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밖에 있는 이들은 세상에서 보이는 것만 느끼고 체험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자연과 자신의 삶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체험합니다. 또한 믿음의 사람은 환경에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이 실패를 성공으로, 사망을 생명으로 바꾸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향하여 같은 말을 하면서도 수고스럽게 생각지 아니하고 성도들의 안전을 생각했습니다. 개들과 행악자들, 몸을 상하게 하는 자들과는 함께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일까요? 사람을 잘못 사귀면 시험에 들고 이단을 만나면 불행해지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힘으로 봉사하며, 모든 일을 원망과 불평이 없이 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자랑할 것이 있으면 행복해집니다. 당시에도 육체를 신뢰하고 자신이 가진 것들을 자랑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자랑거리는 세월에 따라, 그리고 가치관에 따라 변합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외적인 것들을 자랑했습니다.
1. 자신의 가치를 진정으로 높여라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빌3:4)
‘육체를 신뢰할 만하다’는 말은 남과 비교해 우수한 자랑거리를 가졌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믿지 않는 자들이 자랑하는 것을 다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빌3:5)
바울은 출생 때부터 언약에 참여한 자였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하나님의 선민(選民)으로 아브라함의 대를 잇는 복된 혈통이라는 뜻입니다.
‘베냐민 지파’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갈라질 때 예루살렘 중심으로 세워진 남유다에 속하여 혈통적으로나 율법적으로 아브라함 후손의 순수성을 계승했다는 자부심이 들어간 표현입니다.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히브리말을 사용하고, 히브리 고유전통을 지키는 ‘보수주의자’라는 뜻으로 풍조에 동요되지 않고 세속화되지 않은 순수한 히브리인이었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이라는 것은 행실로도 모범이 되며 죽은 자의 부활과 천사의 존재도 믿는 교리적으로도 정통파에 속하였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그는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 믿는 제자들을 핍박하고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할 때 그 죽음이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사울이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행8:1)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행8:3)
이처럼 바울은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들이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지금도 가문, 조상, 혈통, 교파, 교단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자신의 가치를 높인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높일 때 우리도 높아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종교인은 바울 때뿐 아니라 지금도 보수, 진보, 전통 등을 따지면서 우월의식에 빠져 헛된 것을 자랑하며 교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2. 그리스도를 위하여 버려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빌3:7)
사도 바울은 전에 유익했던 것들이 예수님 만난 후에는 달라졌다고 했습니다. 바울 뿐 아니라 우리들도 이런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외적인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깨달아집니다. 인생을 보는 시각도 변합니다. 물질의 부요 이상으로 마음의 부요를 선택합니다. 육체에 대한 신뢰는 그리스도를 알고 따르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3:8)
‘가장’이라는 말은 ‘최고’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생각과 삶의 최고의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17:3)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습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함이 예수 안에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지식이 그리스도를 발견하는데 도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후에는 그 모든 것을 뱃속에서 음식물이 소화된 다음에 필요 없이 배설되는 것과 같은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세상의 학문과 명예, 철학 등을 인정하였지만 참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후에는 미련 없이 버렸습니다. 화장실에 갔다가 배설물에 미련이 있어 돌아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세상의 것에 미련을 두지 않았습니다.
3. 예수의 죽으심을 본받으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빌3:8-9)
버림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를 소유하기 위함입니다. 과일도 알맹이가 익을 때까지는 껍질이 필요합니다. 알맹이가 다 익으면 껍질은 필요치 않습니다. 과일은 맛이 자랑인 것처럼 예수님의 생명을 깨닫게 되면 예수님 자체가 능력이요 생명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알면 육체로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임한 믿음만이 아름답고 소중한 것입니다. 이제는 세상의 복을 받는 것 이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더욱 행복하게 느껴집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3:10-11)
우리는 가장 귀한 것을 가졌으니 행복해 하고 만족합시다. 감사하고 찬양합시다. 그 기쁨을 위해 고난도 달게 받고 삽시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큰 권능에도 동참하기를 소원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면서 걷지 못한 자를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곧 우리의 능력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행3:6-8)
능력에 참여할 뿐 아니라 고난에도 참여해야 합니다. 고난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오는 고난, 세상의 풍습과 어둠의 세력을 거스름으로 받게 되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한 고난입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1:24)
그리스도의 최고의 고난은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는 부활로 가는 길이요, 사망의 권세를 순종과 죽음으로 이긴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겉으로는 예수님이 죽으신 곳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마귀와 사망이 죽고, 예수님이 승리하신 곳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당하는 고난은 행복해지고 영적 건강을 지키며 영원한 누림과 영광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지식임을 알고 주님만을 섬기며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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