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현 목사(수영로교회)가 12일 8·15광복기념수요저녁예배에서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사61:1~3)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이 목사는 “올해는 8·15광복 75주년이 된다”며 “자유를 누린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나라를 빼앗기고 자유를 잃는 다는 것이 쉽게 와 닿지 않는다. 그러나 자유를 빼앗기고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요즘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삶 가운데 자유를 빼앗긴 부분들이 많다”고 했다.
이어 “무언가를 염려하고 있거나 중독되어 다른 것을 보지 못하며 더 나아가서는 마몬의 신인 돈을 사랑하고 거기에 매여 있거나 나의 주식과 아파트를 노래 부르며 거기에 사로 잡혀 있다”며 “바로 오늘날 우리가 자유를 잃어버린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은 자유이다. 그러나 이 자유를 한 사람이 아닌 나라 전체가 빼앗긴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해외에 있을 때 애국자가 되는 것 같다. 자국에 머물러 있을 때는 모르지만 나라를 떠나서 소식을 접하게 될 때면 더 기도를 많이 했던 것 같다”며 “한국교회, 특별히 기독교가 일제시대를 지나면서 어떻게 통과해 왔고 오늘날 한국사회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왔던 것인가.”를 물었다.
그는 “1905년 이후 일본의 침략이 노굴화 되고 그러면서 기독교 초창기 항일운동과 맞닥뜨려 지는 역사가 일어난다”며 “그 당시 항일운동을 하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주로 기도회 형태였다. 특히 길선주 장로의 발휘로 11월 추수감사주일부터 7일간 한국교회 전체가 나라를 위한 기도를 했다. 그 당시 수천 명이 모였었다”고 했다.
이어 “그 이후에도 한국 교회는 여러 형태로 기도회 형태를 가졌었다”며 “그리스도인들 안에 있는 민족애와 함께 항일정신과 어울려 기도를 했다. 그 당시 옛날 교회의 사진을 보면 초가집에 교회 간판이 걸려 있었고 그리고 같이 있었던 것이 ‘태극기’였다. 나라가 힘든 여정 가운데 자연스럽게 표현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1910년 8월에 한국이 일본에게 강점되어 식민지로 전락한다”며 “일본이 한반도를 합병한 후 부터 가장 신경 쓰여 했던 것이 ‘개신교’였다.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인의 국민성을 말살하려고 하지만 가장 의식이 깨어 있던 곳이 개신교였다. 개신교의 배후에는 서구 열강들이 붙어 있었다. 서구 선교사들이 연결이 되어 있다 보니 함부로 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들이(일본)이 사용한 방법이 회유와 탄압이었다”며 “유화정책으로 금품을 살포하고 특히 기독청년들에 보조금을 줬다. 때론 교회 건축에도 보조금을 줬는데 깨어 있는 사람은 받지 않았다. 탄압으로는 설교 내용을 다 검열했으며 사경회, 부흥회를 감시했다. 일부 찬송을 금지하는 등 교회를 핍박했다”고 했다.
이 목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나라를 잃었지만 가장 치명적인 것은 신앙의 자유를 잃은 것”이라며 “마음껏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더 심각했던 것은 신사참배였다. 일본 천왕에 대한 신성을 부여한 것이다. 그래서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를 부정하고, 모든 사람들이 신사를 두고 절을 하게 했다. 서울에는 남산, 부산에는 송도에 큰 신사가 있었다. 학교에서도 신사참배를 거부하면 폐교가 되었고 교회 안에도 신조당을 건설해 천왕과 여호와 하나님 중에 누가 더 높은지 문답을 해야 했다”고 했다.
이어 “일제시대 기독교 말살 정책은 커져 갔다. 주기철 목사의 순교 사건이 대표적”이라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사참배 문제로 순교를 당한다. 나중에는 한국의 모든 교단을 강제로 통합한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을 설립하게 된다. 이 교단은 완전히 일본 정책에 순종하게 해서 예수 믿는 교단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또 “1945년 대한민국이 해방되기 직전 한국교회 목회자 다수를 살해할 계획을 했으나 해방으로 이 계획이 무산되었다”며 “해방된 이후에는 한국교회는 분열이 생긴다. 신사참배를 한 교회와 안한 교회가 분리된 것이다. 그 외에 여러 가지 신학적 갈등으로 분열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1943년 광복이 되기 2~3년 전 일제의 기독교 탄압은 극에 달한다”며 “예배 전 일본국기에 대한 경례, 황성요배, 출전장병을 위한 묵도, 일본국가제창, 주일오후 및 야간집회기도회 금지, 일본어 강습, 근로 작업등이 요구되었다. 교회의 내·외부적인 분열과 타락도 일어났다. 성도들끼리의 다툼과 고발, 심지어 교회를 팔아먹는 사람도 생겨났다”고 했다.
