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층별로 차등화된 공간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자본주의 사회를 그린 우화라는 점에는 대체로 이견이 없는 것 같습니다. 등장인물들의 공간이 그들의 계급을 표상한다는 점은 바로 그 점을 더욱 명징하지요. 게임장에 발을 들인 사람들은 대략 네 개의 계층으로 구분되는데요. 이 네 계층이 각각 점유할 수 있는 공간의 크기는 각 계층이 지닌 권력에 따라 차등적입니다.
게임에 뛰어든 참가자들은 완전히 개방된 적층식 침대에서 기거합니다. 이는 침대 하나만큼의 면적조차 온전히 자기만의 것이 아님을 뜻하죠. 식사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해결해야 하고, 화장실 사용도 자유롭지 않습니다. 참가자의 침대들은 ‘ㄷ’자 형태로 정렬되는데요. 이 형태는 자연히 열린 변 쪽으로 에너지를 수렴시킵니다. 열린 변에서는 공지사항이 전달되고 식사도 배급될 뿐 아니라 생존자의 숫자가 표기됨으로써 참가자들의 오감을 집중시킵니다. 생존자의 숫자는 곧 그들이 차지할 수 있는 돈의 크기를 의미하지요. 천장에 매달린 황금돼지저금통은 전광판에 표기된 생존자의 숫자를 즉물적으로 가시화하며, 이는 참가자들의 욕망을 부추깁니다. 이 욕망은 곧 살육을 서슴지 않는 아귀다툼으로 직결되지요.
진행요원들은 화장실이 딸린 개인 침실을 갖습니다. 비록 인원점검이라는 점호를 받기는 하지만 그들에게는 제한적이나마 동선의 융통성도 있어 보입니다. 더 상위 권력자인 프론트맨에게는 자기만의 고급스러운 방이 있습니다. 그는 안락한 소파에 앉아서 참가자들의 생사를 화면으로 점검할 수도 있죠. 흥미로운 건 게임이 열리지 않을 때 프론트맨은 고시원에 기거한다는 점인데요. 좁은 고시원 방을 보여주는 장면은 프론트맨 조차 권력의 위계 안에서 중간 권력자일 뿐 먹이사슬 내 최상위 포식자와 같은 최상위 권력자는 아님을 의미합니다. 따지고 보면 그 또한 더 큰 권력자에 의해서 떠밀리듯 이 게임판에 들어와 있는 것일지도 모르죠.
프론트맨보다 상위 계층인 VIP들은 더 사적인 공간을 소유합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안락한 공간에서 마치 쇼를 관람하듯 참가자들이 벌이는 사투를 관람하며 유흥을 즐깁니다. 역시 최상위 계층에 속하는 오일남은 게임장뿐만 아니라 섬 전체를 소유한 자인데요. 그가 사유하고 있는 공간의 크기, 그리고 그가 지은 게임장의 규모와 시설물들은 그가 궁극의 권력자임을 방증하지요. 참가자들 간에 살육이 벌어지던 밤, 오일남은 가장 높은 장소를 찾아 올라갑니다.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이란 본능적으로 눈을 감거나 귀를 막고 웅크린 채 절규하기 마련임에도, 오일남은 높은 곳을 점유한 후 명령하듯 외칩니다. 이러한 이례적인 행동은 그가 판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최고 권력자임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지요.
이렇듯 공간적 배경이 되는 게임장과 섬 전체는 각 계층이 지닌 권력의 크기가 공간으로 번안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공간의 점유는 곧 권력의 소유를 의미하며, 공간의 크기 차이는 계급의 차이임을 <오징어 게임>은 직설적으로 보여줍니다.
공간 점유의 측면에서 카페는 불완전하지만 어느 정도의 평등이 실현되는 공간이라 하겠습니다. 누구나 몇천 원을 내면 일정한 면적을 일정한 시간 동안 점유할 수 있으니 자기만의 공간을 소유할 지불능력이 없는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건 당연할 겁니다. 그런데 주인공인 기훈이나 상우는 최소한의 평등이 확보되는 카페 갈 형편도 되지 않아서 길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 술을 마십니다. 결국 이들은 사지와도 같은 게임장에 뛰어듦으로 돌파구를 찾으려 하지요.
성경에 등장하는 공간 권력자들
공간을 소유했느냐 여부가 권력의 척도라는 점은 성경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사사 시대 이스라엘을 압제한 모압 족속의 왕 에글론은 종종 자신만의 방에서 홀로 휴식을 취했습니다(사사기 3:20). 정복 전쟁이 한창임에도 유유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잉여의 공간을 소유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에글론이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왕정 시대 이스라엘 왕 솔로몬은 무려 13년에 걸쳐 자신의 왕궁을 건축했습니다(열왕기상 7:1). 성경은 이 왕궁이 얼마나 화려했는지를 길게 진술하고 있는데요. 이는 당시 솔로몬의 권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짐작케 합니다.
공간 소유가 곧 권력이라는 등식은 오늘날 더욱 공고해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은 아파트를 소유하기 위해 큰 빚을 집니다. ‘영끌’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지요. 아파트로 대변되는, 자신만의 공간을 소유하지 못하는 이들은 이 사회에서 실패자 내지는 낙오자로 취급받게 되지요. 그리고 실재하는 물리적 공간을 소유하지 못하는 이들은 사이버 공간으로 몰립니다. SNS나 메타버스는 사이버상에서만이라도 자신만의 공간을 갖고 싶어 하는 현대인들의 절박한 심정을 반영하고 있지요. 그런데요 한 뼘의 공간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우리네 인생들을 향해서 성경은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더 차지할 곳이 없을 때까지,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늘려 나가, 땅 한가운데서 홀로 살려고 하였으니, 너희에게 재앙이 닥친다!” (이사야 5:8 / 새번역성경)
노재원 목사는 현재 <사랑하는 우리교회>(예장 합동)에서 청년 및 청소년 사역을 담당하고 있으며, 유튜브 채널 <아는 만큼 보이는 성경>을 통해 기독교와 대중문화에 대한 사유를 대중과 공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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