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선수 시절보다 신앙을 가진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는 사람이 있다. 바로 前 두산 베어스 투수 이경필 씨. 그는 선수 시절 주무기가 ‘싱커’였다고 했다. 몸 쪽으로 파고드는 변화폭이 매우 심한 구종이라고 하는데, 그래서일까? 이경필 선수는 예수님을 믿기까지 굴곡진 방황기를 거쳤다고 고백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지난 시절 야구 재능, 방황마저도 쓰셨습니다.” 이경필 씨는 현재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에 재학 중인 전도사이기도 하다. 자신이 출석하고 있는 한성교회(담임 도원욱 목사) 성도들로 대부분 구성된 사회인 야구단 ‘필코치’를 이끌며 몽골 야구 선교 등에 주력해왔다. 그의 신앙 여정이 궁금해졌다. 다음은 이경필 전도사와의 일문일답.
- 언론보도에 따르면, 1998년 13승을 기록한 후 이듬해 팔꿈치 통증이 찾아와 결국 ‘토미 존 수술’을 받으셨다. 하지만 재활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이경필 선수 스스로가 선수시절을 돌아봤을 때 아쉬웠던 점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수술 이후 100승이 목표였다. 수술 전까지는 계획대로 승수를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술 이후 기량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졌다. 재활 시스템이 지금만큼 완벽하지 않아서, 회복이 어려웠던 점도 있었다.
- 2007년 두산 베어스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으셨다. 당시 마음이 어떠셨는지?
당시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있었다. 구단의 방출 통보에 대해 굉장히 실망을 느껴 야구판을 떠나기로 했다.
- 경기장을 떠난 이후에 무엇을 하셨는지?
선수 시절 공부를 많이 했던 것도 아니었고, 사회 적응은 어려웠다. 모든 운동선수의 어려움이기도 하다. 100승 기록, FA 고액 연봉 계약, 감독 등 계획했던 삶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전혀 상상하지 못한 삶에 직면한 것이다. 그래서 삶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 받고자 박수무당을 소개받고 1년 동안 쫓아다녔다. 그런데 쫓아다닌 뒤 내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나의 궁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결단코 아니다.”
- 그럼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셨는지 궁금하다.
2014년 여름, 한성교회(담임 도원욱 목사)에 처음 가게 됐다. 지인의 권유로 갔다. 나는 당시 ‘골프 내기’ 중독 등 음주가무에 빠져 있었다. 와이프는 몸이 안 좋은 상태였다. 일본 비즈니스 과정에서 일이 잘 안 풀려 결국 공황장애가 온 것이다. 그 때 아내는 처음으로 내게 ’교회 가자’고 제안했다. 그녀는 원래는 모태신앙이었지만 20살 이후 교회 출석을 끊은 상태였다.
이 때 우리는 두 가지 기로에 놓여 있었다. 다른 무당을 계속 쫓아다닐지, 아니면 교회로 가야할지. 결국 와이프를 따라 교회에 가게 됐다. 그리고 그녀의 공황장애 치유를 놓고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드렸다. ‘와이프의 병이 낫게 되면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겠다’고 말이다. 전국 방방곡곡 축사 사역자들도 찾아다니면서 기도 요청을 했다. 하지만 아내의 병 치유에는 차도가 없었다. 2~3개월 정도 그런 상태가 지속되니까, 내 몸과 마음이 지치더라.
그 순간 나는 목사님들께 따로 기도 요청을 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내게 있는 예수 이름으로 “귀신아 떠나갈지어다”라고 선포하면 아내의 병이 낫겠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후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다면 우리에게 보여주세요. 아내의 병을 치료해주신다면 주님의 길을 쫓겠습니다”라고 서원기도를했다. 그랬더니 거짓말처럼 아내의 공황장애가 완치됐다.
- 그후 어떻게 되었나?
“야구선수였던 나를 왜 부르셨을까”라는 고민이 찾아왔었다. 그러면서 2015년 1월, 한성교회에서 몽골에 선교를 갈 기회가 있었다. 당시 앞서 말한 기도제목을 갖고 선교를 가면, 하나님이 반드시 알려주실 것이란 확신이 생겼다. 마침 교회 전도사님도 제안하셔서 야구 선교를 위한 프로그램도 짰다. 그렇게 몽골에서 어린이 100여 명에게 공짜로 야구를 가르줬는데,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이 샘솟더라.
- 현재도 계속 하고 있는 사역인가?
