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은실 교수(서울대학교 종교학과)가 위 인물 중 피에르 발데스 파에 대하여 연구한 논문을 「신학과 교회」 제5호(2016년 여름, 혜암신학연구소)에 게재하여 그 내용을 소개한다.
위에 언급된 종교개혁의 네 명의 선구자 가운데 연대 순으로 가장 앞선 인물인 '피에르 발데스'는 1140년 경 태어났고, 출생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리옹에서 초기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리옹은 론강과 손강이 만나는 위치로 상업이 발달한 도시인데, 그곳에서 발데스는 수완과 능력이 좋아 큰 부를 얻었고, 리옹 시민 자격과 특권도 가졌다고 한다. 번창을 구가하던 발데스는 어느 날 세속의 삶과 가족을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교회 운동을 시작한다.
발데스를 주축으로 만들어진 신앙 공동체는 '발데스파'(Waldensian)라 불리는데, 이는 자신들 스스로 지칭한 이름이 아니라 이들을 박해한 사람들이 창설자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이다. 발데스파 자신들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가난한 자들,' '리옹의 가난한 자들'(Pauperes Leonistae)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다. 이들은 앞으로 설명할 몇 가지 이유로 로마가톨릭교회로부터 박해 당하였고, 따라서 이들에 대한 공식적 기록은 거의 없다. 그들 자신도 자신들의 기록을 직접적으로 남기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13세기 초 교황에 의해 이단으로 단죄된 후 자신들을 숨기기 위하여 가능한 한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이에 손은실 교수가 참고한 사료는 이들을 반대한 사람들이 쓴 글이거나 이단 심문관의 기록이다. 이 같은 손 교수는 잠재적으로 편견이 포함된 자료를 주의를 기울여 해석하고 또 최신의 발데스파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를 취합하여 발데스파의 창설 초기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소개했다.
『12세기의 종교개혁』의 저자 콘스탄블은 1040-1160년 사이의 시기를 인간의 사고와 행위의 거든 모든 면에서 높은 수준의 자의식과 변화가 강렬하면서도 신속하게 일어난 시기로 보았다. 이 입장을 이어받은 최근 학자들은 이 시기를 네 시기로 구분했는데, 첫째 시기는 1040-1070년으로 성직 매매 금지와 성직자 독신 등 성직자의 도덕적 개혁을 강조한 시기다. 둘째 시기는 1070-1100년으로, 그레고리우스 7세와 우르반 2세와 연결된 시기인데 세속 권력에 의한 성직자 임명 등과 같은 세속 권력의 통치로부터 교회의 독립을 추구한 시기다. 셋째 시기는 1100-1130년으로 서임권 논쟁 마지막 국면에서 수도생활의 강조가 점증하는 과도적 시기이다. 넷째 시기는 1130-1160년으로 수도생활의 본질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인격적 개혁에 관심이 집중된 시기이다.
마지막 두 시기 즉 1100년에서 1160년 사이에 공통된 관심사가 있었는데 그것은 수도생활의 본질에 대한 강조이다. 수도생활의 본질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모방'(imitatio Christi) 혹은 '그리스도 따르기'(sequela Christi)이다. 그러나 당시 경제가 급속하게 발전하여 이전에 보지 못했던 수준의 물질적 부를 맞닥뜨린 12세기의 상황에서,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으로 선택하신 가난'(고린도후서8:9)의 길이 가장 외면당하기 쉬웠던 복음적 가치라고 판단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부의 증가가 가져올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위협에 대항하여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고자" 하는 신앙 부류가 태동되었다. 이들에게 "세상의 재물과 명예를 포기하는 것은 복음의 길로 돌아서는 회심을 의미"하는 일이었고, 이들과 같이 "자발적 가난을 추구한 수도생활의 가치는 은자, 순례자, 순회 설교자들에 의해 전 유럽에 확산"되었다. 손은실 교수는 '발데스파' 즉 '리옹의 가난한 자들'의 운동은 이와 같은 시대적 징표와 맥을 같이 한다고 밝혔다. '리옹의 가난한 자들'은 "음이나 은을 소유하지 말 것이며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마태복음10장)의 말씀을 따라 살기로 결정하고, 정해진 거처를 갖지 않고 구걸로 연명하였다고 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그들을 목격한 자가 그들에 대해 "둘씩 맨발로 양털을 걸치고 거의 헐벗은 채로 다녔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손은실 교수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도 등장한 중세의 이단심문관 베르나르 귀(Bernard Gui)가 작성한 『이단의 왜곡에 대한 심문의 실제』에 등장하는 발데스파에 대한 기록을 사료삼아 발데스와 그를 따른 사람들이 중점적으로 추구한 세 가지 삶의 기둥이 '가난, 성서, 설교'임을 밝혔다. 가난의 문제는 앞에서 역사적 맥락과 관련하여 살폈고, 이후로는 손 교수가 소개한 발데스와 그의 추종자들의 성서 문제 그리고 설교 문제를 소개한다.
