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유한하고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 이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은 겸손해 질 수밖에 없다. 전도서의 저자는 그의 인생 말년에 삶에서의 모든 부귀영화가 헛된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1~2). 이 말씀과 같이 사람은 죽음을 의식했을 때 비로소 겸손해 질 수 있으며 세상의 부귀영화가 헛된 것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알프레드 노벨은 형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오인한 신문기자가 자신의 삶을 평가한 기사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 후 인생관이 바뀌어 다이너마이트 발명으로 번 돈으로 노벨상을 제정했다는 일화는 죽음을 의식하면서 사는 삶의 이점을 보여준다.
예일대학의 셀리 케이건은 예일공개강좌(Open Yale Course) 철학부문에서 죽음에 대해 종교를 배제한 모든 세상의 관점들을 비교 검토하고 있다. 그는 “사람은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4가지 죽음의 특성 때문으로 설명한다. 첫째,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죽음의 필연성). 둘째, 인간은 얼마나 살지 모른다(죽음의 가변성). 셋째, 언제 죽을지 모른다(죽음의 예측불가능성). 넷째,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죽음의 편재성). 그래서 인간의 모든 학문은 죽음을 이해하거나, 극복하거나, 수용하거나, 아름답게 승화시키기 위해 발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모든 종교 혹은 문화권에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과 그 이후를 어떤 것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라 죽음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이슬람은 타협도 없고 인간과 직접 접촉하지도 않는 신성한 알라가 내린 계시를 잘 따르라고 가르친다. 이슬람 세계관의 5기둥을 잘 지키면서, 무슬림이면 반드시 지켜야할 5가지 행동강령을 지키라고 가르친다. 무슬림 개개인의 오른쪽 어깨에는 선행을 헤아리는 지니가, 왼쪽 어깨에는 악행을 헤아리는 지니가 평생 동안 그들의 행동을 기록한다. 죽음의 순간 알라 앞에서 선행과 악행을 헤아린 자루가 천칭저울의 양쪽에 놓여진다. 선행이 더 무거우면 천국으로 악행이 더 무거우면 지옥행이 기다리고 있다고 그들은 믿는다. 그러나 하나의 선행과 악행의 무게가 어떻게 결정되는지에 대한 명확한 원칙이 없기에, 개개인의 무슬림들은 그저 두려움에 떨며 드러난 선행을 더 많이 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불교, 힌두교, 도교 등의 동양종교에서는 윤회 혹은 환생의 개념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죽으면 다음 생에 또 다른 삶으로 태어난다. 끝없이 돌고 도는 윤회의 삶에서 벗어나는 길은 스스로가 신이며, 눈에 보이는 세상의 좋은 것들이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 큰 깨달음을 통해 스스로가 신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큰 깨달음을 얻어 그것을 인간들에게 드러낸 사례가 극히 희귀함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들 세계관에서는 깨달음을 얻고자 힘써 노력하는 것도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관조적인 삶을 살게 된다. 윤회에 의해 기회는 끝없이 있기에 죽음에 대해서도 대단히 낙관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인본주의, 공산주의, 포스트모던 같은 세속적 무신론 세계관에서는 호흡, 맥박, 혈압 같은 생명신호가 끝나면 영혼은 자취 없이 사라진다고 규정한다. 영적인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죽은 후에 영혼이 가게 될 천국이나 지옥 같은 사후세계는 없다고 굳게 믿는다. 죽음 후에 절대자 앞에서의 심판 같은 것은 없으므로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도덕적 가치가 없다고 믿기에 “케세라세라”를 외치며 세상을 함부로 사는 경향이 있다. 공격적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 조차 “심판할 신이 없다고 믿는 요즘 사람들은 너무 세상을 함부로 살아 도덕이 땅에 떨어진 것 같다.”고 불평할 정도가 된 것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심판이 없다고 큰소리치지만, 실상 나이가 많아질수록 자신의 내면에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점점 커가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파스칼의 팡세에는 “파스칼의 내기”라고 알려진 다음과 같은 기독교 변증논리가 있다. “신의 존재를 믿고 말씀에 따라 산 사람은 죽어서 심판이 있다면 무한한 이득을 볼 것이다. 비록 죽음 후에 심판이 없더라도, 구원을 향한 그의 노력이 의미를 상실한 손해가 있지만 그의 삶 중에 나름의 가치를 가진다. 반면 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마음대로 산 사람이 죽어서 심판대에 서야 한다면 무한한 불이익을 볼 것이다. 심판이 없다면 죽음 후 구원에 대한 손해는 없겠지만, 그의 삶 속에서의 악행을 통해 양심의 지옥을 이미 맛보았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그 말씀을 따르는 것이 확률적으로 훨씬 이득이 높다.” 파스칼의 논리가 무신론자들에 몇 가지 측면에서 공격을 받고 있긴 하나, 복음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설득력이 있다.
철학은 죽음을 이해하려는 학문으로 그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하는데 쾌락주의와 금욕주의이다. 전자는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현실 속의 쾌락에 빠지는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가 런던의 시내버스 광고판에 쓴 문구 “아마 하나님은 없을걸. 그러니 심판 걱정하지 말고 삶을 마음껏 즐겨.”가 생각난다. 후자는 죽음의 두려움을 인정하고 바른 삶으로 정면 돌파하려는 것인데 “죽음을 기억하라 Memento mori”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러나 두 가지 방법 모두 죽음의 극복에 대한 시원한 답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러면 죽음에 대한 기독교의 답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으며,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심을 증언한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의 사후가 어떠할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예표를 보여준 것이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이런 약속을 이미 받은 사람으로서 기독교인은 자신의 삶 속에서 그 약속의 힘을 세상에 어떻게 드러내 보여야 할지 숙고해야 할 것이다.
묵상: 만약 당신이 오늘 죽는다면 천국에 갈 것을 믿는가?
류현모(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 분자유전학-약리학교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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