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6일 전쟁은 안식일 준수와 관련하여 유명하다. 당시 이스라엘은 아랍 연합군의 대규모 공격을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다. 아랍 연합군들은 지구상에서 이스라엘이란 국가 이름을 완전히 지우기 위해 가장 적절한 공격 시기를 찾고 있었다. 그들이 공격하기로 결정한 날은 유대인들이 목숨처럼 지키는 안식일이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그래서 그 날, 할 수 있는 최대의 공격으로 안식일 하루 동안 이스라엘을 완전히 섬멸시키려 했다. 그들의 예상은 적중했다. 이스라엘은 지하 벙커에서 아무 저항도 못 하고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마침내 안식일이 끝나는 오후 6시 사이렌이 울리자, 이스라엘은 대대적인 반격을 가했다. 방송국은 아모스 9:14-15의 말씀을 하루 종일 방송했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붙들고 세계 전쟁사에 유례없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들은 상황이 아무리 긴박하게 흐르더라도 안식일 준수에 대한 태도가 흔들리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이런 태도를 율법주의라고 맹비난할 것이다. 혹은 지혜롭지 못하고 융통성 없는 처사라고 할지 모른다. 과연 그럴까? 이렇게 비판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어려움에 직면하면 카멜레온처럼 안전한 예배, 편리한 예배를 찾는 우리의 얄팍한 태도를 반성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은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고 하셨다. 진정으로 우리의 경건이 이들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는가?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예배”라고 가르친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을 “경작”하도록 하셨다. 여기서 “경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바드’는 제사장 용어로서 구약에서 흔히 ‘예배’라고 번역된다. 아담은 예배를 위해 창조된 것이다.
출애굽기도 그 맥락은 동일하게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히브리인들을 구출하신 목적은 ‘예배’ 하는 데 있었다. 모세가 바로에게 히브리인들을 풀어달라고 요구한 말을 보면, “우리가 광야로 사흘 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출 5:3)라 한다. 바로에게 ‘제사(예배)를 위해’ 히브리인들을 풀어달라는 요구는 계속 반복된다. 여기서 바로는 계속되는 재앙 앞에서 예배를 허용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온전한 예배는 허용하지 않았다. 처음엔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출 8:25)고 했다. 그 다음엔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출 8:28)고 했다. 모세가 이 타협안도 수용하지 않자 “너희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출 10:11)고 했다. 마지막에는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출 10:24)고 했다. 바로의 계속된 타협과 위협 속에서도 모세는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이것이 성경이 요구하는 예배의 태도이다.
오늘날 기독교 예배는 계속 이런 식의 타협 속에 점차 변질됐다. 세련되고 아름다워지고 편리해졌다. 세상과 갈등하기 싫어서 조금씩 양보하며 예배의 생명은 상실했다. 그 결과 몇 명의 확진자가 나왔다고 언론이 떠들자 대형교회를 시작으로 전국 교회들이 앞다투어 예배를 포기했다. 정말 참담하다.
엘리야를 생각해 보자. 그는 바알과 아세라의 850명 제사장들과 목숨을 걸고 예배의 대결을 했다. 다니엘의 세 친구를 생각해 보라. 그들은 느브갓네살의 신상에 절하지 않는 것으로 인해 풀무불에 던져졌다. 다니엘은 정해진 기간(30일) 동안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상황에도 기도(예배)를 쉬지 않았다. 그는 30일 동안만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지혜롭게 다른 형태의 기도(예배) 생활을 해도 됐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도리어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단 6:10) 했다. 그가 “전에 하던 데로” 기도했다는 사실을 작금의 교회가 예배를 쉽게 변형하는 태도와 비교해 보자. 우리는 너무 가볍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받은 시험을 생각해 보자. 예수님도 사탄에게 예배 타협을 요구받았다. 사탄은 예수님께 천하만국과 영광을 보여주면서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 4:9) 했다. 사탄은 예수님을 향해서도 예배 타협을 요구할 정도로 집요하다. 그러나 타협은 없었다. 왜냐하면, 예배는 신앙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예배를 타협하면 신앙의 모든 것이 무너진다.
