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윤 박사(창조오픈포럼 공동대표, 사진)가 24일 오전 온라인으로 진행된 ‘창조론 오픈포럼’에서 ‘유물론과 진화론의 결합’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허 교수는 “유물론은 우주는 물질로만 구성되어 있고, 비물질적 존재(신)는 없다는 개념”이라며 “유물론은 인류가 처음 생겨날 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며 상당히 많은 시간이 지난 이후에 생겨난 이론이다. 물질과 신의 개념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변하여 왔다”고 했다.
이어 “고대에는 신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았다. 고대 히브리 민족의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고 섭리하신다고 했다. 이것이 유대교가 된 것”이라며 “이러한 종교적인 관점에 대해 회의적인 자들이 철학을 시작했다. 특히 서양철학의 시조인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보았다. 이것의 배경으로 이집트 신화를 보면 아랫물과 윗물이 만나면서 신들이 생겨났고 그 신들이 물질에 생명력을 부여하여 다른 생물들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물질선재설’, ‘물활론’이라고도 하며 ‘자연발생론’에 바탕이 된다. 또한 고대원자론자들은 물질은 나눠질 수 없는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기독교가 등장하게 되면서 신의 개념이 달라진다”며 “예수 그리스도가 히브리 민족의 종교인 유대교를 개혁하는데 유일신 야훼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전환된다. 기독교 창조론은 유대교와 텍스트는 같으나 해석은 다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요한이 해석한 ‘태초의 빛’이다. 기독교의 해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했다.
허 박사는 “기독교에서 ‘종교개혁’(1517)은 로마카톨릭교회의 면죄부 판매 비판이 발단이 되어 일어났다. 마르틴 루터는 교황의 성경해석권의 독점을 폐기하는 ‘만인사제설’을 주장했다”며 “이 때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1543)을 주장했는데 이것은 ‘과학혁명’이었다. 교리를 중시하는 교회의 ‘천동설’과 사실을 중시하는 과학의 ‘지동설’이 충돌하게 되고 로마카톨릭교회가 지동설을 주장하던 ‘갈리레오’를 탄압했다가 1992년 교황 바오로 2세에 가서 사과를 했다. 이후에는 진화론도 과학이라고 인정하게 되면서 카톨릭교회는 ‘유신진화론’쪽으로 흘러가게 된다”고 했다.
이어 “그렇게 과학이 발전하면서 고전 물리학이 형성된다. 고전 물리학에서 물질은 질량과 부피를 계산할 수 있는 것이라는 개념을 가진다”며 “물질은 눈에 보인다는 해석으로 ‘기계적 유물론’을 등장하게 한다. 기계적 유물론을 ‘계몽사상’이라고도 하는데 프랑스 계몽주의 작가 볼테르(1694~1778)는 이성을 강조하면서 신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했으며 자연히 이신론 성향이 강해진 것이다. 이것을 대표하는 백과전서파들이 중심이 되어 프랑스 대혁명(1787~1799)을 일으키고 신의 간섭 없는 인간사회를 구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진압을 하고 황제로 등극하면서 그의 스승인 라플라스가 장관으로 임명이 되었지만 신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 것에 지적을 받자 ‘신에게는 신에 대한 가설이 필요 없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것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에 입각한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또 “실질적으로 신론을 부정하는 유물론의 등장은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이 등장하게 되면서 확립된다”며 “그러면서 고대 생기론과 이신론 개념이 사라지게 된다”고 했다.
허 박사는 “마르크스는 헤겔(1770~1831, 관념철학을 대표하는 독일철학자)의 좌파에 속했다. 헤겔은 그의 저서 ‘그리스도교의 정신과 그 운명’, ‘정신 현상학’에서 ‘세계의 역사는 절대정신의 자기 전개 과정’이라고 말했다”며 “마르크스는 절대정신을 다른 말로 ‘물질’이라고 했으며, 인간 세상에서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수 없다는 헤겔의 주장에 마르크스는 ‘유토피아’는 세워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했다.
