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존 맥아더 목사가 2015년 예수의 비유를 다룬 책 "Parables: The Mysteries of God's Kingdom Revealed Through the Stories Jesus Told"을 출간했다. 한국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비유』라는 제목으로 번역서를 생명의말씀사에서 출간하였다. 이 책에서 맥아더 목사는 12개의 비유를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추어 해설한다. 이 책을 중심으로 하여 존 맥아더 목사의 비유에 대한 이해를 소개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불의하지 않다"
맥아더 목사가 네 번째로 다룬 비유는 '포도원 품꾼'으로 잘 알려진 예수의 가르침이다. 이 비유는 당시 유대인들의 생활상에서 쉽게 이해 가능한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일손이 필요한 포도원, 일거리를 찾는 자들이 모인 마을 장터, 하루 일당치고는 꽤 넉넉한 금액이었던 한 데나리온은 모두 익숙한 소재들이다. 그런데 비유 장치가 일상적인 것에 비하여 이 메시지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공정성'의 문제 때문이다.
이 비유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포도원의 주인이 일손이 필요하여 장터에 나가 일꾼들을 고용하였다. 총 4번에 걸쳐 일꾼들을 데려왔는데, 오늘날 우리들의 시간 체계로 치면 이른 아침, 오전 9시, 정오, 오후 5시에 각각 일꾼들을 데려왔다. 이른 아침에 데려온 품꾼들에게는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였고, 오전 9시 계약 일꾼들에게는 '상당하게' 주겠다고 하였다. 날이 저물었을 때 나중에 온 일꾼들부터 품삯을 받았는데, 겨우 1시간가량 일한 일꾼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 당시 한 데나리온은 로마 군대 소속 군인들의 하루 일당에 해당되던, 꽤 넉넉한 하루 임금이었다. 그것을 보고 먼저 온 일꾼들은 "더 받을 줄 알았"을 것이다. 가장 먼저 이른 아침에 온 일꾼들에게 애초에 약속된 금액이 한 데나리온이었지만, 겨우 1시간 일한 일꾼과 새벽부터 일한 일꾼들의 삯에는 분명 차등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른 아침에 온 자들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 씩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집주인을 원망"하였다.
포도원 주인이 분명하게 이른 아침 데리고 온 일꾼들에게 애초 제시하였던 금액이 한 데나리온이 맞기는 하지만, 최장 12시간 가까이 일한 일꾼과 겨우 1시간 남짓 일한 일꾼이 같은 금액의 보수를 받는다는 것은 한편으로 분명 일찍 온 일꾼으로서는 억울해할만한 일이기도 하다. 맥아더 목사는 먼저 온 일꾼들이 불평하게 된 연유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훨씬 더 관대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먼저 온 일꾼들의 입장에서 오후 5시에 느즈막히 온 일꾼들은 자신들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계약법상에는 분명 문제가 없지만, 통상적인 이해로 먼저 온 자들의 감정이 이해받지 못할 것도 아니다. 이 간단치 않은 문제에 대하여 맥아더 목사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예수님은 공정한 노동법, 최저 임음, 공정한 거래 원칙과 같은 세상의 법칙을 가르치지 않으셨다. 그분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영역 안에서 은혜가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하였다."
맥아더 목사는 이 비유의 초점을 '일꾼들'이나 '품삯'이 아닌, '집 주인'으로 옮긴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집 주인'에게 초점을 맞춘다." 비유의 초점이 '일꾼'들이 아닌 '집 주인'으로 옮겨지면, 이 비유의 해석 포커스는 일꾼들의 노동이나 그들이 받는 대우의 문제가 아닌, 집 주인의 행위에 맞춰진다. 그렇다면 이 비유에서 집 주인의 행동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맥아더 목사에 따르면 이 비유에서 포도원은 하나님 나라를, 일꾼들은 신자들을, 그리고 집 주인은 하나님을 나타낸다. 즉 이 비유의 전체 이야기는 집 주인이 일꾼들을 대하는 문제인데, 다른 말로 하나님이 신자들을 어떻게 무엇으로 대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맥아더 목사는 단적으로 예수께서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영역 안에서 은혜가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하셨다"고 밝혔다. '일꾼'들의 대우 문제가 아닌,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은혜와 구원을 베푸는가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 가운데 우리는 두 가지 견지에서 이 비유를 조망할 수 있다.
첫째로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은혜를, 구원을 베푸신다. 그런데 이 베풂의 동기나 원인은 인간 쪽에 있지 않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사역이고,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지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맥아더 목사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이 비유는 하나님이 구원을 계획하고 시작하셨다고 가르친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 베푸시는 것을 제한하거나 구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에게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누구를 선택해 긍휼을 베푸시든, 그것은 오로지 그분만의 특권이다."
맥아더 목사는 비유에서 일꾼들이 일하는 시간은 살아있는 동안이고, 삯으로 받은 데나리온은 영생이라고 해설한다. 삯이 영생이라고 할 때, 먼저 온 자들의 불평어린 행동들은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인간이 어떤 일을 아무리 훌륭하게 완수하였다 하여도 죄적 실존인 인간에게 구원, 영생, 하늘나라로의 초대는 과분한 것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일꾼들을 언제 부르는 가에 대한 것은 수혜를 받는 인간 쪽에서 따질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전적으로 집 주인의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행위에 달린 문제이다. 맥아더 목사는 이 비유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 은혜를 생생하게 묘사한다"고 하였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두 번째 견지에 맞닥뜨린다. 은혜가 하나님의 전적이고 자유로우신 베푸심일 때,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행위나 공로에 전혀 의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안도를 준다. 맥아더 목사가 "일꾼들이 그만한 보수를 받을 만큼 일하지 않았"다고 밝힌 것과 같이, 우리 역시도 우리의 모든 죄적 실존을 모두 덮어버릴 수 있을 만큼의 선한 업적을 쌓기가 불가능에 수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로신앙에 찌들어있는 우리는 여전히 또 이의를 제기한다. 이른 새벽에 온 사람과 해질녁에 온 사람의 일의 양이 다르다고 논리성을 들여가며 주장한다. 맥아더 목사는 한 예로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만난 강도의 사례를 든다. 그 강도는 일생을 범죄자로 살다가 사형에 처해진 흉악범이지만 마지막의 회개로 영원한 낙원을 약속받았다. 십자가 강도에게 임한 은혜는 과연 "공정한가?"라고 혹자는 묻는다. 맥아더 목사는 더 구체적으로 "세리들, 창기들, 걸인들...도 평생 동안 섬김을 다해 사람들과...똑같은 영생을 누린다"고 대담하게 밝혔다.
이른 아침에 와서 거의 12시간 가까이 일한 일꾼도 그리고 해질녘에 와서 한 시간 가량 일한 일꾼도 똑같이 주인으로부터 한 데나리온을 받은 이 어려운 비유를 해설하며, 맥아더 목사는 "은혜는 불의하지 않다"고 강조한다. 천국은 자격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나 혹은 우리가 힘든 사역을 통해 공로를 세워 얻는 상급이 아닌, "모든 믿는 자에게 똑같이 풍성하게 주어지는 은혜로운 선물"임을 이 비유가 나타낸다고 그는 강조한다. 하나님의 긍휼은 인간의 선행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은혜는, 이른 아침에 온 자에게나 해질녁에 온 자에게나 모든 이에게 과분한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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