이후 방망이와 야구공을 들고 일본, 중국 등지로 갔다. 하나님이 그 길을 계속 열어주셨다. 복지와 장애인 센터, 중국 농아 학교 등을 찾아 갔다. 이 때 나와 아내는 동역자를 붙여주셨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이후 한성교회 청년부 총무에게 전화가 왔다. “청년들에게 야구를 가르쳐달라”는 것이었다. 그 때 우리가 해왔던 동역자를 위한 기도가 “이들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어 흔쾌히 승낙했다.
그리고 이들에게 “선교 야구단을 만들어 야구 선교를 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이들도 오케이 사인을 던졌다. 2017년 3월 ‘필코치’ 선교야구단이 창단했다. 그해 6월, 부원들을 데리고 몽골에 야구 선교를 하러 갔다. 매년마다 그곳에서 몽골인들에게 야구를 가르쳤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펜데믹으로 몽골 야구 선교는 못하고 있다.
- 야구 선교를 통해 얻은 열매가 있다면?
몽골 올림픽 조직위원장을 만났다. 이후 몽골 국가대표 감독과도 만나, 몽골 국가대표에게 직접 레슨도 해줬다. 우리 ‘필코치’ 선교 야구단과 친선경기도 함께 하기도 했다. 토요일엔 근처 교회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야구 어린이 캠프’도 개최했었다. 그러면서 감독에게 우리 팀에 대한 선교 비전도 말해줬다. 계속 감독과 친분을 쌓으면서 이후 한국 잠실 경기장으로 초청해 두산 베어스 경기도 같이 관람하고, 두산 베어스 감독과의 만남도 주선해 줬다. 지금은 친형·친동생처럼 친하게 지내고 있다. 언제는 내게 “코로나19 종식 이후 베이징 아시안 게임이 열린다면, 이경필 씨를 몽골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모시고 싶다”고 제안했다. 이것이 계기가 돼서 몽골 선교에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
- 이경필 전도사님이 스스로 프로야구 선수 시절을 돌아보신다면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사실 교만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하나님과 동급이라고 생각했었다. 하나님을 몰랐지만 세상의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했다. 고등학교에서 3관왕 석권, 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 1차 지명 등. 당시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대로 다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 얘기도 잘 안 듣고, 교만했다.
- 선수시절의 부상 때문에 아쉬움이 많이 남았을 것 같은데.
지금이 오히려 감사하다. 과거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실패, 도박, 술, 골프중독 등 세상 음주가무로 인해 오히려 신앙에 귀의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 다 하면서 살았다. 한 마디로 나는 십계명을 다 어기면서 살았다. 그럼에도 나를 살려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지금 그것들은 다 배설물이다. 그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 내 안에 있다. 남을 위해서 기도하고 봉사하는 일 등도 정말 기쁘다.
- 이경필 전도사님에게 헌신을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란 무엇인지 궁금하다.
나의 동기는 바로 중보 기도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야구 선교단을 계기로 많은 기도 동역자를 붙여주셨다. 모태신앙이었던 아내 친척들의 기도가 많은 힘이 됐다. 물과 거름을 주는 등 기도의 동역자들이 많아서 이런 헌신을 이어갈 수 있었다.
- 현재 전도사이신데, 신학공부를 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기도 중 신학공부에 대한 마음을 부어주셨다. 사실 실제로 실행하기가 어려웠다. 신학대학원 입학이 쉬운 것도 아니고. 하지만 목사님이신 나의 장모님이 ‘빨리 신대원 가자’고 재촉하셨다. 장모님도 하나님께 감동을 받아 나의 신대원 입학을 재촉하셨다고 한다. 현재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의 6학기 과정 중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다. 학업과 일을 병행하기 쉬워 이곳을 택했다.
수업을 들으면서 느낀 점은 참 재미있고 감사하다는 것이다. 놀랍기도 하다. 실은 운동선수들은 학교생활에서 3교시만 하고 운동하러 간다. 공부를 많이 하지 못했다. 그렇게 책과는 거리가 멀던 내가 신학대학원 강의실에 앉아있는 게 정말 감사하다. 신학공부는 물론 어렵다. 하지만 너무 재미있다. 신학 역사, 하나님의 섭리, 교리 등에 대해서 알아가게 돼서 참 감사하다.
- 전임 목회에 대한 생각이 있으신지?
