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제8차 노동당대회 이후 한국 정부의 대북 인식과 접근법에 대한 미 전문가들의 우려가 더욱 커지고 있다고 미국의소리(VOA)가 보도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직접 각종 첨단무기 개발 현황을 과시하며 핵무력 강화를 선언했는데도, 북한의 의도를 직시하지 않은 채 어떤 도발적 성명이나 위협도 ‘대화 신호’로 오판하고 있다는 게 비판의 핵심이다.
VOA는 "30년 동안 북한 핵 문제와 씨름해 온 미 조야에 북한 지도자의 ‘평화와 비핵화 의지’를 믿거나 주장하는 인사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밝히고, "1, 2차 핵위기를 거치며 협상을 통한 ‘단계적 접근법’으로 북 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협상의 주역들과 워싱턴의 ‘대화파’ 전문가들조차 북한의 비핵화 의도에 대해선 진작부터 선을 긋고 비관적 입장으로 돌아선 지 오래"라고 전했다.
빌 클린턴 정부 때 대북조정관을 지내며 소위 ‘협상파’로 분류되던 웬디 셔먼 국무부 부장관 지명자가 대표적으로, 그는 이미 6~7년 전부터 비핵화 협상의 비현실성을 주장하며 북한 정권의 붕괴를 위협하는 제재 압박을 공개적으로 주장해 왔다.
때문에 VOA는 “김정은 위원장이 비핵화에 대한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 발언은 그래서 더더욱 워싱턴에서 문 대통령의 대북 인식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했다. 집권 5년 차에 들어서도 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를 낙관하면서 답방과 추가 회동 등을 거론하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제안이자 심각한 오판이라는 부정적 평가로 모아진다는 것이다.
에반스 리비어 전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수석 부차관보는 VOA에 “김정은의 최근 8차 당대회 발언을 읽으면서 ‘분명한 비핵화 의지’로 읽힐 만한 신호를 도무지 발견할 수 없었다”고 밝히고, “오히려 김정은의 당대회 연설은 핵무기를 계속 보유하고 핵무기 역량을 강화하며 완전한 핵 보유국 자격으로 미국을 대하겠다는 북한의 결의를 보여주는 그 어느 때보다도 명백한 신호였다”고 진단했다.
특히 VOA는 "문 대통령의 임기가 4년이 지나 1년여 남은 시기에 접어들면서 그동안 동맹국 정상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을 자제하던 워싱턴의 전문가들도 문 대통령을 직접 거론하며 상황 오판과 대북 정책 실패에 대한 책임을 돌리고 있다"고 전했다.
랠프 코사 태평양포럼 명예회장은 ‘김정은이 평화나 비핵화에 대한 의지가 분명히 있다’는 발언과 관련해 “문 대통령이 얼마나 순진한지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다”고 말하고, “북한은 (당대회를 통해) 핵무기라는 보검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고, 심지어 핵무기에 대한 말이라도 꺼내려면 첫 번째 조치로 주한미군부터 철수하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어 “지금쯤은 문 대통령이 그 정도는 알아야 하지만, 그의 유산을 통일의 진전과 너무 강하게 결부시키는 바람에 북한에 쉽게 이용된다”고 비판했다.
로버트 매닝 애틀랜틱카운슬 선임연구원은 “문재인 대통령이 모든 가용 정보와 반대로 김정은이 비핵화 의지가 있다고 생각한다니 나로서는 몹시 놀랍다”고 말하고, “김정은의 8차 당대회 발언은 분명하고도 확실했으며, 핵무기를 북한 안보에 필수적인 것으로 보고 2차 보복 공격 능력을 확보하고자 새 미사일과 운반 시스템, 핵무기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북한 당국과 오랜 협상 경험이 있는 미 전직 관리들과 북한을 탈출한 전 고위 인사들은 북한의 성명과 도발 등 모든 행동에서 ‘숨은 메시지’를 찾으려 하는 미국과 한국 일각의 시도를 경계해 왔다. 북한은 계획대로 무기 개발과 시험을 하고 군사력을 과시하며 미국 등에 알릴 일이 있으면 공식·비공식 연락 채널을 통해 직접 전달해 왔지, 특이한 움직임에 메시지를 숨겨 간접적으로 흘리는 복잡한 방법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리비어 전 수석 부차관보는 “김정은의 의도를 알고자 한다면 그의 말을 그대로 들으면 될 뿐”이라며 “그의 말속 어디에도 비핵화 의사는 들어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노동당 39호실 고위 관리를 지낸 리정호 씨는 21일 VOA와의 전화 통화에서 북한에 대한 정보와 이해가 부족한 미국 조야는 전략 부재에서 비롯된 북한의 단순한 행동을 지나치게 복잡하게 분석해 비현실적인 해법을 내놓곤 한다고 지적했다.
