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화요일 오전 10시 10분에 진행되는 ‘탈북민센터 북한구원 화요모임’ 11일 모임에선 손이슬 사모(장신대 교회음악과)가 북한에서 배운 아코디언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연주와 함께 “길지 않은 인생 가운데 하나님께서 개입해주셔서 오늘까지 살아 숨 쉬게 해주심에 감사드린다”며 간증을 전했다.
손 사모는 “함경북도에서 살다가 2009년 탈북, 20014년에 한국에 입국했다. 부모님은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동포로 1960년 북한의 김일성 선전, 공부도 공짜로 시켜주고 집도 준다는 화려한 선전에 넘어가서 북한으로 가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적응을 못 해서 1년 만에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졸업 후 대학진학을 계획했으나, 집안 형편으로 인해 가장이 되어 어부가 되었다. 열심히 일해서 갑판장까지 되었지만 배를 타던 재일동포가 도망을 가자 이후로 재일동포는 배를 타지 못하고 뭍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알고 보니 재일동포는 자유가 없고 감시 속에서 지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말을 해도 다르게 분석해서 추방을 보내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리는 경우도 많았다”고 했다.
이어 “아버지는 수산대학을 꿈꿨지만 제한이 있어서 강원도의 원산경제대학에 가게 되었다. 당과 수령이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간다는 정신으로 일했던 아버지는 대학 졸업 후 괜찮은 직장, 괜찮은 직위에서 일하게 되었고, 집안 환경은 점점 좋아졌다. 아버지는 북한의 체제가 잘못된 줄도 모르고 당과 수령에 충성을 다하며 일했는데, 점점 상위층의 부패를 보게 되었다. 이 체제가 우상숭배라는 것을 집안에서 몰래 말씀하면서도 밖에 나가서 말하면 8대가 멸족을 당한다고 절대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반동 같아서 무섭고 두려웠다”고 했다.
손 사모는 “아버지는 제가 탈북하기 직전에 중국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십자가 있는 건물을 찾아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돈도 권력도 아니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며 마음에 의지할 곳이 있어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아버지가 빨갱이처럼 일하다 보니 탈북 브로커가 나서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었다. 어머니가 알게 된 브로커를 통해서 만19세 되던 해 강을 건너 탈북을 하게 되었다. 한국으로 가는 길인 줄 알았는데 한족 브로커가 저를 한족에 팔아넘겼다. 아이를 낳고도 매일 밤 한국에 꼭 좀 보내달라고 기도인 줄 모르는 기도를 하며 울면서 지냈다”고 했다.
이어 “1년 2년이 지나고 이대로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해주신, 교회를 찾아가라는 말씀이 떠올랐지만 도망갈까 감시하니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아이가 감기를 심하게 앓아서 시내에 있는 아동병원에 나가야만 했다. 주인집 딸과 같이 갔다 오다가 십자가가 붙어있는 교회를 봤다. 정류장 이름도 교회 위치도 기억 못 하고 지나가버렸는데 오로지 거기에 가야겠다는 생각, 다시 기회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시간만 되면 우는 아이를 달래가며 무작정 그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몇 개월을 보냈지만 찾아가는 게 쉽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 “마침내 교회를 찾았지만 들어갈 수 없었다. 중국에도 간첩이 많으니 함부로 북한에서 왔다는 말을 하지 말라던 아버지의 당부가 생각나서였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주일에 맞춰서 한 두 번 예배드리려 온 척 하다가 무작정 목사님을 찾아가 한국에 보내달라고 사정했다. 목사님이 이런 사역을 하다가 감옥에 잡혀가서 매도 맞고 하셔서 거절하셨다. 그 당시 중국에서 영사관이나 한인들 있는 곳은 공안들이 보초를 서고, 잡히면 무조건 북송되는 경비가 삼엄한 때였다. 여러 한인 교회 한국인들을 찾아다니며 사정했지만 다들 거절했다”고 했다.
이어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서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기차역을 찾아갔고 지나가는 한국인을 무작정 붙잡아 명함을 받았다. 전화로 한국행을 요청했지만 몇 번 거절당하다가 2013년 말쯤 다시 전화해서 조선족 여인을 소개받았다. 너무 기쁘고 감사했다. 그동안 북송 한 번도 당하지 않고 숨어 살았다는 것이 감사했다. 조선족 여인에게 연락해서 한국 오는 루트도 알게 되고, 아버지, 어머니가 교화소에서 돌아가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부모님이 나를 떠나 보낸 그때는 철이 없어서 한국 가면 모시러 갈 건데 왜 마지막인 것처럼 이야기했을까 생각했는데, 부모님은 아셨던 것 같다”고 했다.
손 사모는 “한국에 딸과 같이 들어와서 정착하는 게 만만치 않았다. 통장에 잔액도 5천 원 밖에 없고 속상하고 막막한 상황 가운데 교회를 알게 되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예배드리고 말씀을 들을 때마다 부모님 생각이 나고 마음이 괴로워서 발버둥 치며 금요 철야, 새벽기도도 나갔었다. 딸아이의 아빠를 중국에 두고 온 죄책감에도 시달렸다. 그때 교회분들의 중보기도가 큰 힘이 되었다. 제가 많이 슬퍼하고 죄책감에 시달릴 때 하나님께서는 찾아오셔서 내가 아들을 보냈지 않았냐고,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사랑하느냐고 예배 가운데 말씀해주셨다. 말할 수 없는 평안과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 찾아왔다”며 “그렇게 정착했고, 하나님이 붙잡아주셔서 살았다는 것이 감사하다”고 했다.
이어 “어머니가 왜 돈도 권력도 필요 없고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했는지 이해가 안 됐었는데, 중국과 타국을 통해서 한국에 오는 과정, 정착하는 과정 가운데 조금씩 깨닫게 된 것 같다. 하나님 없이는 제가 오늘 이 자리는 물론이고 목숨이 붙어 있을지 이 땅에 있을지 상상이 안 된다. 많은 고마운 분들이 계셨는데 잘 정착하고 하나님 인도하시는 길로 잘 가는 것이 그분들께 보답하는 길이고, 하나님께 기쁨 드리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신학도를 만나 지금 두 딸의 엄마로, 신학교에서 교회음악을 배우는 학생으로 살게 해 주셨다. 주님 오실 그 날을 고대하면서 영광을 바라보면서 잘 나아갈 수 있도록 기도 부탁한다”고 했다.
손 사모는 “오늘 이 자리에 왜 저 같은 자를 세우셨을까 생각해보았다. 하나님 나와 늘 함께하시는데 그걸 의식하지 못하는 저를 보고 안타까워하신 것 같다. 제가 받았던 은혜를 기억하게 해주시고 하나님이 영원히 나와 같이 해주신다는 것을 알라고 저의 뒤통수를 치시는 것 같다. 아직도 하나님의 큰 계획과 뜻을 알 리가 없지만 인도하시는 길로 잘 나아가도록 간절히 기도 부탁한다”며 간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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