오던 내가 비행기 티켓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처음으로 기적 같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은혜받은 사람이라는 게 믿어지기 시작하니까 동시에 ‘선생님의 하나님, 목사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인가?’라는 퀘스천 마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않았던 것에 죄송한 마음이 들어 21살에 처음으로 새벽예배를 나가기 시작했다”고 했다.
이어 “하나님께서 너는 그동안 내가 너를 어떻게 지켜줬는데, 은혜도 모른다고 뭐라고 하실 줄 알았다. 그러나 목사님의 말씀과 찬양 가운데 하나님이 진짜 내 보호자이심을, 나에게 진짜 사랑을 주시는 분임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하나님도 사람처럼 나에게 왔다가 떠나갈 줄 알았다. 그래서 하나님 옷자락을 잡는 심정으로 7일 작정을 시작해서 21일이 되고, 40일이 되고, 100일이 되고 365일이 되니까 깨달았다. 내가 하나님을 붙잡은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붙잡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작정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지선 선교사는 교회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나를 결혼하게 해준 게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 앞에 작은 결단을 하고 싶었다. 바비킴, 휘성, 바이브를 연주해주는 드러머였던 남편에게 세상에서 드럼 치는 걸 그만두자고 했는데, 남편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고 단칼에 그만뒀다. 하나님은 저희의 작은 결단 하나를 보시고 엄청난 선물들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며 은찬이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2011년 6월 하나님을 갈망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솟아나서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방법,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이 뭘까를 기도했다. 믿음의 선배들을 봤더니 다들 손에 성경책이 있었다. 그때 하나님을 보고 싶은 마음을 담아서 성경 말씀을 쓰자는 마음을 주셨다. 하나님께 진짜 축복을 달라고 기도하고 필사하면서 40일 작정을 시작했다. 필사를 하다가 그 전에 안 보이던 고난이라는 두 글자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어렸을 때 받았던 게 진짜 고난이라고 생각했는데, 축복만 받고 싶어 하는 나를 알게 됐다. 그때부터 기도제목이 고난을 주세요로 바뀌었다. 성경인물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만나는 고난을 달라고 40일 작정을 다시 시작했다. 사람의 언어로는 고난으로 쓰여 있지만, 진짜 축복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쓸 수 있었던 기도제목이었다”고 했다.
이어 “6월~9월까지 기도는 가운데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성전 문 앞에서 불을 보기도 하고, 하나님이 만져주시는 손길도 느꼈다. 그러던 중 두 아이가 감기가 폐렴이 되어서 한 달을 입원했다. 한달간 병원에서 출근하면서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이 너무 기뻤다. 이게 고난을 만나고 축복이 되는 기도의 응답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는 “10월 15일 두 아이가 퇴원한 날, 집에서 첫째를 씻기고 둘째를 씻기고 있는데 설거지를 하던 엄마가 비명을 질렀다. 첫째 아이가 있는 방이 시커멓게 연기로 가득 차 있고, 저희 아이가 까맣게 변해 있었다. 아이가 온몸에 물이 다 묻은 채로 젓가락 두 개를 220V에 집어 넣어서 감전된 것이었다. 젓가락 하나는 시커멓게 타 있고, 하나는 기역자로 휘어져 있었다. 아이의 몸 안에서 팡팡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마지막으로 팡 터지는 소리가 나면서 몸 안의 구멍에서 대소변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아이가 눈을 뜨더니 온 신경을 다 건드리고 갔는지 수십 가지의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숨이 다시 돌아온 걸 느끼고 119에 전화를 했다. 구조대원이 감전으로 죽었다가 살아난 아이를 처음 보고 놀라셨다. 220V는 빨아들이는 전압인데 손을 놨다는 게 기적이라며 소리를 지르시고, 살아난 것이 기적이라며 빨리 병원으로 옮겼다”고 했다.
