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를 기뻐하는 사람이 있을까? 보통은 없다고 보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왜 바울은 굳이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였을까? 그건 우리의 예상과 달리 불의를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불의를 기뻐할까?
지록위마(指鹿爲馬)란 고사성어가 있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다’는 뜻이다. 진나라 말기 환관 조고는 진시황의 유서를 조작하여 막내아들 호해를 황제로 삼았다. 조고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황제의 자리까지 탐을 냈다. 그는 반대파를 솎아내어 숙청하고 싶어 했다. 어린 황제에게 사슴을 바치며 “이것은 매우 귀한 말입니다 황제를 위해서 어렵게 구했습니다”하였다. 황제는 껄껄 웃으며 “이게 어찌 말이오 사슴이지 않습니까”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하들의 말 한마디는 중요했다. 불행하게도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모두 제거당하였다. 환관 조고의 말이라면, 무조건 순종하는 거짓의 무리만 남게 되었다.
1933년 2월 8일 동아일보에 ‘야소교 학교 신사 참배 문제 해결책 작정’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신사 참배는 국가의 공적 의식이므로 참여하라는 총독부의 요구가 있었다. 불교, 천주교, 유교는 오래전부터 신사 참배를 하였다. 기독교만 신사 참배가 종교의식이므로 참여할 수 없다고 고집하였다. 일본 총독부의 압박은 날이 갈수록 심하여졌고 마침내 타협이 이루어졌다.
기사는 이러하다.
“국가적 의식이면 신관(神官)이 주재하여야 되는데 종래 초혼제(招魂祭, 일본의 호국 영령을 위로하는 제사) 같은 의식에는 신관외에 불교 승려가 독경을 하였으므로 예수교 측에서는 승려가 독경하는 이런 의식은 종교의식이 포함된 것임으로 참여 할 수 없다고 반대하였으므로 총독부 당국에서는 이후부터 국가 의식에는 승려의 참가를 금하기로 하였다. 이와 같이 된 데 대하여 불교 측에 반대가 맹렬하였으나 국가적 의식의 순권(順權)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 반대를 물리쳤다고 한다” (동아일보 1933년 2월 8일).
나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웃음이 나왔다. 일본 신관(神官)은 문제 삼지 않지만, 불교 승려를 문제 삼는 기독교도 우습고, 신사 참배를 주도하던 불교 측의 반대도 우습다. 1938년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 참배가 국가의례이며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결정하기까지 기독교는 조금씩조금씩 무너졌다. 그들은 “대세에 순응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조선일보 1938년 5월 26일). 힘 앞에, 권력 앞에 무릎 꿇어야 한다는 논리다. 회유와 협박으로 기독교의 지도층 대부분이 일본 신관(神官)이 주도하는 신사 참배 의례에 참여하였다. 민족 정신과 신앙 양심은 그렇게 더럽혀졌다. 불의를 기뻐하지는 않지만, 묵인하였다.
불의를 묵인하는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뻐하는 단계는 무엇일까? 불의를 행하면서 얻는 유익이 클 때이다. 젊은 시절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에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한 윤치호는 후일 조선 총독부 일간지인 매일신보에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며 중일전쟁에 자원입대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일본제국의회 칙선 귀족 위원을 지냈다. 권력 앞에 무릎 꿇으니 부와 명예가 따랐다. 친일 후에 그가 쓴 글을 읽어보면, 그는 불의한 권력을 기뻐하였음이 분명하다. 힘 앞에 굴복한 후 큰 유익이 따른다면 양심이 마비되고 마침내 불의를 기뻐한다.
어디 윤치호뿐이런가? 기독교 지도자 중 친일 하면서 부귀와 영화를 누린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친일에 앞장섰던 곽진근 목사는 44세 젊은 나이에 총회장이 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옥성득 교수의 한국 기독교 역사 블러그). 그들은 불의와 함께 기뻐하였다. 그러면 나는 어떤가? 내가 만일 그 시대에 있었다면, 과연 불의를 기뻐하며 친일에 앞장섰을까? 부끄럽지만, 나의 성향을 살펴보면, 불의를 기뻐하며 호가호위(狐假虎威) 하지는 않겠지만, 불의를 묵인하는 단계까지는 가지 않았을까! 나의 유약함과 죄성을 깊이 반성하며 현실에서는 유약하고 비겁하지 않기를 소망한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 헬라어 원문을 찾아보니 불의는 'adikia'로서 ‘불평등, 불공평, 불법, 잘못, 사악함’이란 뜻을 가진다. 사랑은 내가 당하는 불평등과 불공평과 불법과 잘못을 뛰어넘어 타인(사회,민족)이 당하는 불공평과 불평등과 불법에 대하여 저항하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매우 윤리적이다. 생각만이 아니라 행동을 요구한다.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타인에 대하여, 타민족에 대하여, 사회를 향하여 불의하고, 불공평한 처사에 바른말 하고, 바른 행동을 하는 것이 사랑이다. 그것은 곧 선지자들이 보였던 행동이고 윤리이고 사랑이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사랑은 선지자적 사랑이다.
◈ 배경락 목사는 기독교 인문학 연구소 강연자로, '곧게 난 길은 하나도 없더라' '성경 속 왕조실록' 등의 저자이다. 그는 일상의 여백 속에 담아내는 묵상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인문학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참고자료]
1. 옥성득 교수의 한국 기독교 역사 블러그
https://koreanchristianity.tistory.com/m/447
https://koreanchristianity.tistory.com/m/75?category=818328
2. 일제 강점시 신사참배 관련 신문기사를 보면 특징이 드러난다. 신사참배를 지지했던 지도자층과 달리 일반 백성은 끊임없이 거부하고, 저항하고, 투옥되는 모습을 보인다. 그나마 신사참배를 거부한 종교는 기독교가 유일하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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