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력’이라니요. 기도가 무슨 마법입니까, 자동으로 작동하는 기계입니까? 기도는 완벽한 착각이거나, 미숙하고 불완전한 인격체들(우리)과 더없이 구체적인 인격자와의 인격적 접촉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무엇인가를 구한다는 청원의 의미로서의 기도는 전체 기도의 작은 한 부분일 뿐입니다. 자백과 참회로 기도의 문지방을 넘고, 흠모로 기도의 성소에 들어간다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그분을 보고 누리는 것은 기도의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일입니다. 기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은 그 계시의 자연스러운 결과이지 가장 중요한 결과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되면 그분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 배우게 됩니다. _‘기도의 효력’에서
- C. S. 루이스, <세상의 마지막 밤>
신약의 성도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보다 더 높은 윤리적 실천을 요구받는다. 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은 계속하여 비윤리적 삶과 범죄의 유혹을 받고 그 속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중간기 유대문헌의 이러한 용서의 개념으로부터, 범죄 후에 예수님의 속죄를 믿음으로써 진정한 회개 를 해야 하고 더 나아가 거룩하고 의로운 삶의 열매를 일상에서 맺어야 한다는 교훈을 간접적으로 배울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나님께서 사죄를 베푸신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남의 허물을 용서하며 살라고 가르치신다(참고: 엡4:32). 참고로 크리소스톰(349-407년)은 산상설교 중 마태복음 7장 13, 14절과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강설(눅16:19-31)을 통하여 자신의 경건관을 금욕적인 수도사의 삶으로부터 사회 속에서의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바꾸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제자들에게 세상을 등지고 살라고 명하지 않으신다.
- 송영목, <하나님 나라 복음과 교회의 공공성>
나는 이제 과거의 눈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율법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바리새인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리스도인들을 평가하고 손가락질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제 과거처럼 유대주의적인 사고에서 판단하는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리새인의 경건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긴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바리새적인 사고와 경건이 바른 복음으로 나가게 하는 데 얼마나 장벽이 되는지 깨달았습니다. 이후 나는 가말리엘 문하생으로서, 율법학자로서 성경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안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과거 나의 모든 비늘이 벗겨졌기 때문입니다.
- 심석현, <나는 바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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