이어 “루트비히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 1804~1872 독일의 철학자)는 그의 저서 ‘죽음과 불멸에 관한 고찰’, ‘그리스도교의 본질’에서 ‘신은 종교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종교는 인간이 만든 것’이라고 말하면서 기독교로부터 배척되었다”며 “은둔 생활을 하며 그는 무신론자가 아님을 적극적으로 부인했다. 그러면서 개체의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의 영향을 받고 역사적 유물론을 펼쳐 가는데 헤겔의 철학을 비판하기로 ‘헤겔의 변증법은 거꾸로 서있다’고 했다”며 “독일의 사회주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였던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를 만나면서 ‘신성가족’이라는 저서를 출판하는데 여기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을 남긴다”고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1848년 런던에서 공산당 선언을 하게 되는데 유물사관에 의한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목표로 했다”며 “이제까지의 모든 역사적 경험과 반대로 행동하며 영원한 진리, 모든 종교, 도덕을 폐지하고 플로레타리아 혁명의 최종 승리 선포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추진,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를 외치며 역사적 유물론을 완성하면서 신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진화론은 지구 생물은 원시생명체에서 진화한 것임을 말하며 다윈 이전에도 진화론을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며 “그러나 다윈의 진화론이 인류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 이전의 진화론은 현대에서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했다.
이어 “용불용설의 진화론은 현대 공산주의측에서 도입을 했다. 프랑스에서는 동물학자 조르주 퀴비에(Georges Cuvier, 1769~1832)에 의해 비판을 받고 퇴출되었지만 공산주의 나라로부터 인간화 교육에 적용이 되었다”며 “현대에 와서 후성유전학에서 용불용설이 획득형질 유전설로 부활하게 되는데 DNA에 변이가 일어나지 않고, 발현 스위치만 켜지고 꺼진다는 개념”이라고 했다.
그리고 “다윈의 진화론은 갈라파고스 3개 섬에서 3종류의 핀치새 샘플을 채취하면서 생물학자 존 굴드(1836)의 판정으로 3가지 변종을 알게 되고 변종의 원인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면서 시작된다”며 “외사촌 엠마 웨지우드와 결혼(1939)을 하게 되고 5개 국어를 할 정도로 유능했던 아내의 비서 역할로 자연선택에 의하 진화 개념의 초안을 작성하게 된다(1842)”고 했다.
또 “말레이지아에서 알프레드 월리스에게 편지를 받게 된다.(1858) 논문의 대리로 발표 요청을 받게 되는데 논문 제목이 ‘원형으로부터 무한정 멀어지려는 변종의 경향성에 관하여’였다”며 “자신이 연구했던 것과 동일한 내용이었으며 찰스 라이엘이 대리자로 린네학회에서 같은 내용의 논문을 발표하게 된다”고 했다.
더불어 “1859년 다윈은 ‘종의 기원’이라는 저서를 출판하게 된다”며 “자연선택에 의하여 웅연히 발생한 유리한 변이가 오래 누적되면 새로운 종이 발생한다는 개념”이라고 했다.
이어 “여기서 주요 용어의 이해가 중요한데 종과 변종의 관계에 있어서 스웨덴 식물학자 칼 폰 린네(1707~1778)는 외형적인 특징으로 분류 단위를 구분했고 종 안에서 변종을 나눴다”며 “현대 생물학에서는 교배해서 생식 능력이 있는 자손을 낳을 수 있는 개체의 집단이라고 했다. 미국 미생물학자 칼 우즈(1928~2012)는 1977년 RNA 세계 가설을 처음으로 주장해여 3역 6계 분류체계에서 고세균역을 신설하고 리보솜 RNA의 계통 분류 체계를 확립”했다고 했다.
허 박사는 “다윈은 ‘진화론이 완벽하지 않다’며 4가지 난점을 고백했다”며 “중간종과 화석, 중간 형태, 본능, 이종교배의 불임 현상(생식격리)이다. 이 4가지는 다윈의 진화론을 반격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결론적으로 창조자는 몇 개 또는 한 개의 생명체만 만들었고, 그것들이 점진적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창조자’는 단어가 다윈의 진화론이 무신론이 아니라는 근거가 된다. 현재 다윈주의자들이 이 말을 가지고 유신진화론을 주장한다. 실질적으로 다윈 자신은 ‘불가지론자’라고 말했다”고 했다.
