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2019년 6월 9일)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교회의 하나인 분당 우리교회 한 부목사의 동성애 관련 설교가 한국 기독교계 뿐만 아니라, 미국 한인 사회에도 전해지며 큰 논란이 되었다. 필자도 몇 해 전 기독일보에 “왜 미국 교회들은 동성애를 허용할까” (2015년 8월 2일) 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한 적이 있기에 논란이 된 부목사의 동성애에 관련 설교에 관심을 갖고 설교를 들어보았고, 또한 그 전문을 읽어 보았다.
부목사의 설교를 비판하는 진영은 그의 설교 중 다음의 부분들을 문제 삼았다. "많은 자료를 찾아봤다. 몇 년의 퀴어 축제, 기독교인들의 반응, 비기독교인들의 반응, 기독교를 바라보는 젊은 사람들의 반응 등 많이 찾아봤다. 결론은, 대세는 이미 넘어갔다는 것이다. 솔직히 언론과 이것을 이용하는 많은 정치인과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인해, 동성애자들을 비난하는 것은 소위 막말로 꼰대들의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이같은 설교 내용을 두고, 특별히 반동성애 운동을 벌여온 기독교 단체들을 중심으로, 그가 동성애를 옹호하고, 동성애를 반대하며 운동을 벌여온 자들을 비하했다며 비판을 제기했다. 당사자인 부목사 뿐만 아니라, 이찬수 담임목사까지 나서 사과하며, 사태를 진화하려고 노력해지만, 여전히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도 그의 표현은 다소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요소들이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진솔하게 사과한 만큼, 이제는 관용과 아량으로 허물을 덮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의도는 동성애를 옹호하거나, 동성애 반대 운동을 벌여온 분들을 비하하는 데 있지 않고, 도리어 반동성애 운동이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한 질문과 도전을 던지는 데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부는 동성애 합법화의 흐름과 주장이 한국에서도 퀴어 축제들을 통해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독교인들이 동성애자들에 대한 극단적 혐오감을 드러내며, 감정적 갈등과 마찰을 빚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도리어 이는 미국의 경우와 같이, 기독교인들이 동성애자들을 차별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사회적 갈등을 조장한다는 비판에 부딪히기 쉽다.
이에 대한 좋은 예가 아마도 프레임 이론일 것이다. 프레임 이론이란, 상대방이 제기한 이슈에 옭고, 그름을 따지며 공방을 주고받게 되면, 상대가 제기한 프레임에 갇혀, 도리어 이슈를 제기한 쪽의 주장만 더 크게 부각될 수 있다는 이론이다. 동성애 자들에 감정적으로 맞서 논쟁하고, 비난하는 일들이 결국 동성애에 대한 관심과 논란만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상대의 이슈에 끌려가지 않는 것이다.
분당 우리교회 부목사도 그의 설교에서 이러한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말로써 그 사람들 막으면서 너 그러면 지옥 간다라는 저주가 아니고, 정상적이고도 너무 행복한 부부 관계,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의 바로 그대로의 성. 행복한 가정생활로도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라는 것을 보여 주는 크리스천의 삶. 이것이 대안이고 이것이 희망이라고 저는 믿는다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동성애자들이 제기하는 프레임에 갇혀 찬반 논쟁으로 상대의 이슈에 끌려가기 보다, 도리어 기독교인의 건전한 성,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행복한 가정 생활을 말이 아닌,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 도리어 동성애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하는데 더 큰 능력이 있다는 점이다.
이와 함께 부목사는 기독교인들이 동성애라는 문제에만 몰두한 나머지, 우리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며 돌아보지 않는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점을 지적한다. “성경에서, 동성애를 언급하는 횟수보다, 탐욕에 대해서 경고하고 이야기하시는 횟수가, 열배 가까이 더 많다는 사실을, 여러분 아십니까? 그런데 우리는, 탐욕 하는 문제에 대해서 길거리에 드러눕고, 시위하고, 분노하고 하지 않습니다. 왜 일까요? 우리가 탐욕을 인정하고 추구하며 살아가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분당 우리교회 부목사가 설교를 통해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중세 마녀 사냥하듯 동성애자들을 큰 대역죄인으로 취급해서도 안되고, 우리가 마치 그 보다 더 낫다는 교만함을 가져서도 안된다는 것이었다.
