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서 펼쳐지는 2020 하계올림픽이 한창이다. 메달 획득 유무나 색상보다 참가 그 자체에 의의를 두는 게 올림픽 정신이라지만 그럼에도 올림픽에는 순위표가 있다.
세계인의 축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다는 건 남다른 영광이다. 온갖 찬사,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환호하는 관중소리가 금메달리스트에게 집중된다. 그는 한 명의 금메달리스트일 뿐 아니라 국위선양에 앞장 선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100년 전, 올림픽 금메달을 기꺼이 포기한 선수가 있다. 그것도 개인의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자국 언론과 국민들은 신앙을 이유로 유력한 금메달을 포기한 이 선수를 맹비난했다. 순식간에 국민적 영웅에서 국가의 역적으로 내몰린 지경이 됐다. 그러나 며칠 후 자신의 주종목이 아닌 들러리로 나선 종목에서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세상은 기적을 연출한 그에게 박수갈채를 쏟아냈다.
1924년 제8회 하계 파리올림픽 400m 육상경기에서 영국대표로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건 에릭 리들 이야기다. 리들의 주종목은 100m 육상경기였다. 그는 에든버러 대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육상선수 활동을 시작했고, 달리기에 엄청난 재능을 드러내면서 수년 간 국제대회를 휩쓸었다. 초반 가속력과 스피드가 워낙 뛰어나 1924년 올림픽 당시 100m 부문에서 금메달 후보 0순위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주최국 프랑스혁명 기념일과 맞물려 육상 경기 일정이 재조정되는 바람에 리들의 주종목 100m 예선 경기가 일요일로 잡히고 말았다. 고심 끝에 리들은 웨일즈 왕자와 영국팀 총감독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일에는 달릴 수 없다"고 선포한다.
자신을 대신해 100m 경기에 출전한 동료가 분발해 금메달을 따는 동안 리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에 주일예배에 참석해 주일을 온전히 주님께 바쳤다.
그리고 그는 주일에 열리지 않는 200m 육상경기에 참여해 예상을 뒤엎고 동메달을 차지한다. 이어 에릭은 역시 주일이 아닌 다른 요일에 열리는 400m 경기에 참석하게 해 달라고 감독을 찾아가 직접 부탁했다. 유례 없는 일이었지만 감독은 이를 허락했다.
드디어 진행된 대망의 400m 육상 결승. 이 경기에서 리들을 주목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400m는 그의 주종목도 아닐 뿐더러 스위스의 임바흐나 미국의 피치 같은 유력한 금메달 후보들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기에 앞서 리들은 자신의 담당 안마사가 손에 건네준 쪽지를 마음에 새겼다. 쪽지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있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사무엘상 2장 30절)"
출발신호가 울리기 무섭게 리들은 전력질주했다. 이 장면을 본 전문가들은 그가 곧 지칠 것이라 걱정하기도 했고, 그의 무모한 선택을 비웃기도 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전력질주 후 곧 체력이 동날 것이라 여겨졌던 리들이 400m 내내 같은 속도로 달리며 1등으로 결승지점에 들어온 것이다. 47초 6. 세계신기록이 작성되는 순간이었다.
"처음 200m는 내 힘으로 최선을 다해 달렸고, 나머지 200m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더 빠르게 달렸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리들은 이렇게 말했다.
세계를 놀라게 한 400m 계주 우승 후 리들은 전보다 더 유명인사가 됐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에게 쏟아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뒤로 하고 홀연 중국 선교사로 떠난다. 만류하며 이유를 묻는 기자들에게 리들은 "승리의 포도주보다 주님께 헌신하는 삶이 더 중요하다"고 답했다.
당시 정치/사회적으로 혼란의 소용돌이에 있던 중국에서 리들은 주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텐진에서 중국인 학생들에게 선진 지식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봉사했으며, 교회에서는 어린이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했다.
이어 샤오창 지역으로 선교 무대를 옮겨 전쟁으로 죽어가는 농민들을 치료하고 돕는 사역을 감당했다. 샤오창의 상황은 열악하지 그지 없었다.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의 대립, 엎친데 덮친격으로 일본군이 침략전쟁을 시작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갔다.
마침내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샤오창 선교부를 폐쇄하고 그 곳에 있던 서양선교사들을 구금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자 리들은 임신 중인 아내와 두 딸을 캐나다 친정집으로 돌려보내고, 혼자서만 중국인들을 섬기기로 했다. 그러다 1943년 일본군에 의해 웨이시엔 수용소에 억류된 리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다른 사람들을 돌보다 2년 후인 1945년 2월, 43세의 젊은 나이로 전력질주 해온 이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에릭 리들의 감동적인 실화는 휴 허드슨 감독이 만든 영화 '불의 전차'를 통해 세계에 알려지게 됐고, 리들은 재조명됐다. '불의 전차'는 육상달리기 영화에서 전설로 남게 됐을 뿐 아니라 영국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1982년 미국의 제54회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오스카 작품상, 각본상, 음악상 및 의상상 등 4개 부문을 휩쓸어 기록적인 작품으로 남게 됐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