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미래에 대해 불안한 마음이 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을 해결하고자 '계획'이란 것을 세운다. 하지만 자신의 계획표로는 결코 예측되지 않는 미래가 있어, 그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를 알고 싶어 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점이나 사주·타로를 진지하게 혹은 재미 삼아 본다. 불안한 미래를, 그 미래가 무엇인지 앎으로써 해결하려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미래를 아는 것이 정말 나의 불안감을 해소시켜줄까?
만약 나의 미래를 알 수 있다면, 잠시 동안은 불안감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래에는 또 다른 미래가 있다. 그래서 미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결국 죽음까지 이야기해야 끝이 난다. 어리석고 허탈한 결말이다. 이를 보면, 미래를 아는 것이 나의 불안감을 결코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래를 아는 것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계획'이란, 우리 인간에게 계획이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라는 말씀을 인정할 때 비로소 성립된다.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절대 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주인님이라는 뜻의 '주님'을 온전히 사모할 때에야 인간으로서의 계획된 삶을 살 수 있다. 내가 세울 수 있는 계획을 넘어서 하나님의 계획까지 나의 계산에 두려 하면 불안과 초조로 다가온다. 내가 세울 수 있는 계획은, 말 그대로 나의 계획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이 처음 인간을 만들 때부터 그랬듯 '사랑'에 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를 온전히 이해하고 고백할 때 우리는 가장 인간다운, 축복의 삶을 살 수 있다. 나의 삶을, 되지도 않는 계산으로 진행하려 하면 그 곳에는 사랑도, 계획도 없다. 불안과 초조만이 있을 뿐이고, 미래를 앎으로써 불안과 초조를 없애려 하는 어리석음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기독교인들은 "점 보러 가는 것이 죄인가요?" 하고 묻기 전에, 점 보러 가는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그 길을 걷고 있는지부터 들여다봐야 한다. 점집에 갔다는 게 문제일까? 물론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점집에 가기 전 걷고 있는 그 길부터, 아니 '점이나 한 번 볼까?' 하는 그 마음부터 문제가 있다는 점을 아는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미래가 아닌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것이 진정 계획적인, 사랑의 삶을 선물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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