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라 골짜기(Elah Vally)는 쉐펠라 지역에 있는 한 골짜기이다. 쉐펠라 지역은 이스라엘의 요충지 중 한 곳이다. 산악지대와 해안의 중간에 위치해 있는데, 오른쪽으로는 유대 산맥이 이어지고, 왼쪽으로는 넓고 광활한 지중해 연안으로 이어진다. 이곳은 포도밭, 밀밭, 나무숲이 펼쳐지는 곳이라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2세기 경 마카비 전쟁의 장소가 이곳이었고, 12세기 십자군들이 이집트 군대와 싸웠던 곳도 이곳이었다. 김운용 교수는 이 지역에 대해 유대 헤브론, 베들레헴, 예루살렘과 같은 주요 도시로 진군하는데 교두보와 같은 곳이었다고 밝힌다. 쉐펠라 지역에서 능선을 따라 산악지형을 지나가면 베들레헴에 이르고, 남쪽으로 가면 헤브론에 이르고, 북쪽으로 가면 예루살렘과 기브아에 이른다. 예루살렘과 헤브론을 차단하거나 혹은 동시에 공략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인 곳이다.
쉐펠라 지역에는 다섯 골짜기가 있다. 아얄론 골짜기, 소렉 골짜기, 엘라 골짜기, 구브린 골짜기, 라기스 골짜기이다. 제일 위쪽의 아얄론 골짜기가 여호수아가 기브온과의 전투에서 해와 달을 멈추라고 명령했던 곳이고, 그 아래 소렉 골짜기는 삼손의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그리고 오늘 김운용 교수가 주목한 곳이 바로 그 아래 세 번째 골짜기인 엘라 골짜기이다.
기원전 11세기 경 당시 서쪽 지중해변은 블레셋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크레타섬 출신으로 팔레스틴으로 이주해서 해안에 정착해 살고 있었는데, 더 넓은 지역으로 지형을 확대하려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블레셋인들은 요충지 엘라 골짜기 남쪽 능선에 진지를 구축했고, 이스라엘 군대도 이에 대응하기 위해 북쪽 능선에 진지를 구축했다. 그런데 평지를 지나 적군이 진을 치고 있는 반대편으로 접근하면 곧바로 적의 공격을 받게 되기에 양쪽이 교착상태에 빠졌고, 이 사태를 풀기 위해 전체 군대를 대표하여 한 사람이 나와 싸우는 일대일 싸움이 제안되었다. 이 방법은 헬라시대 및 고대 전쟁에서 흔히 사용되던 방법이기도 하다. 이 제안에, 블레셋에서는 가장 뛰어난 전사를 능선 아래로 내려보냈다. 블레셋에서 대표로 나온 장수는 키가 3미터 가까이 되었고, 머리에는 청동 투구를 썼고, 갑옷을 입었는데 갑옷의 무게만 57킬래그램이었다고 한다. 블레셋 대표로 나온 장수는 아침저녁으로 나와서 상대 이스라엘 군대를 향해 소리를 쳤는데, 이스라엘 군대는 그만한 상대를 제압할만한 군인이 없었기에 어찌할 방도도 없이 다만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다가 40일 정도 흐른 시점에서 이스라엘에서도 한 사람을 내보내는데, 10대 소년이었다.
블레셋 대표로 나온 이가 골리앗, 이스라엘 대표로 나온 이가 소년 다윗이다. 그 유명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다. 김운용 교수가 "엘라 골짜기의 양치기를 만나보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소년 다윗을 만나보라고 한 것이다.
김 교수는 소년 다윗이 가졌던 신앙이 오늘날 어렵고 힘들고 예측하기 힘들어 불안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살아있는 메시지를 던진다고 말한다. "성경은 엘레 골짜기를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고 어떻게 춤을 출 수 있었던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그 양치기를 좀 만나보라고 도전하고 있다."
십대 양치기 소년 다윗이 블레셋 대표 골리앗의 맞상대로 나가는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다윗이 골리앗 사태에 관심을 보이자 그의 맏형 엘리압은 다윗더러 '교만한 녀석이고 전쟁을 구경하러 나왔다'고 면박을 줬고, 사울도 대표로 출전하겠다는 다윗에게 '상대는 어릴 때부터 군 생활을 해온 장군이고 너는 겨우 어린 소년'이라며 말렸다. 그런데 이에 대한 다윗의 대답이 다부지다. 그는 사울왕에게 '내가 아버지의 양을 칠 때 사자나 곰이 와서 양 새끼를 움켜가면 몽둥이를 가지고 뒤따라가서 그 입에서 새끼를 구해 내었다'며 '그렇게 나를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구원하신 여호와께서는 저 블레셋 사람에게서도 나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당차게 말했다. 이 말에 사울은 다윗을 내보내기로 결심한다. 한 나라의 왕이 민족의 명운이 걸린 중요한 싸움에 십대 소년의 말을 듣고 십대 소년을 내보내기로 한 것이 쉬이 이해될만한 내용은 아니나, 김 교수는 여기서 한 나라인 왕인 사울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는 다윗의 말에 밀도 높게 주목했다.
김 교수는 "...나를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구원하신 여호와께서는 저 블레셋 사람에게서도 나를 구원하실 것입니다"라는 말에서 드러나는 다윗의 신앙에 천착했다. 힘겨운 전장의 현장에서 사람들이 골리앗의 거대한 키와 육중한 갑옷, 무시무시한 칼과 창 그리고 그를 보호하는 육중한 방패에 지배당하고 있을 때, 다윗은 눈에 보이는 그것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이 믿음의 원천은 다름 아닌 다윗 자신의 삶에서 직접 구체적으로 경험한 하나님이었다. 김 교수는 "다윗은 날마다 죽을 것 같은 삶의 현장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계속 경험"했음을 밝히면서, 이와 같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이 오늘날 우리들의 체험이 되어야 한다고 거듭하여 강조했다.
그러나 이 체험은 하늘에서 마냥 떨어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김 교수는 삶의 현장에서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저절로' 혹은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또한 강조했다. 3세대 4세대 믿음의 가문의 자녀라 할지라도, 혹은 신학대학원을 다닌다고 할지라도 현실을 넘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 없이 굳게 의지하는 다윗의 믿음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김 교수는 이 믿음을 가지기 위하여 확실한 자기 정체성, 즉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정체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윗에게는 이같은 정체성이 확고했다. 그래서 그는 사울이 자신이 착용하고 있던 놋투구와 갑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다. 그러나 다윗은 당시 생명싸개라 불리던 그 갑옷을 내어던져버렸다. 다윗이 애초에 갑옷에 의지했던 사람이었다면, 주변 군인들이 한번 쯤 입어보고 싶어 했을 그 왕이 입던 가장 화려했을 갑옷을 내려놓을 수 없었을 터였다. 그러나 다윗이 의지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이었고, 그의 정체성은 그의 삶에서 경험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은 자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단절되지 않은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 마냥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불안정한 현실 가운데 우리를 섬세히 도우시는 구체적인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고 고백하는 것도 마냥 넓고 큰 길은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라면 그리고 특히 신학대/신대원 생들이라면 이 체험을 반드시 해야 함을 김 교수는 강조했다: "하늘을 향해서 거룩한 손을 높이 들 때 이기게 하시는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경험하지 않고 여러분이 사역의 현장, 인생의 현장으로 나가게 되면, 여러분들은 놀림감이 될 것입니다.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을 것이고, 복음의 능력을 나타낼 수 없을 것이고, 교회를 세울 수도 없을 것이며, 사역도 세울 수 없을 것이고, 한 영혼도 주님 앞에 세울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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