손은실 교수는 발데스가 추구한 개혁의 출발점은 로마교회의 오류나 성직자들의 타락한 삶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발데스가 성경 속의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그대로 따라 살고자 결단한 것이다. 이에 발데스 및 그와 함께한 사람들이 가진 신념은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도 완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한 성서는 라틴어로 된 불가타 성경이었고, 라틴어를 모르는 대중들은 읽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발데스는 리옹의 두 성직자에게 성서 번역을 맡겼고, 발데스 자신은 이 번역된 성경을 거의 외우다시피 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1228년 현재 프랑스 남단에 있는 도시 톨루즈에서 모인 공의회에서는 "교회사에서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읽는 것을 금했"고, 그 이후로 "로마 교회는 이 금지를 강화시켰고, 대중언어로 번역된 많은 성경들이 화형대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리옹의 가난한 자들'은 공식 결정에 순응하지 않고 "성경을 더 잘 배우기 위해 썼고, 그것으로 필사본을 만들었다." 이 필사본들은 각 지역으로 보내졌다. 중세 성경 연구자 사무엘 뵈르제(Samuel Berger)에 따르면 "인쇄되기 이전의 성경 대부분은 발데스파에게 나온 것"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손은실 교수는 발데스파가 '성경의 백성'이라고도 불렸다고 밝혔다.
'발데스파' 즉 '리옹의 가난한 자들'이 결정적으로 이단으로 정죄받고 핍박당한 이슈는 성경번역보다도 평신도 설교의 문제였다고 손은실 교수는 연구에서 밝혔다. 당시 교회법에 따르면 설교는 오직 성직자에게만 허용된 것이었는데, 발데스파 사람들은 성서를 번역해 평신도들이 읽고 평신들이 나가서 설교하며 복음을 전했다. 중세의 이단심문관 베르나르 귀는 발데스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쓴 바가 있다: "그들은 무식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와 여자 모두 마을에서 마을로 갔고... 심지어 교회에서 설교했다. ... 리옹의 대주교인 장 오 벨 멩은 그들에게 그런 주제넘은 일을 포기하라고 명령했지만, 그들은 그들의 착각을 위장하기 위해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의 권위를 무시했다."
이 문제는 1179년 교황 알렉산더 3세가 개최한 3차 라테란 공의회에서도 드러난다. 이 때 발데스와 그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인정받기 위해 자신들이 번역한 성경을 제출했는데 공의회는 이들의 번역본을 문제 삼지 않았고, 또 그들이 세상의 부를 포기하고 가난한 삶을 추구하는 것도 교회 권위나 가르침에 대한 거부의 표지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3차 라테란 공의회에 참석한 사제들은 설교는 성직자의 전유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교황 알렉산더 3세와 공의회는 설교 허용을 요구했던 발데스의 청원을 거부했다. 발데스는 사제들과 타협하지 않았고 불복종 하는 길을 택했다. 리옹의 주교로부터 설교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발데스는 "우리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행5:29)라고 대답하고 계속해서 설교하고 전도하다가 1182년 경 출교당하고 리옹에서 추방되었다. 쫓겨난 그들은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북부의 많은 도시와 마을에서 도피처를 발견했고 새로운 추종자들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몇 세기를 거쳐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이 유럽에 퍼저나갈 때 발데스파는 종교개혁에 합류했다고 손은실 교수는 논문에서 밝혔다. 발데스파는 기욤 파렐, 오이코람파디우스, 바르틴 부처와의 토론 끝에 종교개혁에 가담하기로 결정했고, 종교개혁 사상 확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에 대하여 손 교수는 "그 때부터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면서 박해의 희생자들이 되었다"고 평했다. 1545년 뤼베롱에서 일어난 대학살에서 발데스파 희생자가 무려 2천명을 넘었다고 한다.
12세기 말 리옹 발데스에서 출발한 '리옹의 가난한 자들'의 운동은 당대 로마교회의 박해 가운데서도 수 세기 동안 지속되어 16세기 종교개혁에 합류했고, 여기서도 폭력적 박해를 받았지만 이들은 이탈리아 피에몬테 알프스에서 계속 저항했다고 손은실 교수는 밝혔다. 오늘날 이들의 신앙은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는 물론, 스위스, 프랑스, 미국, 남미의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에서도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2015년 6월 프란시스코 교황은 발도파 교회에게 과거의 박해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였다고 손은실 교수는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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