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서울현충원의 경찰관 묘역
    [안보칼럼㉑] 경찰관이 된 독립투사
    우리나라 국립묘지에는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경찰관 묘역이 있다. 경찰청은 우리나라 경찰의 역사를 임시 정부에서 찾고 있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장정 제14조의 규정에 의하여 경무국이 설치되었고 1923년 임정 산하 치안 조직으로 의경대가 창설되었..
  • 왼쪽부터 대한민국 공군의 시작을 이끈 안창호, 공군 창설에 기여한 최용덕 장군
    [안보칼럼⑳]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한 공군의 영웅들
    대한민국 공군의 시작은 일제 강점기(1920) 시대 비행기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민족지도자 도산 안창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독립을 위해서 비행기 구입에 애쓴 흔적이 여러 곳에 나타난다. 비행기를 사용하여 국내 민심을 격발하고 장래 일본에 대폭발을..
  • 국립 서울현충원 장군 제2묘역 6기 중 해군 창설자인 손원일 제독, 부인 홍은혜 여사 합장묘
    온 가족이 해군 건설에 힘 다한 손원일 제독 등 해군의 영웅들
    국립 서울현충원 제2장군묘역에는 해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손원일 제독의 부부합장묘가 있다. 손 제독은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낸 손정도 목사의 장남이다. 손원일 제독은 상해 중앙대학 항해과를 졸업하고 중국 해군의 국비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3년간 독일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중국에서 해운업에 종사하다가 광복 후 귀국하자마자 진해고등해원 양성소 출신 정긍모, 김영철, 한갑수 등과 결..
  • 국가유공자 제2묘역에 있는 김홍일 장군의 묘
    [안보칼럼⑱] 국군이 된 독립유공자(2)
    서울 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는 육군소장 애국지사 권준, 육군중장 애국지사 이준식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권준 장군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의열단을 조직했다. 황포군관학교를 수료하고 중국군에 있다가 임시정부 내무차장을 맡았다. 광복 후 49년 육군 대령으로 초대 수도경비사령관, 제50보병 사단장을 지냈다..
  • 국립현충원 국가유공자 제2묘역에 안장된 이범석 외무부장관의 묘역
    [안보칼럼⑰] 국군이 된 독립유공자(1)
    8월은 광복과 대한민국의 건국이 있는 달이다. 국가유공자 제1묘역(40위)과 장군 제1묘역(288위)에서는 광복에 이어 자유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자유 민주주의 수호에 초석이 된 분들을 만날 수 있다. 장군묘역(1, 2, 3)에는 총 355위가 안장되어 있다. 대부분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여했고 두 전쟁 모두 참전한 분들도 있다. 사실 광복군에서 활동한 분들의 대한민국 건국군 참여가 결..
  • 재일학도의용군 전몰용사 위령비와 제16묘역
    [안보칼럼⑮] 국가보훈과 국립묘지(9)
    국립묘지는 부채 의식을 확인하는 장소이다. 보답의 의미를 새기며 걸어야 할 곳이다. 보답의 본질은 기억이다. 국립묘지는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인 동시에 과거와 미래 세대를 이어주는 곳이다. 현충탑과 위패 봉안관 뒤편에는 재일학도..
  • 1950년 11월 장진호전투에서 미 해병 제1사단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미군들은 100일 전 다부동의 영상 35도의 더위 속에서 싸우다가 영하 35도의 추위와 싸워야 했다.
    [안보칼럼⑭] 국가보훈과 국립묘지(8)
    장진호 전투는 스탈린 그라드 전투, 모스크바 전투와 함께 세계 3대 동계전투의 하나로 불린다. 동상 사상자가 전체의 40~60%를 차지할 정도로 혹독한 추위와의 전쟁이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미 해병 제1사단은 올리버 스미스 장군의 탁월한 지휘로 중공군의 압도적 공세를 뚫고 흥남 부두로 이동하는데 성공했다..
  • 서울 국립현충원 장군1묘역
    [안보칼럼⑬] 국가보훈과 국립묘지(7)
    장군 제1묘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오르면 현충탑과 잔디광장과 한강, 그리고 멀리 남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포토맥강을 가운데 두고 워싱턴DC와 마주하고 있는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와 입지가 비슷하다고 한다. 강 건너 저편을 바라보며 언덕 위에 누워있는 이들은..
  • 배위 합장은 나라를 위해 세상을 떠난 남편들의 부인이 함께 안장된 곳이다.
    [안보칼럼⑫] 국가보훈과 국립묘지(6)
    국립 묘역을 지나다 보면 배위 합장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꽤나 있다. 무심코 지나치기 쉽지만 미망인들의 오랜 한숨과 진한 아픔이 서려 있다. 비석의 뒷면이 중요하다. 1950년 남편을 나라에 바치고 최근에 세상을 떠나 함께 묻힌 분도 있다. 스무 살 전후에 홀로되어 70여 년을 외롭고 고단한 삶을 살았다.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때는 사라지는 나라를 목숨으로 찾는 것을 당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