하나님이 어떻게 내 길을 이끄실지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로선 사회인 야구리그 기도회, ‘필코치’ 선교야구단에 영적인 도움을 주고 싶다. 선교 야구단은 80% 이상이 한성교회 집사, 권사, 청년 등으로 구성됐다. 현재 ‘세상을 품은 아이들’이라는 단체를 통해 2주에 한 번씩 소년원 아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쳐주고 있다. 식사교제도 함께한다. 소년원 아이들 대부분은 가정 폭행으로 상처받은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이 야구를 통해서 스트레스를 해소 받는 것이다. 우리를 형·삼촌처럼 여기며 “언제 오냐”고 기다린다. 이들이 ‘필코치’ 선교 야구단을 생각했을 때 “교회 다니는 아저씨들이 우리에게 잘해주셨지”라고 기억해준다면 그것만으로 하나님의 선교라고 생각한다.
- 야구가 10대 아이들의 정서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요새 아이들은 개인주의가 팽배하다. 야구라는 단체운동은 서로 배려하고 같이 ‘파이팅’ 하는데 있어 동역자 정신을 교육할 수 있다. 그리고 아이들이 타격하면서 스트레스가 풀린다. 아이들에게 스트레스를 푸는 탈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선교 차원에서 야구로 아이들의 스트레스를 건전하게 풀도록 도움을 주고 싶다. 그래서 교회로 인도함 받아 신앙을 통해 삶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 선교 야구단이 교회에 도움이 되는 요인이 있다면?
사실 한성교회보다 사회인 야구리그에 플러스 되는 요인이 많을 것 같다. 이 리그에는 크리스천도 있지만 불신자들이 많다. 일단 우리 ‘필코치’ 선교 야구단 팀원들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항상 깔끔하고 예의바른 모습으로 야구한다. 직접 말로 복음을 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팀원들의 깨끗하고 예의바른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좋으심을 안 믿는 사람들에게 각인시킨다는 점에서 긍정적 요인이 될 것 같다.
- 세상적 방황에서 벗어나게 된 신앙적 경험이 있다면?
2009년 KBS 2TV 예능 프로그램인 ‘천하무적 야구단’에 출연했다. 이 때 만난 지인들과 교류하면서 골프를 많이 쳤다. 그러다 중독이 됐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난 이후로 골프채는 창고로 들어갔다. 왜냐하면 더 중요한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현재도 여전히 실수한다. 넘어질 때도 있다. 하지만 회개하고 돌이키면 받아주시는 하나님 은혜로 성화의 단계를 밟고 있다. 만일 신앙하고 있거나, 신앙을 떠난 이들이 죄를 짓고 난 이후,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이 사실을 말해주고 싶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그 자리에서 당신의 자녀들을 반겨주신다는 것을. 그래서 속히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말하고 싶다.
- 이경필 전도사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궁금하다.
예수님 없는 삶은 답이 없다. 인생 자체에 무슨 답이 있는가? 혹자는 “돈을 많이 벌고, 내가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사는데 무슨 소리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죽은 이후 어디로 가야하는지” 등의 답을 누가 줄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삶이 과연 정답일까? 정답은 예수님 밖에 없다. 예수님 이외에 답이 없다.
- 신앙을 가진 지금, 선수시절보다 행복한가?
훨씬 행복하다. 과거의 선수 시절은 이미 지났다. 내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는 현재다. 선수 시절은 한 마디로 잘 못했으니까 잘린 것이다. 쿨하게 생각하려고 한다. 그 땐 감사가 없었고 교만했다. 내가 잘 던지면 “내가 잘 하니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 그럼에도 선수시절 최고의 순간, 그리고 주무기를 뽑자면?
선수 시절 최고의 순간을 뽑자면 2001년 두산 베어스 우승 때다. 그리고 두산 베어스 입단 때, 1차 지명으로 선발된 것. 나의 주무기는 싱커였다. 몸 쪽으로 파고드는 구종이다. 그 만큼 공의 변화폭이 심하다. 그래서 내 삶의 변화가 심한 건지 모르겠다(웃음). 현재 삶도 그렇다. 몇 달에 한 번씩 바뀌는 것 같다. 현재는 코로나19 마스크에 붙이는 항균 패치 등을 파는 유통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박람회에도 출품했다.
- 이경필 선수에게 인생 구절이 있다면?
욥기 23장 10절(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이다. 내가 하나님께 훈련 받아서 정금같이 순도 100%로 쓰임 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아직은 금이 아닐 수 있고, 어쩌면 쇠일 수 있다(웃음). 순도 100% 정금 같은 내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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