이어 “3일간 소독만 하는데도 아이가 소리를 질러서 간호사 선생님도 울고 다 울었다. 저는 불도 봤고 만져주셨던 하나님이시기에 금방 나을 줄 알았다. 더 이상 대전에서 치료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서울한강성심병원으로 옮기게 되면서 육아휴직계를 내고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하나님 이게 뭐예요?’라는 기도 하나밖에 안 나왔다. 병원에선 전기가 관통하고 가서 뇌랑 장기가 분명히 손상이 갔을 거라며 병실을 배정하지 않고 몇 주를 촬영만 했다. 손상이 나타나지 않자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가진 거로 생각하면 되겠다며 열 손가락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열 손가락 신경과 관절이 다 끊어진 것 같다는 판정을 받고 드디어 병실을 배정받았다”고 했다.
이어 “병실을 배정받아 올라가자 하나님께서 폭포수와 같이 응답해주기 시작했다. 내가 썼던 필사들이 다 하나로 뭉쳐지면서 제 눈에 보이게 해주셨다. 어떤 상황과 환경이 와도 하나님을 끝까지 믿는 자에게는 성경 어디에도 이것이 저주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는 하나님임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라며 누가복음 24장 49장 말씀을 떠오르게 하셨다.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병원, 이 성에 머무르라고 응답으로 받은 말씀이었다”고 했다.
지선 선교사는 “어느 날 의사선생님이 뼈가 보이는 네 번째 손가락을 후 부니까 제 눈앞에서 뼈가 바스러져서 없어졌다. 마른 뼈는 생기가 없으면 불면 날아간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후 불면 날아가는 사람들이 병원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은찬이 손가락이 하나 없어진 것보다 더 애절한 마음으로 저 사람들 마음속에 하나님의 생기가 불어질 수 있는 성전으로 데려다 놓으시면 안 되냐고 기도하게 하셨다”고 했다.
이어 “남아있는 뼈와 세포를 살리기 위해서 배꼽 뼈를 뚫고 심는 대수술을 하게 되었다. 세 번의 대수술을 하고 엉덩이에서 살을 조각조각 떼어다가 열 손가락과 가슴 바깥쪽에 이식을 했다. 엉덩이에선 피가 마를 날이 없었고, 온몸에 붕대를 감고 누워서 대소변을 받아내고 씻기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때의 사진을 다 찍었다. 필사 하다가 갔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예배가 무엇인지 감동을 받고 있었다. 하나님은 질병이 끝난 다음에 예배를 드리라고 하지 않고, 질병 가운데 함께 하시는 그 하나님을 기억하는 예배를 계속해서 가는 곳마다 단을 쌓게 하시는 것이었다. 하나님께 그들처럼 저도 여기서 단을 쌓을 방법이 무엇인지 기도했다. 그때 사진을 다 찍으라는 마음을 주셨다. 엄마로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사진일 수도 있지만 계속해서 보게 하셨다. 그걸 찍어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은찬이가 했던 말, 다녀간 사람들, 기도했던 지체들의 말을 다 써서 은찬이에게 선물로 주고 싶었다. 이건 나쁜 기억이 아니라 은혜의 기억이라고 남겨 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어느날 병원 꼭대기층에 있는 교회 목사님이 찾아오셔서, 화상환자들을 다 모아놨으니 특송을 하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병실ㄴ에 있느라 목청껏 찬양 못했던 저를 떠올리게 해주셨다. 번뜩 떠오르는 찬양 ‘성령에 오셨네’를 찬양하고 눈을 떴는데 화상환자들이 다 일어나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연약하지만 찬양할 수 없는 가운데 찬양하면 하나님의 의로운 오른손이 나타나셔서 내 인생을 잡아 일으킨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영혼을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을 제가 본 것이다. 이 감동이 사라지기 전에 합창단에 전화를 걸었다. 저의 무대는 예술의 전당이 아니라 하나님이 찾으시는 영혼이 앉아 있는 그곳인 것 같다고 사직서를 보내달라고 했다. 선생님들이 다 눈물을 흘리시면서 저의 사직서를 받아주셨다”고 했다.
