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은 발발 초기부터 3년 후 정전이 될 때까지 기적의 연속이었다. 그 수많은 기적들 가운데,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사건은 1957년에 나온 영화 ‘Battle Hymn (전송가)’에 등장한 사연이다. 당시 할리우드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배우 록 허드슨이 주연한 이 영화는 한국전쟁 당시 전쟁 고아의 아버지로 불리던 미 공군 조종사 딘 헤스(Dean E. Hess) 대령의 6.25 참전 실화를 영화로 만든 작품으로 알려졌다.
영화의 내용은 이러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전 용사인 딘 헤스는 동료들이 '킬러 헤스'라고 부를 정도로 맹활약한 조종사이지만, 자기의 실수로 독일의 한 고아원에 폭탄을 떨어뜨려 수십명의 아이들을 죽게 한 사건으로 인해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에 성직자가 되었지만, 과거의 오폭사건으로 괴로워하던 중에 한국전쟁에 자원입대하여 다시금 공군 장교로 부임한다.
용산 기지에 부임한 그는 한국 공군에게 비행기 조종술을 가르친다. 그후 추수감사절 파티가 열리던 날 막사에 몰래 잠입한 전쟁 고아들이 버린 음식을 훔쳐먹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던 중에 안순양이라는 여인이 고아들을 돌보는 것을 보고, 이곳에 생필품을 적극 지원하자 400여명의 전쟁 고아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던 중 1950년 12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피난을 떠났지만, 이 고아들은 피난길이 막혀 또다시 버려지게 되었다. 이때 그는 사방에 호소하여 수송기로 제주도로 피신시키는데 성공하였고, 아이들은 그곳에서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맞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미담의 이면에는 또 다른 사연이 숨겨져 있다. 자서전과 영화에서는 헤스 대령이 '유모차 공수작전'의 주역인 것처럼 묘사되었지만, 실제로는 당시 공군 군목이던 블레이즈델 중령이 주역이고 헤스 대령은 조역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블레이즈델 중령은 이 사건으로 인해 '명령 불복종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이때 재판장이 군법을 위반한 이유를 묻자, 그는 "누군가는 반드시 그 일을 해야했습니다. 내 임무가 죽음에 내몰린 아이들을 죽게 놓아두는 것이라면 곧 바로 전역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재판장은 그를 처벌하지 않았다.
사연은 이러했다. 1950년 12월, 북한군의 서울 재점령이 다가오자 대다수의 군인들은 서울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미국 제5공군의 군목 러셀 블레이즈델 중령은 떠날 수가 없었다. 100여 명의 봉사자들과 함께 1천 명 넘는 고아를 돌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배편을 마련해주겠다는 군 관계자의 연락을 받고 3일 만에 인천항에 도착했지만 그들을 기다린 것은 100명도 탈 수 없는 낡고 작은 배였다. 절망에 빠진 블레이즈델 중령은 서울에서 우연히 만난 제5공군 작전참모 터너 로저스 대령에게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로저스 대령은 미국에서 출발해 일본 오키나와기지에 도착한 C-54 수송기 16대를 보낼 테니 이튿날 아침 8시까지 김포공항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오라고 말했지만 짧은 시간에 아이들을 이동시키기도 쉽지 않았다. 공군 수송부에 요청했으나 보내줄 차량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또 다시 좌절감에 휩싸여 있을 때 시멘트 하역 작업을 위해 미군 해병대 트럭 14대가 인천항에 나타났다. 블레이즈델 중령은 상부의 명령이라고 거짓말하면서 "모든 작업을 중지하고 김포공항까지 아이들을 태워 옮기라"고 지시했다. 약속 시간보다 2시간이나 늦게 김포공항에 도착했지만 다행히 수송기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1950년 12월 20일 전쟁의 포화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고아 1069명은 제주공항에 무사히 도착해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었다. 이들은 황온순 여사가 운영하던 한국보육원에서 성인으로 자라났다. 황온순 여사는 <전송가>에서 여주인공으로 등장한 안순양의 실제 인물이다.
