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구 박사
정성구 박사

정부는 ‘코로나19 감염예방법’을 빌미로, 자유대한민국의 모든 교회들의 예배를 통제하고 있다. 음악콘서트는 5,000명을 허용하고, 전철, 버스는 자유롭게 하면서, 왜 그렇게도 교회 예배는 작심하고 19명(정부는 최근 대면예배가 가능한 인원을 수용인원의 10%, 최대 99명까지로 정했다-편집자 주)까지로 정해놓고 있는지…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자는 반드시, 결국 망했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그나마 늦게라도 교회 지도자들은 정부의 과잉대응을 지적하고, 법적 대응을 하면서 다시 전과 같이 ‘대면 예배를 드려야겠다’는 ‘예배 회복운동’이 여러 곳에서 힘을 얻고 있다. 교회 지도자들이 비록 처음부터 정부의 예배 통제에 항거는 못했지만, 지금의 예배 회복운동은 뒷북을 치는 일이다. 그래도 뒷북이라도 치는 것은 옳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그냥 전과 같이 예배를 다시 드리자는 캠페인은 생각해 볼 점이 너무 많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제대로 된 예배를 드렸는지부터 반성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진정으로 그토록 생명보다 귀하다면, 교회 지도자들은 처음부터 생명 걸고 예배를 사수했어야 했다. 그러니 정부 권력에 의해서 기독교 탄압의 방법으로 교회와 예배가 발가벗긴 상태에서 그냥 예배 회복운동 만으로는 안된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카톨릭의 미사와 전혀 다르다.
예배는 종교행사가 아니다.
예배는 콘서트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예배는 성경적이고, 개혁교회의 전통에서 한참 멀어진 매우 인위적이고, 형식적이고 이교적 예배가 많았음을 반성해야 한다. 예배를 받으시는 분은 삼위 하나님이시지만, 대게는 매우 인본주의적이고, 청중의 입맛에 맞고, 감성에 맞고, 즐겁게 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필자는 여러해 전에 남미의 잘 알려진 신학자 한 분을 모시고, 서울의 한 대형교회에 예배를 드리려고 갔었다. 예배가 끝나고 나는 그에게 “오늘 예배가 어떠했나요?”라고 물었더니, 그의 대답은 “마치 미식 축구시합을 본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남미 사람들의 눈에도 한국교회의 예배는 마치 풋볼 게임을 구경하는 것처럼, 그저 즐기고 기분대로 하는 ‘감성적 예배’라는 것이었다. 오늘 한국교회는 교파를 막론하고 고성능 전자악기로 빠르게 연주하고, 드럼을 치며, 고래고래 고함을 치면서 CCM을 불러대고, 심지어 괴상한 율동을 하면서 예배하는 곳도 많았다.

그러니 교회 안에는 록 음악 같은 복음송은 있는데 경건한 찬송은 없다. 또한 어떤 목사는 여기저기 다니면서 찬송이 느리면 은혜가 안되고, 빨리 부를수록 은혜가 된다고 부추기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예배 분위기에 성삼위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드리는 영적예배는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예배를 콘서트쯤으로 생각하는 목사는 사람을 높이고, 사람들이 영광을 받도록 하고,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순종과 충성을 강요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성경 몇 구절을 인용하여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고리’식으로 둘러대고 있으니, 이렇게 합리화 하는 것은 예배가 아니다. 감성이 곧 영성이 아니다.

또 어떤 경우는 목회자가 사적, 신비적 체험을 성경 진리인 듯이 말하고, 성도들에게 그것을 진리로, 신앙의 표본으로 삼으려고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뿐만 아니라, 시중에 널리 깔려있는 심리학적 인본주의적인 책들을 대충 읽고, 그것이 마치 성경의 진리인 듯이 우겨대는 설교자도 적지 않다. 교회 개혁자 요한 칼빈(J. Calvin)은 500년 전에, “목사를 망하게 하는 것은 야망(Emvision)이다”라고 했다. 교회 성장의 꿈은 좋으나 그것이 목사개인의 야망이 되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비성경적, 비복음적, 비교리적인 것이라도 목사의 야망에 휘둘리는 경우가 많이 있다. 목회란, 목사 개인의 헛된 욕망과 꿈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다. 수가 적어도 하나님의 복음을 세상 끝날까지 증거하겠다는 순수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 회복은, 코로나19가 잠잠해지고 정부가 대면예배를 허용한다는 명령을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 예배 회복’은 무엇일까? 그것은 ‘성경대로의 예배’이다. 또한 교리적으로 맞는 예배 회복이 있어야 한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에서, 그 하나님은 영이라고 했다. 그런데 영은 옛 번역대로 대문자 ‘Spirit’으로서 일반적인 영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이시다. 곧 성령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진리란, 헬라어로 <άλήθεια>인데, <허구(Fiction)>의 반대어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진리라는 것은, ‘구약에 기록된 모든 메시야의 약속이 성취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따라서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 메시야가 나시리라는 구속사적 진리를 믿고, 순종하면서 드리는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라는 것이다.

예배 없이 구원 없고,
예배 없이 교회 없고,
예배 없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

예배 회복은 전과 같이 예배를 다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런 때에 엉망진창이 되고, 인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 예배의 형태를 ‘하나님의 중심’의 예배로,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로, ‘성경 중심’의 예배로, ‘개혁교회의 예배’ 원리를 회복해야 하리라고 본다.

참 예배 회복은, ‘교회가 참 교회가 되고, 목사가 참 목사가 되는 데’서 출발한다.

정성구 박사(전 총신대·대신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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