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라스와 이탈리아의 에트루리아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지난 2020년 봄 자녀의 친구들이 유럽에서 서울을 방문하여 보름 가까이 필자의 집에 머무른 적이 있다. 마침 이탈리아 출신이 있어 필자는 궁금증을 풀 기회라 여겨 에트루리아의 기원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반응이 놀라웠다. 동방 작은 나라 무명의 목사가 어떻게 자신도 잘 모르는 에트루리아를 알고 있느냐는 표정이었다. 마치 유럽인이 우리 한국인에게 고조선 기원에 대해 질문했을 때 부딪히는 것과 유사한 심정이었을까?
이탈리아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민족은 에트루리아다. 에트루리아 문명은 로마 공화정 이전 이탈리아에 존재했던 주요 문명이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주전 10세기 경 이탈리아 반도에 등장한 이래 주전 7세기경 문화의 융성기를 이루었다. 문화의 융성을 이끌어냈다고 이들이 이탈리아 최초의 사람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탈리아에는 이미 다양한 종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리스어로 에트루리아는 티레노이(Tyrrhenoi) 또는 티르세노이(Tyrsenoi)라 불러 “티라스”(Tiras)의 후예임을 암시하고 있다. 라틴어 문헌에는 티레니아(Tyrrhenia)로 표기되는 에트루리아(Etruria)는 이탈리아 중부에 있던 옛 나라로 그 영토는 지금의 피렌체를 중심으로 한 토스카나(Tuscany) 주, 남쪽 로마를 중심으로 한 라치오 주, 한때 우리 한국의 유명 축구 선수 안정환이 속해 있던 페루자를 중심으로 한 내륙의 중심 움브리아 주가 이에 해당한다. 그래서 창조과학의 원조 헨리 모리스(H. M. Morris)도 이탈리아의 에트루리아(Etruscans)가 디라스(Tiras)의 후예들이라 했다.
에트루리아인이 어디서 기원했는지는 고대부터 논쟁의 대상이었다.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주전 484?-425?)는 최초의 에트루리아인들이 기근을 피해 서쪽으로 항해해 온 소아시아의 서해안에서 온 리디아인이라 했다(역사 제1권 94). 반면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는 에트루리아인들이 이탈리아 본토 사람이었다고 주장한다(고대 로마사 1권 25~30장). 둘 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한국인들도 당연히 한국 본토 사람들이 주류다. 그러나 과거 그들 한반도인들도 분명 어디서 왔을 것 아닌가. 결국은 이탈리아인들도 과거 언젠가 어디로부터인지 이탈리아 반도에 도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경로가 스페인이나 영국이라 하는 사람들은 없다. 그렇다면 고대 이탈리아로 들어온 도래인(渡來人)들의 출발지는 결국 지금의 북쪽 프랑스·독일·스위스 방향과 바다가 남는다. 두 방면에서 모두 왔을 것이다. 하지만 반도 북쪽에는 알프스 산맥이 반도 접근을 가로막고 있다. 지금도 프랑스·스위스에서 이탈리아 반도로 접근하려면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4807m)이 위치한 샤모니(프랑스 지역, 최초 동계 올림픽이 열렸던 소도시)에서 긴 산악 터널을 지나 이탈리아의 산악도시 꾸르마이어(Courmayeur, 고도 1224m)와 산중 고대 도시 아오스타(Aosta)를 거쳐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와 토리노에 이르게 된다. 독일에서의 접근도 험난하기는 마찬가지다. 따라서 지정학적 위치로 보아 이탈리아인의 주류는 문명이 먼저 일어난 헬라, 에게 해 등 해양을 건너온 사람들이 정착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즉 지금의 이탈리아인들의 주류는 바다를 건너왔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야벳의 자녀들 가운데 야완과 디라스가 주목된다. 야완과 디라스 후손을 제외하고 바다로 역동적으로 진출한 야벳 후손들은 눈에 띠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야완은 주로 헬라를 이루었으므로 야벳의 막내 디라스가 결국 고대 이탈리아 서중부 일대를 중심으로 에트루리아를 이루었고 그보다 먼저 또는 후발 주자로 이탈리아로 들어온 도래인들과 함께 이탈리아 민족을 이루었을 것이다. 로마인들은 이들을 투스키 또는 에트루스키라고 불렀는데 ‘에트루스’는 ‘티라스’의 변형으로 여겨진다.
1세기 역사가 리비우스는 에트루리아는 세력이 매우 강하여 그 이름을 땅과 바다에 가득 채웠다고 했다. 고대, 세력이 강하다는 것은 문명이 발달한 세력이라는 의미다. 먼저 로마 알파벳의 기원이 에트루리아인의 작품이었다. 에트루리아 인들은 그리스 문자를 기초로 독자적 언어 체계를 유지하였다. 현재 에트루리아어로 된 명문(銘文)은 1만점이상 발견되었고 지속적으로 발굴되고 있다. 이를 보면 에트루리아어가 분명 그리스문자의 변종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뜻이 확실하게 해독(解讀) 되지 않아 학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그 기원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어를 차용한 에트루리아의 독자적 문자 체계는 기원전 600년 로마 알파벳(라틴어)의 기원이 되었다는 점이다. 즉 오늘날 세계인의 언어가 된 영어의 어휘나 체계의 기초인 라틴어는 에트루리아인들의 말에서 기초한 것이었다.