70년 전에 일어난 이날의 일을 '유모차 공수작전'(The Kiddy Car Airlift)이라고 부른다. 블레이즈델 중령은 훗날 한국판 '쉰들러 리스트'의 주인공이란 별칭을 얻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명령 불복종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곤욕을 치루었다. '유모차 공수작전'은 3일 뒤 미군 수송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피란민 1만4천여 명을 태우고 흥남부두를 떠나 12월 25일 거제도에 도착한 '흥남 철수작전'과 함께 한국전쟁의 양대 크리스마스 기적으로 꼽힌다.
한편 전쟁이 끝난 후 미국으로 귀국한 딘 헤스 대령은 6·25전쟁 당시의 경험을 담은 자서전 을 발간하고, 책의 모든 수익금을 기부하여 고아원 설립에 사용하는 등 적극적인 전쟁고아 지원활동을 펼쳤다. 뿐만 아니라 한국 소녀를 자신의 아이로 입양까지 한 그는 평생 전쟁고아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이러한 그의 헌신적인 노력을 기려 한국 정부에서 1951년과 1960년에 무공훈장을, 1962년에는 소파상을 각각 수여했다.
2017년 제주도에서는 딘 헤스 대령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에는 수송기를 향해 손을 흔드는 전쟁 고아들의 모습을 표현한 중앙의 탑을 중심으로 오른쪽 비석에는 딘 헤스 대령이 F-51 전투기를 타고 한·미군 조종사들과 용맹하게 출격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조각했다. 또 왼쪽 비석에는 딘 헤스 대령과 블레이즈델 미 군목, 황온순 보육원 원장, 계원철 공군 군의관 등 전쟁고아 후송 작전 공로자들이 전쟁고아를 돌보고 있는 모습을 새겼고, 뒷면에는 고인의 소망대로 "우리가 구조할 수 없었던 생명을 추모하며"라는 글귀가 새겨졌다.
1910년 9월 4일 미국 미네소타주 헤이필드에서 태어난 블레이즈델 중령은 매칼레스터대학교와 매코믹신학교에서 수학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40년 7월 미국 육군항공대에 입대해 군목으로 활동하며 제2차 대전에도 참전했다. 한국전이 발발하자 제5공군에 배속되어 대구로 파견되었다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에 온 그는 장병들의 신앙생활을 이끄는 본연의 임무보다는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는 데 힘썼다. 길에서 마주친 굶주린 아이들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기붕 서울시장에게 부탁해서 초등학교 건물을 빌린 뒤에 짚차를 타고 서울 거리를 돌면서 고아들을 데리고 오자 순식간에 1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는 고아들을 먹이고 입힐 식량과 의복을 구하느라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의 정성에 감복한 군 장병들이 월급을 쪼개서 후원금을 보탰고 자원봉사자도 모여들었다. '유모차 공수작전'은 이 전쟁고아들을 대상으로 행해진 사건이었다.
블레이즈델 중령은 1951년 한국을 떠난 뒤 일본과 리비아에서 근무하다가 1964년에 대령으로 예편했다. 미국에서 목회자로 활동하면서 1966년부터 1977년까지는 뉴욕주 사회복지부 대표로 일했다. 2001년 방한해 황온순 여사와 그가 구한 고아 출신들을 만났다. 이때 경희대학교에서는 그에게 사회복지학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2007년 별세했으며 네바다주 볼더시티의 재향군인 묘지에 안장됐다.
광주광역시에 있는 충현원은 2008년 그의 회고록 한국판을 내고 이듬 해에는 동상도 세웠다. 그는 충현원의 건물이 너무 낡아서 고아들이 생활하기가 불편하다는 딱한 사연을 듣고 회고록 판권과 영화 제작권을 충현원에 기증했다. 이런 인연으로 2017년 6월 22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사회복지법인 충현원과 재외동포연구원이 공동주최하는 '한국전쟁 고아의 아버지, 미 공군 군목. 고 러셀 블레이즈델 대령 10주기 추모식 및 기념 국제학술포럼'이 열렸다. 그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뜻깊은 자리였다.
그러면 딘 헤스(Dean E. Hess, 1917-2015) 대령은 누구인가.