지선 선교사는 “은찬이는 대수술을 세 번이나 했기 때문에 합병증이 생기지 말라고 이틀에 한번씩 수술실에 들어가서 소독을 해야 했다. 이 소독을 위해 하루는 금식을 하고 하루는 전신마취제를 맞아야 했다. 열 번째가 넘었을 때 선생님이 전신마취제를 너무 많이 해서 치명적인 위험이 올 수 있다고 동의서에 사인을 받으셨다. 사인을 하면서 헤어지는 준비를 계속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아이가 어느 날부터 전신마취제를 맞고 잠들려고 하면 저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제 수술실에 혼자 안 들어가고, 자신의 침대에 예수님, 천사가 네 명이나 있다고 얘기하는 것이었다. 엄마가 못 들어가는 수술실에 예수님은 함께 들어가시는데, 낙심하고 있던 저를 발견하게 되었다. 눈물 흘리면서 기도하는데 수술대 위에 은찬이가 아니라 내가 누워있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대전이라는 수술대 위에 누워서 피해의식과 자격지심으로 외롭다고 이야기할 때, 수많은 목사님과 믿음의 선배님들이 이야기한 ‘하나님은 너와 함께 계셔’라는 말이 처음으로 믿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믿어지지 시작하면 부흥이 일어난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 안에 노래하는 것, 아이를 키우는 것에 갑자기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믿어지지 시작하니까 전신마취제를 마치고 나오는 아이의 얼굴이 아빠의 얼굴로 보이기 시작했다. 진짜 돈이 없는데 돈 달라고 전화 왔던 아빠, 너무 외로운데 엄마를 만나지 말라며 머리채를 휘두르고 갔던 아빠가 너무 보고 싶었다. 병원에서 나가면 아빠부터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고 했다.
이어 “은찬이가 전신마취제를 맞고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저에게 ‘소풍을 온 것 같아’라고 이야기했다. 기가 막혔다. 금식하기 전에 엄마가 자신을 데리고 시장 문을 닫을 때까지 유모차를 개조한 것에 눕혀서 하루 종일 있다가 들어오고, 하루 종일 엄마가 여기 있는 게 소풍이라고 했다. 그때 하나님이 저한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성령님과 함께하면 인생은 소풍이구나. 은찬이에게 소풍처럼 있다가 천국에 가자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소풍 같은 그 인생에 엄마가 갑자기 떠올랐다. 소풍이라는 말에 엄마 때문에 슬펐던 것, 배신감이 싹 날아갔다. 우리 엄마도 지금 소풍 중인데, 존귀한 인생인데 라는 마음이 처음으로 들기 시작했다”고 했다.
지선 선교사는 “은찬이는 사진을 찍을 때만이 아니라 계속 웃었다. 왜 웃나 봤더니 제가 은찬이 앞에서 항상 웃고 있었다. 왜냐면 저는 믿음의 선배다. 하나님 앞에 걸어가고 있는 믿음의 선배로서 제가 울어버리면, 하나님이 존귀하게 하시겠다고 하던 모든 일을 물거품으로 만들 것 같았다. 그동안 내 인생이 항상 하나님의 계획을 돌아서 왔었다. 이제는 그렇고 싶지 않아서 웃었는데, 은찬이가 선배가 웃고 있으니까 같이 웃고 있었다”고 했다.
이어 “은찬이는 계속해서 최악의 상황이 펼쳐졌고, 병원에선 해줄 게 없다고 퇴원하라고 했다. 선생님이 이 아이는 모든 게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이틀에 한 번씩 계속 하셨다. 은찬이가 대전으로 내려오는 길에 핫바가 먹고 싶다고 했다. 핫바를 자기가 잡고 먹어보겠다고 하더니 손가락을 까딱하고 움직였다. 아이의 손을 만지니까 간지럽다고 하면서 어느 순간 핫바를 잡아서 먹고 있는 것이었다. 한손의 감각이 살아난 채로 대전으로 내려오게 되었다”며 병원에서도 깜짝 놀라서 빨리 재활을 하자고 했다”고 했다.