반도의 토템 문화와 종교
우리 한민족의 토템은 곰과 호랑이와 거북, 닭 등인 반면 이들의 토템은 늑대였다. 이것이 “로마”(늑대 젖을 먹고 큰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라는 언어의 원형이었다. 로물루스는 동생을 죽이고 로마 최초의 왕이 된다. “토템”은 단순한 허구나 신화가 아니다. 토템 안에는 비신화화가 필요한 고대 문화의 은유가 담겨있다. 같은 반도 국가임에도 단군 토템 신화보다 이탈리아 토템은 좀 더 거칠고 야생적이며 잔인하다. 로마는 결국 지중해를 중심으로 오랫동안 세계를 지배했고 지금도 그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하다.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 축구국가대표팀이 왜 홈경기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탈리아 선수들에게 거칠게 당하고 선혈이 낭자했었는지 알 것도 같다. 검투사의 치열함을 보라! 우리가 고대 서양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보는 검투사 문화도 에트루리아의 잔재였다.
종교적으로 로마 다신교 신전의 원조도 에트루리아인이었다. 그리스 신화 올림푸스신들의 이야기는 에트루리아인들에 의해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와 제우스가 주피터로 바뀌면서 로마화 되었다. 이렇게 에트루리아인들은 바다를 통해 들어와 헬라 등 해양 민족들의 문화를 반도에 전파하였다.
화려함 속에 감추어진 중금속 오염의 비극
기원전 5-7세기 유명한 흑도자기 부케로(Buchero)의 주인도 이들이었다. 흑도자기의 검정색은 점점 더 화려한 색깔로 바뀌어 갔다. 이들 도자기들은 귀족들만 사용할 수 있는 값 비싼 도자기였다. 문제는 화려한 색깔의 도자기들에는 중금속 적납(赤鑞)이 함유되어 있다는 점이다. 고대 로마 평민들이 아닌 귀족들 자녀에게서 다수의 지진아가 발생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귀족의 자녀들이 우수한 재질을 갖추어야 사회가 견고하고 지속 가능한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 중금속에 대한 무지(無知)는 에트루리아 멸망의 원인 가운데 하나를 제공했을 것이다.
에트루리아인들은 이탈리아 중부 티베르 강 하류에 정착하는 데, 공교롭게도 이곳은 라틴인들이 세운 여러 소도시 가운데 하나인 로마가 위치한 곳이었다. 이곳에 정착한 결과 반도의 문화 전파자 역할을 제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에트루리아는 종말을 가져오게 된다. 로마인들이 에트루리아의 마지막 왕을 추방한 것은 주전 6세기(509년)이었다. 그리고 주전 1세기 초 에트루리아 족은 로마에 완전 병합되면서 공식적으로 그 역사의 막을 내린다.
그런데 중금속 참사는 로마에까지 이어진다. 로마 귀족들 자녀 가운데도 지진아가 많았다. 한때 지중해 세계를 제패한 로마는 상수도 시설까지 납관(鑞管)을 사용할 정도였다. 다수의 귀족 자녀들이 지진아가 되었다는 것은 대 로마 제국의 쇠락을 재촉하는 원인이 되었고 이 모두는 납 용출로 인한 참사였다.
당대 최고 의사들의 관리를 받던 진시황이나 당 태종, 김일성 같은 독재자들의 급사원인도 모두 아이러니컬하게도 건강과 장수를 위한 산해진미와 보양식이나 환약과 같은 비약이 그 원인 중 하나다. 보양식과 보약 좋아하지 않는 동양 호걸들이 있었던가? 이것들을 즐기다 비만과 운동부족과 영양과잉 그리고 알 수 없는 중금속에 의한 중독이 영향을 주었을 거라는 게 환경학자들이 보는 정설이다. 생화학과 환경독성학을 배운 필자도 여기에 동의한다. 진귀한 보양식이 오히려 화근을 자초한 것이다.
일종의 승자(독재자)에 임한 승자 독식의 저주(?)였다. 코로나19를 보면 여전히 인간은 나약하고 환경의 역습 앞에 무지한 측면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박쥐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단순한 창조주 하나님의 레위기 율례 계시에 대한 무지와 무시가 코비드(코로나19)를 초래했다는 점에서 필자는 오늘날의 속칭 “21세기 대 로마 제국들”도 성경적 교훈과 겸손을 배우기를 기도한다.
에트루리아인들은 도시 건설 방법과 배수·관개 기술을 로마에 전했으며 아치를 발명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오늘날 모든 아치형 건축물의 원조는 에트루리아인들이 원조였던 셈이다.
명품 교회·명품 축제 자랑하지 말라(?)
개선(문) 행렬과 현란한 대축제(카니발)도 에트루리아의 잔재였다. 에트루리아인의 이런 세속적 축제와 관람 문화는 전 유럽과 전 대륙으로 퍼져나갔다.
