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칭의를 ‘행위에서 믿음으로의 전환’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더러 있어요. 구원 받기 위해서는 믿음을 준비해야 하는데, 중세 교회가 엉뚱하게 행위를 준비했다는 거예요. 그걸 종교개혁이 바로 잡아주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쉬워요. 특히 행위와 믿음 앞에 ‘나의’라는 수식어를 붙인다면 아쉬워요. 그래서 이신칭의를 나의 행위에서 나의 믿음으로의 전환으로 읽는다면 정말 아쉬워요.
믿음은 주님을 바라보는 겁니다. 내가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오직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 그게 믿음입니다. 그게 행위든 믿음이든, 눈을 나에게 고정시키려 한다면, 진정한 믿음이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믿음은 나에게 실망하는 겁니다. 오직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를 내려놓고, 오직 주님을 바라보는 것, 이게 믿음입니다.
이 책은 왜 예배와 말씀 읽기와 찬양과 기도가 유일한 답이며, 결국 주께 순복하고 굴종하는 게 가장 지혜로운 길인지를 ‘교회 안 교회 언어’가 아닌, ‘교회 밖 일상 언어’로 설명한다. 설교권을 갖는 목회자의 신분이 아닌 한 성도로서의 이러저러한 이야기다. 책 제목이 설교나 강해가 아닌 ‘참견’인 이유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는 지식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우둔한 어둠에서 벗어나야만 얻을 수 있다. 내가 이해해서 신앙이 단단해지기보다 하나님께서 이해시켜주시는 은혜로 인해 믿음이 단단해진다. 또한 머리로 이해된 것으로만 끝나면 죽은 신앙이다. 온전한 지성은 실천으로 귀결된다.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의 본질적 차이는 ‘실천’이다(마 7:25).
P. 20 하나님께 붙들려 있을 때, 삶의 강한 바람을 버티고, 더 높이 날아오를 수 있다. 가만히 안 놔주셔서 가만히 안 둬주셔서 진득하게 기다려주셔서 찐득하게 질척여주셔서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른다. 하나님께 매임이 그 어떤 놓임보다 자유하다.
P. 35 늘 두 가지를 동시에 던지신다. 한 손으로 연단을 던지시지만 다른 손으로 그것을 이길 은혜를 주신다. 바다에 빠지지 않으면 산에 오르지 않으면 양손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연단을 뒤쫓고 있다.
P. 42~43 아무리 기도하고 아무리 믿음생활을 해도 똑같은 문제가 반복되는 이유는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 가득해지기 전까지 삶의 갈급함과 허기짐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답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가장 온전한 기도는 하나님을 구하는 기도다. 그 기도가 우리를 완전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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