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조직신학회(정홍열 회장)가 29일 오후 8시 온라인 줌으로 월례신학포럼을 개최했다. 이날 정지련 교수(감리교인천신학교)는 ‘성령과 기도에 관한 소고’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정 교수는 “성령의 원어(原語)는 히브리어 ‘루아흐’이다. 바람 혹은 호흡을 뜻하는 루아흐는 성경에서는 피조물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하나님의 영을 가리킨다”며 “그러나 성경이 증언하는 성령의 활동 영역은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다. 성경은 예언과 치유 같은 초자연적 현상뿐 아니라 죄로부터 하나님께 돌아서는 회개도 성령의 임재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제시한다”고 했다.
이어 “사실 성경의 세계관에 의하면, 창조에서 새 창조까지 성령이 관여하지 않는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성령이 하나님의 영, 여호와의 영, 지혜의 영, 그리스도의 영, 진리의 영 등의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나타나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며 “그러나 성경은 동시에 다양한 성령체험들을 관통하는 원형(原型)적인 사건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예언자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사건, 즉 엑스터시(ecstasy)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에 눈을 뜨게 되는 사건이 바로 그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4세기의 수도자 에바그리우스(Evagrius)는 교부들과 수도원 전통을 대변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만약 당신이 신학자라면 당신은 진실로 기도해야 한다. 만약 당신이 진실로 기도한다면 당신은 신학자다.’ 기도만큼 신자들이 성자의 사랑과 성부의 신비에 눈뜨도록 그들의 마음을 정화시켜 나가며, 성령을 사역을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것은 없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기독교 전통은 기도를 간구와 구분하면서 기도의 목적을 하나님과의 친교로 제시해왔다”며 “이러한 토대 위에서 교부와 수도원 전통은 기도에 능동적인 차원과 수동적인 차원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전자가 후자로 발전할 때 기도가 완성된다고 가르쳐왔다”고 했다.
이어 “이러한 맥락에서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1515~1582)는 기도를 구송기도(口誦祈禱)와 묵상(Meditation) 그리고 관상(Contemplation)으로 구분한다”며 “동방교회의 수도자 테오파네(Theophanes, 758~817) 또한 기도를 구송기도와 정신기도 그리고 마음의 기도로 구분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구송기도와 묵상 그리고 관상은 별개의 기도들이 아니라, 하나의 기도 속에 나타나는 단계들이다. 그들이 말하는 구송기도란 성경구절이나 성경에서 유래한 기도문을 읽으면서 암송하는 단계를 가리키며, 관상이란 묵상이 심화되면서 나타나는 기도의 차원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면, 그들이 말하는 기도란 ‘독서 묵상 기도 관상’의 단계를 밟아가는 성경묵상(Lectio Divina)외의 다른 것이 아님이 밝혀진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사실 기독교 영성전통에서 기도란 성경묵상을 전제한다. 수도원 전통에서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가 수도자들의 전통적인 기도방식이었다. 교파를 초월해 사랑을 받는 시편묵상은 물론이고 가톨릭 전통의 묵주기도(默珠祈禱, Rosario)와 동방교회의 예수기도(Jesus Prayer) 또한 상이한 외적형태에도 불구하고 성경묵상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며 “사실 성경은 마음이 뜨거워질 때까지 성서를 묵상하고, 고요함(hesychia)에 잠길 때까지 기도하는 성서묵상을 구원의 길로 선포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성경에는 성경묵상 혹은 말씀에서 솟아나오는 기도만 있는 것이 아니”라며 “성경에는 오히려 고난 속에서 부르짖는 기도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타자를 위해 간구하는 기도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바울은 전자를 간구로, 후자를 도고(중보기도)로 제시한다”고 했다.
정 교수는 “성경에서 간구는 결코 낮은 차원의 기도가 아니다. 그 누구보다도 예수께서 단호한 어조로 간구를 하나님의 계명으로 선포한다”며 “예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난 속에서 끈기있게 드리는 기도가 믿음의 기도, 즉 성령의 임재 속에서 드려지는 기도임을 시사한다”고 했다.
이어 “고난 속에서 간절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청하는 기도가 왜 믿음의 기도인가. 누구나 다 고난당할 때 하나님을 찾지 않는가”라며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고난당할 때 기도하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기도한다 할지라도 곧 중단되고 만다. 원인은 오직 한 가지다. 하나님을 온전히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기에 혼자 힘으로 출구를 찾다가 보이지 않으면 낙담하거나 분노하게 된다. 교부들이 강조하듯이 고난 속에서 끈기 있게 기도한다는 것은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러한 맥락에서 진정한 간구는 이미 부지불식간에 성경묵상의 열매인 하나님 기억을 전제하며, 성경묵상의 참됨은 고난의 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데서 입증된다고 말할 수 있다”며 “물론 성경은 잘못된 간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3).’ 하나님 기억 없이 드려지는 간구는 공허한 기도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중보기도는 간구의 기도에 속한다. 다만 타자를 위해 간구한다는 점에서만 여느 간구의 기도와 구분된다”며 “성경과 교부들은 중보기도를 제자들에게 주어진 계명으로 제시한다. 중보기도는 사랑과 간구를 연합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사랑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염두에 둔다면, 중보기도야말로 기도 가운데 기도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교부들은 간구의 전제가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임을 강조한다. 사실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먼저 기원한 후에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간구하라고 권면한 바 있다”며 “이러한 맥락에서 수도원 영성전통은 ‘수행(修行, praxis) 없는 기도’를 경계해왔다”고 했다.
이어 “에바그리우스는 ‘자신 안에 상처와 분노를 쌓아두고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마치 수없이 구멍 난 통에 물을 가져다가 붓는 사람들과 같다’고 했다. 정화 없는 관상, 즉 능동적 정화 없는 수동적 정화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라며 “그러나 교부들은 동시에 간구를 경시하는 영성도 경계해왔다. 기도의 열매는 겸손이기에 참된 기도는 간구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울러 “수행과 기도 그리고 간구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적인 연관성은 우리로 하여금 이들을 하나의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바라볼 것을 요청한다. 이들은 비록 형태는 다르지만 죄의 권세로부터 하나님께 돌아서는(metanoia) 하나의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기 때문”이라며 “이를 위해선 상이한 영성 전통들이 마음을 열고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열린 마음은 참된 기도의 열매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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