오늘날 이런 이상한 문화가 교회까지 파고들어와 “명품 교회의 명품 대축제”와 같은 세속화 된 말이 대형 교회에까지 난무하는 시대가 되었다. 오늘날 툭하면 교회나 기독 단체들이 “축제(카니발)”라는 말을 남발하는 것은 대단히 비성경적이요 무지의 소치다. 마치 가난하고 미약한 교회는 거창하고 즐거운 축제도 하지 못하는 뒤떨어지고 고상치 못한 교회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코로나19는 이 같은 행태를 한방에 무너뜨려버렸다. 이제는 축제(카니발)라는 부끄러운 말을 교회는 시급히 버려야 할 것이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예수께 한 것이라(마 25:40)! 예수님은 아마 “명품교회” 자랑하고 “명품 축제”를 남발하는 고상하고(?) 거창한 귀족 교회가 아닌 낮고 천한 말구유 같은 교회에 찾아오실 것이다. 굳이 이런 단어를 쓰고 싶다면 유사한 말로 “잔치”가 더 한국적이고 성경적으로도 어울린다. 본질적으로 교회는 카니발교회가 아닌 겸손한 구유 교회가 되어야 한다.
결국 에트루리아는 그리스 문화와 로마 문명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중요한 유럽 민족이 되었다. 그리고 라틴인, 그리스인, 카르타고인들과 더불어 오늘날의 이탈리아를 이루었으며 언어를 비롯하여 자신들의 앞선 모든 문화유산을 로마에 전달한 이탈리아 반도의 선 문명족이었다.
디라스 후손들의 미래
디라스 후손들은 이렇게 발칸과 에게해와 이탈리아로 진출하여 유럽 주요 민족이 되었다. 성경은 이들 디라스 후손들의 미래 행로에 대해서는 뚜렷한 언급이 없다. 다만 오늘날 디라스 후손이 중심이 된 이탈리아는 한때 세속 문명과 세속 교회의 중심이 되었고 지금은 로마 가톨릭의 총 본산 바티칸(교황청)이 자리한 세계 종교의 중심이 되어 있다.
장막이 창대해 질 거라는 아들 야벳을 향한 노아의 메시지를 기억했기 때문일까? 야벳의 막내 디라스의 후손들은 이렇게 오늘날까지 세상 문명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다만 오늘날 그 문화는 너무 자연 종교적이요 인간중심이 되어있다.
반도의 우리 민족이 예전부터 종교성이 강한 것처럼 반도의 에트루리아인들도 변질된 신앙의 잡신문화가 발달된 민족이었다. 1세기의 한 역사가는 에트루리아인들에 대해 “다른 어떤 민족보다도 종교 관습에 열심인 민족”이라 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다신 숭배의 사회였는데, 삼위일체 신을 좋아하여 삼위일체 신을 모시는 삼중 신전 즉 방이 세 개인 신전을 건축하기도 했다. 이것은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아니었다. 3은 그들이 생각하는 가장 완벽한 숫자였기에 이런 다신교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었다. 단군 신앙에도 이와 유사한 신관이 일부 남아있다. 물론 이것도 기독교의 삼위일체가 아니다.
또한 에트루리아인들은 내세를 믿었다.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은 그들은 죽어 새로운 세상으로 가서 자신이 거느린 종들과 함께 산다고 믿었다. 그들이 매장문화가 발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실제 그들의 지도자급으로 추정되는 무덤에서는 상당한 부장품들과 순장으로 함께 강제로 매몰된 시종들이 발굴되었다. 순장은 고대 동서양에 걸친 인간 중심 문화의 절정이었다. 인간중심 문화의 본산 로마에도 당연히 순장 풍습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한반도의 고조선과 신라와 가야도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오늘날 로마가 세계 종교의 중심지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내륙으로 들어간 디라스의 후손들인 구 유고 연방 국가들도 민족 간 종교적 갈등이 심각한 것을 보면 디라스의 후손들이 유난히 종교성이 강한 것은 틀림없다고 여겨진다.
어찌 되었든 디라스의 후예들도 다른 야벳 후손들처럼 성경 예언대로 “야벳의 장막을 창대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있게 되었다.
하지만 디라스 후손들이 단지 세속적 문명과 세속적 종교의 번영에 여전히 그대로 머물 것인지? 그것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즉 앞으로의 디라스 후손들의 미래도 야벳 후손 전체인 유럽의 상황과 무관치 않으며 유럽의 다른 민족과 관련하여 생각해야 될 듯하다.
하나님은 공평하시다. 어느 민족이든 하나님은 그 열국(列國)의 모습 그대로 영광 받으신다(겔 39:7, 21). 야벳은 야벳대로 셈은 셈대로 함은 함대로 영광 받으신다. 마치 부모가 되어보면 자녀가 모두 귀한 것과 같다. 세속적으로 창대해진 디라스의 후손들이 세속의 모습에 머물지 않고, 미래에도 창조의 주가 되시고 구속의 주가 되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그리스도의 참 복음 안에 함께하는 복을 누리기를 소망한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평택대 <과학과 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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