1917년 오하이오주 매리에타에서 태어난 딘 헤스는 목사가 되기 위해 매리에타대학을 졸업하고, 그리스도교 교단(Christ Church)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41년 12월 진주만 공격이 일어나자 육군 항공대에 입대하여 조종사로 훈련을 받고 프랑스에서 전투 조종사로 임무를 수행했다. 전역 후 1948년 7월 현역으로 소환되어 일본에 주둔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군이 대한민국 공군의 F-51 전투기 훈련과 전투 조종사 양성을 위해 창설한 바우트 원 프로젝트(Bout One Project)의 지휘관으로 한국으로 부임하여 7월 2일 대구에 도착하였다.
헤스는 이듬 해 6월까지 한국에서 복무하면서 250회의 전투 임무를 수행하여 한·미 양국에서 무공훈장을 받았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 공군의 양아버지'로 불린다. 1950년 12월 20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서울 철수를 결행할 때, 공군 군목이던 러셀 블레이즈델 중령을 도와 1,069명의 전쟁고아를 서울에서 제주도로 수송하는데도 기여했다. 이를 계기로 고아들을 위한 자선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여러 차례 한국보육원을 방문하고 고아들을 위한 모금에 앞장섰다. 헤스 대령은 2015년 3월 3일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98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그런 점에서 딘 헤스 대령은 '한국전쟁의 영웅'이자 '전쟁고아의 아버지'로 기억되고 있다. 비록 '유모차 공수작전'의 실제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그가 조연으로서 기여한 공로 또한 불레이즈델 중령에 못지 않은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전송가>의 내용상 오류를 두고 함께 고아들을 수송하느라 애쓴 마이크 스트랭 하사가 "왜 항의하지 않느냐"고 묻자 블레이즈델 중령은 "우리의 목표는 고아들을 구하는 것이었고, 그 목표를 이뤘다. 어떤 일은 돈이나 명예로 따질 수 없는 보상이 따른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전송가>에 얽힌 사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60년 5월 18일 동아일보에는 '한국 환상곡'이 영화 <전송가>의 주인공인 '한국전쟁의 영웅' 딘 헤스(D.E. Hess) 대령에 의해 영화화된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후에는 이전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진전된 기사가 보도되었다.
"안익태 씨의 '코리안 판타지'(한국교향환상곡)가 영화화된다. 이 작품의 영화화 권리를 획득한 동성영화사 발표에 의하면, 제목은 코리아. 내용은 민족 수난사를 배경으로 한국의 정신사를 테마로 한 코리안 판타지에 드라마를 안배 세미뮤지컬로 꾸미게 될 것이다. 연출은 전창근·유현목 공동 감독이 메가폰을 들게 될 것인데 초가을에 크랑크인할 예정이며, 영화음악의 작곡 편곡 지휘는 안익태 자신이 맡게 될 것이라고 한다. 영화에는 미국인 배우 록 허드슨(Rock Hudson)과 할리우드의 한인 배우 필립 안(Philip Ahn)도 출연하게 될 것이다."(동아일보 1962.4.4)
도산 안창호의 아들로 할리우드에서 배우로 활동하던 필립 안과 미국 배우 록 허드슨이 영화에 출연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야심찬 계획이었다. 필립 안과 록 허드슨은 <전송가>에 함께 출연한 배우였다.
무슨 사연일까? '한국 환상곡'(Symphonic Korea Fantasy)의 영화화를 통해서 한국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것을 필생의 과업으로 여기던 안익태는 <전송가>의 후광을 업고 할리우드 영화 제작사들과 협상을 진행했다. 이 일에는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과 영화감독 이병일 등이 참여하였고, 헤스 대령이 제작자로 나섰으나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정부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한국 영화사가 할리우드 영화사와 합작영화를 만들기에는 너무나 영세했기 때문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김형석, 「안익태와 이승만 사이의 숨겨진 비사」, <월간조선>2019.10, 참조)
이렇듯이 '전쟁고아의 아버지'로 불리는 블레이즈델과 헤스 두 군인 목사의 미담을 그린 영화 <전송가>는 전쟁의 참화 가운데 피어난 휴머니즘을 통해 국경과 인종을 뛰어넘는 인류애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김형석 목사(전 총신대 역사학 교수,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사)대한민국역사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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