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기 목사가 별세하면서 그의 공과에 대한 평도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이신건 전 서울신대 교수가 1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조용기 목사에 대한 추억을 나눴다.
이 전 교수는 이 글에서 먼저 "세계 최대 교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설립한 조용기 목사가 14일에 향년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땅의 노고를 끝마치고 주님의 품에 안긴 그와 유가족들에게 하나님의 큰 위로를 빌며, 그에 대한 나의 추억을 되새겨 본다"고 운을 뗐다.
그는 "불광동의 천막교회에서 서대문의 빌딩교회로 옮겨온 이래 그의 교회는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하면서, 수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며 "그곳에서 가까이 위치했던 서울신학대학교에 다니고 있던 나에게도 그는 호기심과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어느 날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 그곳을 찾았다"고 했다.
이 전 교수에 따르면 조 목사가 서대문의 빌딩교회로 이전했을 때 비록 큰 교회당은 아니었지만 사람들로 가득했고 복도와 방마다 방송으로 예배를 중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특히 "그날의 설교는 나의 기억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카리스마가 넘치는 그의 목소리와 신비감이 넘치는 설교 내용 때문만이 아니라, 그날의 독특한 설교 내용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 전 교수는 그러면서 "(당시) 설교 중에 그는 영어 신문(Times)을 손으로 흔들면서, 영국이 유럽공동체(EU)에 가입함으로써 다니엘의 예언(열 발가락을 가진 동상)이 곧 성취될 것이라고 말했다. 잘 알다시피, 그의 예언은 머잖아 불발로 끝났다. 이처럼 초기 조용기의 목사의 폭발적인 교회 성장의 비결은 뜨거운 예배와 그 속에서 일어나는 신유(!?) 현상 외에도 예언자적인 카리스마를 분출하는 그의 놀라운 연기력(!)에도 있었다고 여겨진다"고 전했다.
고인과의 첫 만남도 회상했다. 이 전 교수는 "그와의 첫 만남은 2004년 영산국제신학심포지엄에서 이루어졌다. 여의도 CCM빌딩 에서 열린 이 모임의 주제는 "영산 조용기 목사의 희망 신학"이었고, 주요 강사는 나의 스승 몰트만이었다. '희망의 신학자'로 알려진 몰트만이 조용기 목사의 신학을 희망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평가하는 자리였는데, 나는 논찬자로 초대를 받았다"고 했다.
이 전 교수는 "(2004년) 6월 3일(목) 아침 식사 자리에서 나는 조용기 목사를 마주 보고 앉았다. 그는 몰트만의 저서 "희망의 신학"을 번역한 나를 먼저 칭찬했고, 나는 그의 영어 실력을 높이 평가했다"며 "그러면서 그는 나에게 뜻밖의 고백을 들려주었다. 그의 목회 성공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으며, 그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매우 겸손한 고백이었다. 왠지는 잘 몰라도, 그날의 그의 고백은 허례적 수사나 과장적 표현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처럼 들려왔다. 그의 고백이 매우 의아했지만, 속마음으로는 "그가 그런 신앙으로 자신을 비우고 낮추며 큰 존경을 받는 목회자가 되기"를 은근히 빌었다"고 털어놓았다.
이어 "몰트만이 강연할 때에는 뜻밖에 그가 직접 나타나지 않고 영상으로 인사말을 건넸다. 현대신학의 대가인 몰트만이 그를 평가하는 자리에 그가 감히 얼굴을 들고 나타날 수 없었다는 뜻이었다. 이 장면도 그의 겸손한 인격을 여실히 드러내는 듯이 보였다. 그 날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는 하나의 멋진 장면을 연출했다"고 했다.
조용기 목사의 신학을 평가하는 자리에서 조 목사에 대해 비판을 종용하는 사회자 앞에 당당히 조 목사를 비판했던 기억도 떠올렸다. 그는 "사회자였던 오영석 박사(한신대 전 총장)가 청중을 향해 조용기를 솔직히 비판해 보라고 여러 차례 종용했지만, 아무도 감히 나서지 않았다"며 "잠깐 동안의 침묵을 깨고 결국 내가 나서서 이렇게 말했다. "조용기 목사님이 살아 계시거나 돌아가신 후에도 그를 절대로 우상화하지 마십시오. 그를 위해 아무런 형상도 세우지 마십시오. 만약 조용기 목사님이 독재자 박정희와 은밀하게 거래하여 여의도 땅을 아주 싸게 구입하셨다면, 돌아가시기 전에 반드시 회개하십시오." 매우 당돌하고 무례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을 던진 나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아니 참으로 놀랍게도 나의 발언에 대해 그 누구도 항의하거나 욕설을 던지지 않았다"고 했다.
이 전 교수는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 후로도 나는 그를 만날 수 있었다. 2018년 한세대학교 대강당에서 열린 영산국제신학심포지엄의 발제자로 초대를 받았을 때, 그는 이미 매우 병약한 상태였기 때문에 한 마디 말도 주고받지 못했다. 그때도 나는 조용기 목사의 목회와 신학을 칭찬만 한 것이 아니라, 적절한 비판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비록 나의 비판이 적절하고 예의를 갖춘 것이었지만, 그날도 나를 비난하는 사람을 전혀 보지 못했다"고 했다.
별세한 조용기 목사에 대한 공과가 객관적으로 논의될 거이라고 예고한 이 전 교수는 고인을 만난 후에 받은 인상을 네 가지로 요약하기도 했다. 이 전 교수는 첫째로 "그는 시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회중의 욕구에 탁월하게 부응하는 목회자였지만, 성경을 임의로 선택하며 자신의 의도대로 해석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둘째로 "그는 심리학과 경영학을 목회에 접목하여 엄청난 성과를 이루었지만, 그가 진정한 목회자였는지 성공한 사업가였는지 잘 모르겠다. △그는 종종 예언자처럼 용감히 설교했지만, 시대의 모순과 불화하거나 저항할 줄 모르는 심약한 목회자였다"고 했다.
이어 셋째로 "그는 너그러운 자세로 늘 배우려고 노력하고 남의 비판도 너그러이 수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지만, 어떤 경우에는 매우 혼합적이고 타협적인 지식 세계도 보여주었다"고 했으며 마지막으로 "그는 목회와 설교자, 부흥 강사로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지만, 자신의 신변과 가족의 관리에는 실패한 사람처럼 보인다. 여하튼 한 세기 동안 그를 크게 사용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그의 고백처럼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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