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의 선교 역사에 장을 연 알렌 선교사(1894년 입경),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렌턴 모자 선교사(1885년 입경)들은 1기에 속한 선교사들이었다. 그 후 다수의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와 사역의 새로운 지경을 개척하는데, 그 지역이 바로 이북 지역으로 1890년에 사무엘 마펫(Samuel Austin Moffett), 1892년에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 그레함 리(Graham Lee)선교사는 제 2기의 개척 선교사들로 최초로 평양에 선교의 둥지를 틀었다. 이들은 평양을 선택하여 이북 지역의 선교 개척자들이 되었다.
이들 선교사들이 처음 평양을 방문했을 때에 기이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평양 대동문에 걸려있는 배의 닻(anchor)과 쇠사슬이었다. 이 대동문은 바로 전면의 대동강 능라도와 양각도 가운데에 있는 출입문으로 가장 중심적인 평양의 관문이었다. 이 선교사들은 그 동문 벽에 달려있는 그 두 개의 장식물에 대해 현지인들의 설명을 듣고서야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30여 년 전의 역사를 돌이키게 된다. 이들이 평양에 발을 딛기 전에 이미 그곳에 한 알의 밀알이 된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1839~1866)선교사가 평양에서 순교의 피를 흘리게 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바로 그 유명한 제너랄 셔만호(General Sherman) 사건과 연유된 것이었다.
이 셔만호 사건은 사실상 한국 근대사에 물꼬를 튼 역사이면서 한국교회사와 북한 교회사에 새로운 국면을 갖다 준 중요한 사건으로 그 이후에 상당한 영향을 주게 된다. 왜냐하면 이 사건이 일어난 후 5년이 되는 1871년에 미국 함대 5척이 강화도에서 이 사건의 진상 조사와 사과와 배상을 제시했으나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미군과 조선군 간에 전투가 벌어지는데, 그 역사가 바로 '신미양요'였다. 그러나 이 사건이 연유되어 미정부는 조선과의 수호통상 조약을 11년이 지난 1882년에 제물포에서 조.미 수호 통상조약을 성사시켰다. 그후 1885년 4월 5일에 한국교회사의 최초 선교사로 기록된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입경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이 한국교회사 첫 장을 열게 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처럼 셔만호 사건은 조선과의 외교 관계로 이어졌고 그로인한 조선의 근대사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렇다면 셔만호 사건이 어떻게 발생되었고 그 후 어떤 역사로 이어지는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이 사건의 폭넓게 일반 통사적인 측면과 교회사적인 측면이라는 양면을 균형있게 객관화하여 볼 필요가 있다.
먼저 그 당시의 조선을 둘러싼 동북아의 국제 정세를 먼저 살펴보면, 1860년대에 조선에서는 매우 엄정하고도 불안한 쇄국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 당시 수렴청정을 하고 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1821~1898)의 치세하에서 국내적으로는 천주교인들이 이미 왕실에 잠입되어 있었고, 국외적으로는 천주교와 개신교가 중국과 일본에 매우 활발한 포교 활동이 있었다. 조선에서는 오랫동안 봉건사회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불교와 유교와 학문적으로는 성리학에 몰입해 왔던 지식층들과 권력층에게는 서양의 기독교는 매우 신선하고도 충격적인 새로운 사상과 종교였기에 진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왕실은 경계할 수밖에 없는 외세 종교와 학문이였다. 특히 1801년의 황사영백서 사건 이후 천주학이라고도 하는 천주교를 정치적으로는 매우 경계시 하게 되었고 그러던 중에 다시 이양선이라고 하는 서양의 큰 배가 요란한 소리와 검은 연기를 뿜어내면서 평양 도성 한가운데에 나타나자 조선 왕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 조선 왕실은 청나라가 1884년과 그 후에도 아편전쟁으로 패하면서 서양의 세력들이 중국의 봉건 왕조를 위협하는 모습과 1858년의 일본과 미국과의 수호통상 조약으로 일본의 정국이 급변을 맞이하는 메이지 정국으로 전환되자, 서양과의 국교 수교와 통상에 대해서는 쇄국정책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정국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즉 조선의 국내외적 상황은 서양의 종교를 받아들이거나 서구의 문물이나 사상의 유입에 대해 빗장을 걸어 잠그게 된 상황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그 시대에는 동아시아에 서양의 근대화된 문명이 큰 조류를 이루면서 식민지 개척시대와 맞물리게 되었으며 동북아의 중국과 일본과 조선도 이 시대적 조류를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특징과 변화에 대해 역사적 관점으로 이를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 하였다. (계속)
강석진 목사(「근현대사로 읽는 북한교회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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