이어 “유물론과 진화론이 결합함으로써 과학적 무신론이 형성된다”며 “엥겔스가 먼저 다윈의 ‘종의 기원’이라는 저서를 접하고 같은 편이라고 생각해서 편지를 보낸다. 이후 마르크스도 저서를 접하고 그 당시 정치경제학을 연구중이었던 그는 다윈의 진화론(자연사)과 유물사관(인간사)를 비교 정리를 진행했다. 마르크스가 1867년 ‘자본론1’을 출간,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인용했다. 내용에는 다윈은 동식물의 기관의 형성에 관한 자연의 기술사(진화론)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사회의 생산적 기관의 형성시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유물론)고 했다. 다윈은 초판본을 보고 ‘나는 읽을 만한 능력이 없다’고 답장했다”고 덧붙였다.
또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다윈의 진화론을 수용하는 과정이 또 나타나는 부분은 전기 사상이 끝난 이후 ‘오이겐 듀링씨의 과학혁명’(1878)이라는 마르크스와 다윈의 비판자 듀링 박사에 대한 반론 논문집(줄여서 ‘반듀링론’)으로, 각장은 서설, 철학, 정치경제학, 사회주의 등 총 3부 31장으로 구성되며 제1부 7장에는 다윈의 진화론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고 했다.
그리고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 발전’(1882)이라는 저서를 출판한 이후 공산주의를 ‘과학적 사회주의’로 주장하며 다윈의 진화론과 유물사관의 결합을 공식적으로 선언한다”며 “‘자연의 변증법’은 엥겔스의 미완성 유고작으로 자연사에 나타난 변증법적 성격을 드러내는데 내용 중반에는 ‘다윈의 진화론이 유물론적 자연관을 견고한 두 다리로 서게 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다윈의 진화론이 없었다면 유물론적 자연관이 형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과의 결합이 확실히 증명되는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과학적 무신론의 발전은 레닌(Vladimir Lenin)에 의한 러시아의 공산당 혁명의 성공과 스탈린(Joseph Stalin)의 마르크스-레닌주의 계승, 오파린(Alexander Oparin)의 화학적 진화론 연구를 가져왔다”며 “그리고 서구에는 무신론적 실존주의가 발전했다”고 부연했다.
그는 “오파린의 ‘생명의 기원’이 1936년 출판되면서 사실상 과학적 무신론이 완성된다”며 “서론에는 엥겔스가 생명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 연구 방향을 결정했다는 내용과 함께 서구의 관념적 철학을 비판했다. 본론으로 들어가면 최초 원시 생물의 세포가 자연 화합물에서 화학작용에 의해 저절로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변증법적 비약’이라고 한다. 결론은 인공 생명체 제조가 가능하다는 주장으로 이로써 신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증명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스탈린은 ‘DIAMAT’라는 변증법적 유물론이 인간 사회에 적용되는 것이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저서를 출판한다. 과학적 무신론의 결론은 우주에서 신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은 없다는 것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최고 수준의 과학적 무신론으로 평가, 해방 후 소련 군정장관 로마넨코가 북한 김일성에게 전달하게 되며 서구 과학계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서구사회는 과학적 무신론을 어떻게 수용했는가”라며 “양자물리학이 등장(1900)하게 되는데 ‘닐스 보어’는 과학의 연구를 물질에 제한하고 보이지 않는 신을 배제했으며 실재론 논쟁에서 ‘아인슈타인’은 보이지 않는 신을 과학에서 배제해선 안 된다. 그것을 규명하는 것이 과학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패배하게 된다”고 했다.
또 “이후에는 집단유전학 하디-바인베르크의 법칙(1908), 도브잔스키의 ‘유전학과 종의 기원’(1938), 줄리언 헉슬리의 ‘진화:현대종합’(1942), 에른스트 마이어의 ‘계통학과 종의 기원’(1942), ‘진화론 논쟁’(1991), 유리-밀러의 실험(1952), Hawking과 L. 믈로디노프의 ‘위대한 설계’(2010) 등 과학적 무신론을 수용한 결과들이 있다”고 했다.
아울러 “미국 생물학자 크레이그 벤터(Craig Venter, 1946~)는 인공세포를 실험했는데 합성 세포에서 인공적 생명 기능 발현 관찰(2010)을 발표했다”며 “그리고 2016년 인공DNA와 생체 세포막을 만들었으나 절반가량 실패하면서 현재까지 진전이 없다. 결론적으로 생명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생명력을 부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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