북한 대흥총국 선박무역회사 사장과 금강경제개발총회사 이사장, 중국 다롄주재 대흥총회사 지사장을 지낸 리 씨는 “북한은 협상하려면 협상하겠다고 직접 제안하지 3차원적으로 복잡한 메시지를 전하지 않는다. 북한의 행동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SLBM과 같은 첨단 무기를 만들어 보여주면 위험이 닥쳐오고 있다고 인식하면 되는데, 왜 자꾸 협상의 여지를 보여줬다고 분석하는지 모르겠다. 북한의 전략과 대외 정책 결정 구조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잘못된 해석이다”라고 했다.
그는 “대화 신호 운운하면서 자꾸 김정은의 숨은 메시지를 발견하려는 시도는 문제의 본질을 흐려 올바른 대응과 거시적 정책을 만들지 못하게 막는다”고 말하고, “북한이 노동당 8차 대회에서 미국을 최대의 주적이라고 하고 최신식 무기를 선보이면서 앞으로 핵 개발 추진 계획을 밝힌 것은 미국은 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적이라는 뜻으로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북한이 강하게 나오는 것을 계속 협상 신호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발상이고, 거기에 맞는 대책도 세울 수 없게 만든다”고 했다.
아울러 북한의 비핵화 약속은 이미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공식 합의의 핵심인데, 시계를 거꾸로 돌려 같은 약속을 하게 될 협상에 무게를 둔 문 대통령의 제안은 모든 것을 초기화할 위험이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브루스 베넷 랜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문재인 대통령이 사실을 잊고 있다”며 “김정은과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4월 발표한 판문점 선언 1조1항에서 앞서 채택된 남북 선언들과 모든 합의들을 철저히 이행하기로 약속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여기에는 남과 북이 핵무기의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치, 사용을 하지 않고, 핵 에너지를 오직 평화적 목적에만 이용하며, 핵 재처리 시설과 우라늄 농축시설을 보유하지 않기로 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포함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은 북한 정권의 핵무기 프로그램 해체 약속으로 북한이 핵무기나 핵무기 생산 역량을 갖지 못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면서 “김일성과 김정일에 이어 김정은도 이 선언을 위반했는데, 특히 김정은은 그렇게 함으로써 판문점 선언까지 위반했다”고 비판했다. 이어 “실제로는 세 명 모두 핵무기 프로그램을 중단하거나 축소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핵무기 생산 역량과 재고를 확대했다”고 덧붙였다.
베넷 연구원은 “김정은이 이미 비핵화 약속을 한 만큼,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를 협상할 필요가 없다”며 “문재인 대통령은 왜 이런 사실을 말하지 않고, 기존 약속을 이행하라고 북한에 요구하지 않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김정은은 판문점 선언에서 약속한 대로 무기 프로그램을 해체할 시간이 3년 가까이 있었지만, 오히려 이를 증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심지어 김정은이 대화와 협상을 원한다 해도 이는 문 대통령이 거듭 주장해 온 ‘비핵화 대화’가 아니라 북한을 핵 강국이자 동등한 군축 회의 상대로 간주하고 마주 앉아 달라는 요구라고 지적했다.
데이비드 맥스웰 민주주의수호재단(FDD) 선임연구원은 “이미 헌법에 핵 보유를 밝힌 북한은 냉전 당시 ‘전략무기제한협상’과 ‘전략무기감축협상’을 이끌었던 미-소 관계와 같은 동등한 입장에서 미국과 협상하기 원한다”고 설명하고, “그런 협상을 시작하면 북한은 미국의 핵무기 감축을 요구할 것이고, 이는 미국이 수용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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