이어 “네번째 손가락에 다시 한 번 엉덩이 살을 떼다가 붙이고, 오른손을 찢는 수술을 하려고 날짜를 잡았는데, 하나님이 심한 아토피를 주셔서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토피로 손가락이 맞춤으로 찢어졌다. 아토피가 너무 심해서 계속 긁던 아이가 어느 날 왼손까지 살아났다”며 눈으로 봐야 응답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은찬이가 핫바를 잡고 먹던 날 하나님이 알려주셨다. 저는 기도의 응답이 눈으로 봐야 응답인 줄 알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붕대 안에 있을 때 마스크로 가려졌을 때 눈으로 안 보일 때 그때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바로 진짜 믿음이고, 진짜 응답임을 은찬이를 통해서 알려주셨다. 손가락은 움직이게 됐지만, 손가락 한 마디가 없고, 부딪치면 망치처럼 부풀어 오르는 연약한 손가락이었다. 하나님께 이 손가락이 뭐냐고 물어봤다. 하나님께서 걱정하지 말라며 나의 멋진 작품이라고 하시는 것 같았다. 이 연약한 손가락으로 능력의 십자가를 붙들면 강해질 수 있다고 하시며, 저처럼 눈에 안 보이는 상처, 은찬이처럼 눈에 보이는 상처는 크리스천에게는 더 이상 상처가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려주셨다”고 했다.
지선 선교사는 “아이빅 밴드의 손경민 작곡가가 작곡하고 남편이 드럼을 쳐서 음반을 제작하게 되었다. 음반 1집이 나오기 전에 하나님께서 아빠를 만나게 해주셨다. 어떻게 네가 나를 용서하냐는 아빠의 한 마디가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채워진 저에게는 좀 용서해주면 안 돼로 들렸다. 아빠와 전화를 끊고 2시간을 눈물 흘렸는데 손으로 따져보니까 23년이 걸렸다. 하나님께서 23년을 한 번도 멈추지 않으시고 내 기도에 응답하시고, 만지시고, 모든 상황을 다 연합해서 선을 이루시는 것에 감사해서 기도했다. 이후 저희 가정이 23년 만에 한 상에서 밥을 먹게 되었다”고 했다.
이어 “그 다음에 하나님이 음반을 내게 해주셨는데, 그때 알게 해주셨다. ‘고난을 주세요’라고 기도했던 저에게 하나님이 주시고 싶으셨던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아빠를 만나는 것,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찬양하고 노래하고 피아노 치는 것이었다. 이것을 깨닫게 해주셔서 저희 가정에 하나님의 음반이 나오기 전에 회복이라는 놀라운 선물을 주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러고도 계속해서 시한폭탄 같은 일은 터진다. 그러나 인생은 성령님이 함께하고 있으니까 소풍처럼 사는 것이다. 결핍을 은혜로 바꾸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아이빅 밴드 손경민 작곡가가 작년에 목사가 되면서 만든 은혜라는 찬양이라며 은혜를 찬양했다.
지선 선교사는 “이 간증의 제목이 있었다. ‘주의 손을 굳게 잡고 찬송하며 가리라’. 저의 동역자이고 가족 같은 손경민 작곡가가 저의 간증을 듣고 소풍이란 찬양을 만들어 주었다. 저는 가족이란 단어가 어색하고 쑥스러운 단어로 30대까지 살았다. 이제는 은찬이를 통해서 3남매를 통해서 가족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교파와 환경을 초월한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 모두 주님 다시 오실 날까지 가족이 되신 줄 믿는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소풍 같은 인생길 영적인 추억의 사진이 오늘도 남은 줄 믿는다. 이 기도회도 성경의 한 페이지로 찰칵 찍히는 우리의 여정이 된 줄로 믿는다”며 ‘주의 손을 굳게 잡고 찬송하며 가리라’를 찬양하며 간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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