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신이었던 삭개오가 예수를 보기 위해서는 많은 인파를 뚫고 들어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버거웠고, 삭개오를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유대인들이 손가락질하는 직업을 가진 탓이다. 식민지 백성들이 제 땅에서 유배당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세리장이었던 삭개오는 그런 사람들에게마저 유배당한 사람이었다. 이중으로 유배당한 삭개오는 예수를 보고 싶은 간절한 갈망으로 예수가 지나가는 길 근처의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간다.
성경 시대의 돌무화과나무는 사람을 배치해 돌볼 정도로(대상 27:28) 귀한 나무였다. 궁전과 성전 내부 장식을 하는 향백나무에 비해 가벼워 목재로 많이 사용되었다. 고대에는 열매도 많이 먹었다고 한다. 모양이나 맛이 무화과와 비슷하나 크기가 작고 당도가 낮아 돌무화과라 불렸다. 그리고 열매가 익기 전에 일일이 구멍을 내주지 않으면 열매들이 떨어져 관리가 어려웠다. 돌무화과나무는 10~13m 정도로 크게 자라는 나무였지만, 나무밑에 쪽에서부터 가지가 나 있어서 키 작은 사람들도 쉽게 올라갈 수 있었다.
부활하는 부활의 복음!
그리스도는 부활하셨다! 그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만 다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처음부터 끝까지 신약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한다.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일부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이다.”라고 말한 폴 비슬리 머레이의 말을 기억하자(p.360).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부활 주일에만 기리는 어리석은 우를 범하지 말자. 매 주일 매순간마다 교회 공동체의 모임과 예배 속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을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위대한 부활의 소식을 함께 기념하고 함께 전하자. 부활은 복된 소식이다! 죽어가는 세상에 죽음은 더 이상 마지막이 아니라고 담대히 외치자. 우리가 외치는 부활은 그저 미래를 위한 복된 소식만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현재 우리들을 위한 복된 소식이다. 부활 승천하셔서 만유를 다스리는 우리 주님은 다가올 생에 대한 소망만을 제시하지 않으셨다.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과 풍성한 은혜를 제공하신다. 아무쪼록 본서를 통해 사도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을 자신들의 케리그마의 중심으로 삼았는지를 사도행전을 통해서 살펴봄으로써 십자가의 복음과 함께 부활의 복음이 주는 메시지에 감격하고, 그 생명의 복음으로 시대를 이기는 성도와 교회로 거듭나는 데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은 시간의 지배를 받는 세상에 의해 제한받지 않는다. 창조주는 시간 밖에 계시기 때문이다. 또한 창조주는 창조된 세계와 거리를 유지하신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이 땅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그다지 큰 관심을 가지시는 분이 아니다. 세상에는 새로운 일이 없으며 이미 오래전부터 그래왔듯이 수많은 일이 지속적으로 반복될 뿐이다: 탄생, 성장, 죽음 등.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이미 완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수히 반복되는 일들로 가득한 세상 중에 누림과 즐김은 창조주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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