또 “이 당시 일본이 개신교를 탄압한 이유는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라며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것은 전국적인 조직이었다. 그리고 학교와 자선사업으로 국민들의 신뢰를 받았다”고 했다.
더불어 “한국교회가 태동하고 성장해 가는 초창기엔 순교자들이 있었다는 점은 중요하다”며 “대표적인 인물이 주기철 목사이다. 부산초량교회를 섬겼고 삶과 신앙의 기준이 있다면 ‘일사각오’였다. 생명을 거는 신앙이었다. 한국교회 믿음의 선조들에게는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 어떤 핍박에서도 변절하거나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내는 이것이 한국교회의 중요한 전통이며 가지고 있는 유산”이라고 했다.
그는 “이러한 개신교의 핍박에도 1907년 교인의 수는 대략 7만 명이었다고 한다”며 “1912년에는 두 배 이상이 넘었다. 어려움 속에서 복음은 꽃을 피우는 것이다. 한국기독교의 역사는 세계사에도 유래없는 역사이다. 그것은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연단시키시는 것이다. 지금도 고난 가운데 있다면 다른 방법은 없다. 기도에 생명을 걸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1950년에는 교인 수가 백만이 된다. 해방된 이후 흑암의 시대에서 오히려 예수 믿는 백성은 늘어난 것”이라며 “1970년대에는 오백만이 되고 때를 거듭 할수록 교인 수는 증가한다. 복음에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8·15 해방은 백성들의 기도가 모여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것이다.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선교가 어디로 가느냐가 그 땅의 운명을 결정한다”며 “외세의 침략으로 모든 것을 빼앗기고 가난했던 이 나라가 현재 선교사를 세 번째로 많이 파송하는 나라, 경제적으로 안전한 나라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라고 했다.
또한 “최근 일본과 우리나라의 관계가 좋지 못하다. 십자가의 도는 (상대방이) 용서를 빌기 전에 우리가 먼저 용서해 주는 것이며 이것은 복음을 경험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며 “우리나라 보다 기독교 역사가 오래 되었고 많은 선교사들이 갔던 곳이지만 복음화 되지 못했다. 우리는 그들을 미워하기보다 축복해주고 그 땅이 복음화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 내면에 아픔, 상처도 치유되어야 한다”며 “이제 광복은 통일과 연결이 되어야 한다. 이 통일은 정치적, 이념적 통일을 말하지 않는다. 복음으로 하는 평화적인 통일을 말한다. 동독과 서독이 통일 되었을 때 서독의 교회들이 동독을 많이 도왔다고 한다”고 했다.
더불어 “한국의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 평양이었다”며 “신실한 기독교인들에 유독 평양에 많았다. 지금도 남한교회를 위해 지하교회에서 기도하는 신실한 기독교인이 평양에 있다. 기도가 쌓이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독일의 통일도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고통 받는 북한의 지하교인들과 맘껏 예배드리는 날을 기대하며 통일을 바라볼 때 진정한 광복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이 목사는 “이러한 시점에서 우선은 이 땅에 좋은 지도자들이 세워지도록 기도해야 한다”며 “복음은 둘을 하나 되게 만든다. 균형 잡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곳곳에서 일어나야 된다. 대한민국은 고통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세계 각 국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교회를 세웠다. 흩어지며 오게 된 세계는 우연이 아니”라고 했다.
아울러 “광복 75주년을 맞이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나라를 잃었던 비운의 역사를 잊지 않고 믿음의 선조들이 일궈 낸 터 위에 우리가 있음을 알고 교만해서는 안 된다”며 “겸손히 하나님만을 섬기므로 복음이 우리를 통해 전 세계에 전해지는데 쓰임 받는 모두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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