종교 개혁가 루터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죄인된 모습으로 서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언제나 심판자의 모습으로 서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생각과 방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 하고, 자신의 죄된 모습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사람의 죄를 지적하고 정죄하기를 더 즐긴다. 루터는 그 이유가 인간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 언제나 다른 사람의 죄를 드러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사람은 이 죄를 짓고 저 사람은 저 죄를 지었어라고 말하기는 쉽다. 정작 자기의 죄를 자백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 말이다”(Table Talk of Martin Luther, CCLIV)
루터의 이러한 고백은 죄를 경중에 따라 구분하는 중세 스콜라 전통에 대한 거부에서 비롯되었다. 중세 스콜라 전통에 의하면, “용서받을 수 있는 죄”(venial sins)가 있는가 하면, “죽음에 이르는 죄”(mortal sins)가 있다. “용서받을 수 있는 죄”(venial sins)는 그 경중이 다소 작은 행위를 저질렀을 때 성립하는 죄를 말하며, 하나님과의 관계에 다소 교란은 일어나지만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는다. 반면에 “죽음에 이르는 죄”는 구원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하나님의 법을 크게 거스른 행위를 저질렀을 때 성립하는 죄를 말한다.
그러나 루터는 죄에 대한 이러한 구분을 거부한다. 루터는 ‘죄’가 성경에서 한 가지 매우 단순한 의미로 사용되지, 여러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 않았다고 말한다. 간략히 정의를 내리자면, “참으로 죄는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하지 않는 것 이외의 그 어느 것도 아니다”(LW 32:195) 라고 말한다.
결국 동성애는 ‘죽음에 이르는 죄’이고, 내가 가진 탐욕과 욕심의 죄된 본성은 ‘용서 받을 수 있는 죄’ 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된 존재이고, 행위에 있어서나 의지에 있어 진실로 죽음에 이르는 죄라고 여길 때만이 죄는 진실로 용서받을 수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막을 길이 없다. 유일한 길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죄 사함을 의지함으로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 기초하여 교회는 한편으로 개인의 자유와 도덕적 진보라는 이름 하에 동성애자들에 대해 관대하라고 주장하는 운동을 거부해야 할 뿐만 아니라, 교회가 소수자를 박해하고 배척해야 한다는 대중적인 반응들에도 분명하게 저항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교회는 동성애에 대한 이해와 연민을 보여 주어야만 하고, 사랑과 목회적 돌봄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가능한 방법으로 그들을 돕고 격려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동성애는 모든 인간이 그렇듯이 인간의 죄된 본성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다른 모든 기독교인을 향해 선포하듯이, 그들을 향해서도 그리스도의 죄 용서와 성령의 능력을 통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선포해야만 한다.
필자는 분당 우리 교회 부목사와 일면식도 없다. 다만 “자신의 지혜 없음과 표현력의 부족 때문” 이라고 진솔하게 사과한 만큼, 이제는 비난과 비판을 넘어, 한 젊은 부목사가 던진 반동성애 운동의 방향성에 대한 질문에 한국 교회가 함께 고민하며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더 바람직하리라고 본다.
◆ 정진오 박사는 루터 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 신학과에서 석사와 박사를 취득했다.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 Research Fellow와 예일 신학대학원 Visiting Scholar를 거쳐 미국 시온루터교회 (LCMS) 한인부 담임목사를 역임했다. 현재는 워싱턴신학교 총장으로 섬기고 있다. 연락은 전화 (미국)618-920-9311 또는 jjeong@facstaff.wtsva.org 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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