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Sex)이란 무엇인가. 우린 그동안 성에 대해 어떤 교육을 받았던가. 가정과 학교, 그리고 사회로부터 남녀의 구별된 성과 각 역할에 대해 배워왔다. 가정에서는 부모(父母)를 통해 남녀의 다름을 보고 배웠고, 학교에서는 과학적 접근으로 ‘남성은 XY, 여성은 XX’라는 불가변적인 성 정체성에 대해 배웠다. 이러한 남녀의 성 구별은 사회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문화 속 남녀의 역할은 명확했고 분명했다. 드라마, 영화, CF, 음악, 책 등 문화 속에서 남성은 리더십을 발휘해 사회를 이끌었고, 여성은 팔로우십을 발휘해 가정을 지켜왔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모두가 말을 하지 않아도 남녀의 형태와 역할은 구분돼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했고, 우리의 아름다운 문화였다.
우린 양성(Sex)의 개념을 갖춘 가정 속 교육과 불가변적인 성의 개념을 교육하는 학교, 그리고 성의 규범을 준수했던 문화의 흐름 속에서 안전하게 지내왔다. 그동안 한 나라를 지탱하는 사회적 틀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많은 이들이 남녀의 구분을 명확히 했고, 구별된 성의 각 역할대로 지내왔기 때문이다. 명확한 성의 구분은 가정을 건재하게 했고, 우리 사회는 가정의 건재함 속에 보존되어 왔다. 성에 대한 이성적 생각과 규제, 규율 등의 질서가 있었기에 우리 삶의 많은 것들이 지켜질 수 있었다. 우리는 이를 간과해서는 안 되며, 성에 대한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사회는 성(Sex)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성이 없어졌다. 성을 탈피한다. 명확한 성의 질서로 인해 사회가 보존되어 왔는데 사회는 인간의 고유의 성, 그 고귀한 가치를 지우려든다. 그리고 대체한다. 사회적 의미의 성이라 불리는 제3의성 젠더(gender)로.
젠더(gender)라는 용어는 1995년 세계여성회의에서 채택된 이후, 여성차별을 금하려는 목적에서 사용돼 왔다. 언뜻 ‘여성차별 금지’라는 문구가 남녀의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 같지만, 젠더는 단순히 남녀 평등을 위한 용어가 아니다. 젠더는 여성이 여성성으로부터 탈피하려는 페미니즘 운동에서 비롯됐다. 남성으로부터 성 착취를 당하며, 모성애 또한 억압이고 지옥이라 주장하는 페미니즘에서 ‘성(Sex)은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후천적으로 선택 가능하다’라는 젠더의 이념이 나왔다. 오늘날의 젠더는 이보다 더 넒은 개념의 ‘성의 무질서’를 의미한다. 이들은 성이라는 단어를 자체를 부정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젠더는 성이 아니다. 성을 떠나 정의 내릴 수 없는 모호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들은 선택적 행위 뒤에 행위자의 존재(정체성)를 부정하는데 이처럼 인간 본연의 성을 무시하는 이들의 이념이 과연 인류 사회에 이점으로 남을 수 있을까.
이렇게 성(Sex)이 여성권리운동인 페미니즘을 거쳐 젠더(gender)로 오기까지 수많은 이론가들의 활약(?)이 있었다. 이들은 성의 역할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성에 억압된 모든 권리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이들이 이토록 성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 대부분은 성적 자유를 갈망하는 자들로 바른 성의 가치관을 가지지 못한 채 살아왔다. 이들은 자유분방한 성 해방을 원했으며, 성적 다양성이라는 질서 없는 성문화를 만들었다. 이들은 한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자녀를 양육하는 결혼 제도를 억압이라 느꼈다. 그리고 생명을 잉태하는 임신의 축복조차 족쇄라 느끼고 임신, 출산은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권리임을 강조하며 피임과 낙태를 옹호해 왔다. 이들에게 성 윤리에 대한 질서는 있지 않았다.
나는 이들이 성의 다양성을 빌미로 본인들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려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순전히 남녀의 동등한 권리를 원했다라고 하기에는 이들의 사생활은 너무나 문란하며, 책임감이 없었다. 이들에게 권리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들에게 권리는 단지 개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도구였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성적 다양성이라는 젠더는 사회에 득이 되는 이념이라고 볼 수 없다. 젠더는 단지 개인의 욕구를 드러낸 하나의 장치일 뿐이다. 젠더는 그 의미가 모호한 가운데 문화화 되었다. 그렇게 사회는 젠더의 실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서서히 받아드려져 왔다. 젠더주의자들은 인간이 가진 고유의 성을 무시함으로 성의 질서를 파괴하려는 제 3의 성, 젠더를 내세우려 한다. 도대체 왜 사회에 혼란을 가져오며 성의 파괴를 야기하는 젠더를 지향하려는 것일까. 이를 사회에 적용했을 때, 일어날 문제들에 대해 어떤 해결 방안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남녀 간의 성의 질서가 파괴되면 먼저 가정에 피해가 갈 것이다. 이는 가정에 대한 책임감이나 소속감 결여로 이어질 것이다. 다양성의 성을 지닌 가족은 더 이상 출산과 자녀 양육을 위해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겐 정욕만 남을 것이다. 가족은 해체될 것이며, 사회는 출산 감소, 인구 감소라는 문제를 시작으로 다양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나는 다시 한 번 의문을 제기해본다. 선천적으로 생물학적 의미를 지닌 성(Sex)을 사회적 의미의 젠더(gender)로 대체하려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성이 사회적 의미로 만들어질 수 있는가? 성이 가변적인 것임을 과학적 근거를 통해 증거 할 수 있는가? 성이 각 개인의 정체성을 무시한 채 생각에 따라, 환경에 따라, 마음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될 수 있는 가벼운 것이었던가? 나는 성별 정체성을 파괴하는 젠더의 개념에 동의할 수 없다. 건강한 사고방식을 지녔다면 남녀의 성이 후천적으로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요즘 미디어에서 조장하는, 동성애를 비롯한 제 3의 성, 젠더의 포장은 모두 꾸며진 것이며 실제로 결과는 아름답지 못함을 알아야한다. 성의 무질서, 성의 파괴는 각종 성병들을 일으켰고,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바이러스로 변종되어 활개를 칠 것이다. 그리고 가정과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을 보게 될 것이다. 성은 태초부터 완성된 것이며, 우리는 순리를 따라야한다. 그것은 성에 억압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유한 성적 규범 안에서 더 큰 자유를 누리며 성에 대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거스르지 말아야할 질서이다. 성의 생물학적 요소를 각 개인의 의견에 따라 정할 수 있고, 성을 각 개인의 느낌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은 비과학적 사고이다. 염색체는 변할 수 없다. 과학적 접근성이 없는, 섭리를 거스르는 젠더는 사회에 큰 혼란만을 가져올 뿐이다.
자신의 욕구를 억제하지 못함은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며, 계속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억제하지 못함을 자유라 포장하고, 질서를 억압이라 반박하며 파괴의 영역을 넓혀나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1942년 출간된 ‘제 2의성’에 나오는 문구를 떠올려본다. 여성의 임신을 불구라고 표현했던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아니, 그녀는 틀렸다. 인간이 가진 성에 대해 고유한 존엄성과 권리를 진정으로 아는 자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완성된 성(Sex), 그것은 태초부터이며 절대 만들어 질 수 없는 고귀한 가치이다.’
이리사(그리스도의 계절 회원, 센(Saint) 언니 아카데미 회원)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