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트루스포럼’의 연구위원인 조평세 박사(북한학)가 본지에 ‘기독교 보수주의란 무엇인가’를 매주 한 차례 연재합니다.
1957년 프리드리히 하이에크(Hayek, 1899~1992)는, 당시 재기를 꿈꾸고 있던 미국 보수주의 진영에 느닷없는 찬물을 끼얹었다. 그가 회장으로 있던 고전자유주의 모임인 몽페를랭(Mont Pelerin) 소사이어티에서 “나는 왜 보수주의자가 아닌가”라는 에세이를 발표한 것이다. 아직 비공개 논문이었지만 이 당황스런 소식은 미국 보수진영에 황급히 퍼졌다. 10여 년 전 그가 영국 런던정경대(LSE) 교수로 있을 때 쓴 <노예의 길>(1944)은 사회주의의 환상에 대한 효과적인 반대논리를 제공하여 사실상 보수주의자들의 회합에 물꼬를 튼 바 있었다. 그런 그가 자신이 보수주의자가 아니라고 선언한 것은 이제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반격을 꿈꾸고 있던 당시 보수진영을 당혹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수의 정신>(1953)으로 보수주의의 입장을 재정립하며 미국 보수진영의 대표적인 사상가 역할을 했던 러셀 커크(Kirk, 1918~1994)가 하이에크에게 급히 공개토론을 제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몽페를랭 소사이어티에서 두 사람이 만날 자리를 마련했고, 그렇게 “20세기 비(非)좌익진영에서 가장 중요한 토론 중 하나”로 평가받을 ‘하이에크-커크 논쟁’이 열리게 된다. 하이에크는 보수주의를 반지성적이고 신비적이면서 인간 상위의 도덕적 권위에 호소하여 항상 최후의 발언을 차지하려 한다고 비판했고, 커크는 자유주의가 인류역사의 경험을 등한시하며 인간이 결코 완벽하게 이룰 수 없는 자유시장을 과도하게 신봉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흥미로운 것은 둘 다 상대의 주장이 또 다른 전체주의로의 길을 연다고 우려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보수주의에 대한 각자 다른 이해(혹은 오해와 선입견)에 있었다. 하이에크는 권위와 전통의 보전에 중점을 두는 유럽의 보수주의를 비판하고 있었고, 커크는 권위와 전통 그 자체보다 그것을 있게 한 불변의 질서에 중점을 두는 버키언(Burkean) 보수주의, 즉 미국의 보수주의를 변호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치경제학자였던 하이에크의 유러피언 배경을 고려하면 보수주의에 대한 그의 선입견과 우려를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그는 “나는 왜 보수주의자가 아닌가”라는 에세이에서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보수주의와 보수주의에 내재된 “민족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성향을 비판했다. 하지만 미국은 그런 유럽형 보수주의에 반하는 고전적 자유주의자(classical liberal)들이 세운 나라였고 미국에서 다시 일어나고 있는 보수주의는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한 미국의 건국정신을 보전하려는 것이었다. 하이에크는 사실상 “나는 왜 ‘유러피언’ 보수주의자가 아닌가”를 이야기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스위스 몽페를랭에서 만났을 때와 달리, 4년 후 미국에서 이들이 다시 만났을 때는 많은 이견과 대립이 한층 누그러졌다. 1960년 커크와 하이에크를 포함한 14명의 보수주의 및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시카고 모리슨 호텔에 모여 주말 내내 긴 토론을 가졌다. 두 진영의 연합을 도모했던 프랭크 마이어(Frank Meyer)와 스탠튼 에반스(M. Stanton Evans) 등이 중재를 했다. 그곳에 모인 모두가 큰 정부에 반대했고 개인의 자유를 중시했으며 자유방임주의에 공감했다. 또한 개인의 자유가 방종이 될 수 있다는 우려에도 공감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도덕의 문제이지 어떤 체제나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에 동의했다. 우려와 달리 하이에크도 자연권의 존재와 인간 상위 질서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해 이들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은 윌리엄 버클리의 코네티컷 샤론 자택에 90여명의 대학생들을 모은다. 그리고 미국 보수주의의 정수를 담은 대표적인 문헌이라고 여겨지는 ‘샤론선언문’을 발표한다. 이 선언은 미국의 자유지상주의자들과 전통주의자들, 그리고 반공주의자들 모두를 만족시키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그들이 선포한 12개의 신념 중, 가장 중요한 첫 번째가 바로 “하나님이 부여한 개인의 자유의지(God-given free will)”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자유가 불가분하며 정치적 자유는 경제적 자유, 즉 소유권 없이 오래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같은 해 하이에크는 그의 <자유헌정론>(1960) 말미에 “나는 왜 보수주의자가 아닌가”라는 에세이를 삽입해 출간했다. 하지만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이를 통해 오히려 하이에크가 진정한 보수주의자임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결국 프랭크 마이어가 <보수주의란 무엇인가>(1964)라는 책을 편집했을 때 하이에크의 에세이도 포함되어 출간된 것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주의 잡지 <내셔널리뷰>는 하이에크의 이 ‘보수주의 부정선언’ 에세이가 수록된 <자유헌정론>을 20세기 100대 위대한 논픽션 단행본 중 9위로 선정하기도 했다.
사실 자유지상주의적(libertarian) 보수와 전통주의적(traditionalist) 보수 간 미묘한 긴장은 보수주의 내에서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불완전한(혹은 타락한) 인간의 자유와 영원불변한 창조질서는 완전히 화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둘은 사회주의와 같은 전체주의에 맞서기 위해 상호의존적이지만 동시에 끊임없는 전쟁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긴장상태는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도 쉬지 않고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런 인간타락의 결과를 인정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에게 더욱 당연한 일이다.
이쯤에서 한 가지 충격적일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기독교 보수주의’라고 부를 수도 있는 미국 보수주의를 정립한 러셀 커크가 그의 대표작인 <보수의 정신>(1953)을 집필할 당시 크리스천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계속)
조평세 박사(북한학, 트루스포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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