상황 때문에 인터넷 영상예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분들의 태도와 성경의 가르침을 비교해 보라. 큰 괴리가 느껴지지 않는가? 중국발 코로나 19 바이러스 확진자가 한 명도 없는 교회도 지레 겁먹고 인터넷 영상예배로 대치한다 야단이다. 물론 가정에서 예배를 잘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나 현장예배도 불경건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에 인터넷으로 경건한 예배가 될지 의문스럽다. 이런 결정은 자칫 신앙 어린 초신자나 어린아이들에게 예배를 가치 없이 여기도록 할까 두렵다. 영상예배는 설교를 듣다가 중간에 듣기 싫으면, 안 들을 수 있다. 가족들과 얘기를 나누며 산만한 예배가 될 수도 있다. 편안한 옷차림으로 느슨하게 예배하기도 한다. 영상예배가 필요에 따라 대안 예배가 될 수 있다는 논리를 피는 목회자들과 학자들은 큰 오류에 문을 열어준 것이다. 이 주장은 오늘날 목회자 없이 영상으로만 예배하고 파하는 교회를 뭐라 하겠는가? 또 모(母) 교회를 중심으로 지교회들에게 영상으로 예배하도록 하는 교회는 어떤가? 교회 출석을 거부하는 가나안 교인들이 교회 출석하지 않고 입맛에 맞는 교회 설교를 찾아 듣는 것을 설득할 명분이 있는가?
현장예배를 멈추고 인터넷 예배를 하면 정말 위기에 닥칠 교회는 대형교회가 아니다. 개척교회들이다. 신자들은 점차 자신이 몸담고 있는 작은 교회 설교보다 잘 디자인된 대형교회 설교로 예배할 수 있다. 이렇게 익숙해진 교인들을 작은 교회 목회자들이 감당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불신자들에게 덕을 끼치기 위해 예배를 자진 폐쇄를 한다면, 이 논리로 주일에 교통을 혼잡하게 한다는 이유로 지역주민들이 예배를 반대한다면, 예배를 폐쇄할 것인가? 사람 눈치 보다 하나님의 눈치를 더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더 걱정되는 것은 대형교회의 이런 무력한 대처를 보고 지방자치단체가 교회 예배를 간섭하는 정황이 예사롭지 않다는 점이다. 바이러스 확진자가 한 명도 없는 어느 지역에서는 일방적으로 예배 중지를 반 강압적으로 요구한다. 몇몇 다른 지역에서는 예배를 강행할 경우 300만 원의 벌금을 집행하겠다고 했다가 반발에 못 이겨 취소하기도 했다. 교회가 자발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포기하니까 외부에서 신앙의 자유를 쉽게 뺏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 같다. 예배당에 모여야 예배가 아니라거나, 인터넷으로 예배를 해도 된다는 논리는 교회가 어려움을 저항할 줄 모르는 무능한 상태로 만들고 있다.
더 나가 교회를 점차 돌이킬 수 없는 타락과 몰락으로 몰고 갈 것이다. 개혁자들은 흑사병이 창궐해도 예배를 포기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전염병이 무서워 도망치는 목사는 면직을 시켰다고 한다. 예배는 기독교의 심장이다. 신앙의 본질이다. 환경에 떠밀려 어떤 식으로든 예배를 자꾸 타협하면 교회는 점차 궁지에 몰려 결국엔 죽고 만다. 타협하면 현재 위기는 모면할 수 있다. 그러나 나중에는 더 큰 위험에 직면한다. 몰락한다. 신앙의 선배들처럼 예배에는 타협이 없다는 일사 각오의 태도를 일관성 있게 견지하고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우리 신앙의 자유를 함부로 넘보지 못한다.
이스라엘의 6일 전쟁이 보여주는 안식일 준수 정신을 다시 생각해 보자. 율법주의라 정죄하기 전에, 우리의 주일 성수 태도를 부끄러워해야 한다. 복음은 율법의 폐지가 아니다. 율법의 완성이다. 복음은 율법의 형식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 속에 정신(spirit)이 없음을 혐오한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복음은 이것(율법)도 행하고 저것(정신)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마 23:23).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개혁자들이나 청교도들은 이 두 가지를 지켜냈던 사람들이다. ‘다시(re) 본래의 폼(form)’을 회복하자. 이것이 reformation(개혁)이다.
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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