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기독일보 김대원 기자] 제16차 북한자유주간 둘째 날, 북한 내 장마당이 위성사진으로 공식적으로 집계된 것이 436개이며 비공식 장마당까지 합치면 1천 개에 육박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이는 북한 내에 정부를 벗어난 시민사회가 형성되고 있다는 의미로 북한의 국가 통제 시스템 약화에 큰 영향을 줄 것이라는 분석이다.
29일 오후2시부터 워싱턴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서 ‘북한 내 여성과 장마당 매커니즘’이라는 주제로 열린 워크숍에서 행사를 주관한 빅터차 교수는 첫번째 세션 '북한 내 시장과 시민사회' 발표 시간을 통해 위성사진으로 분석한 436개의 북한 장마당의 실태를 발표하면서 “북한 시민들이 오직 정부의 통제에 따르기만 하는 것이 아닌 그들 스스로 삶을 결정하게 하게 됐다”고 강조했다.
빅터차 교수에 따르면 CSIS는 기차역이 지역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판단, 북한의 모든 기차역 주변 지역을 분석했고, 기차역과 시장간의 거리를 계산, 장마당의 위치와 개수를 파악했다. 빅터차 교수는 특히 신의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 장마당 형태에 대해 “지역의 중심에서 5-6개로 형성된 주변 시장까지의 거리는 자전거로 30분 거리”라면서 “이는 주민들이 자유롭게 물건의 가격과 품질을 비교하며 선택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빅터차 교수는 “그리고 이는 시장에서의 가격 등 다른 새로운 정보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교류할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고 강조했다.
이어진 발표에서 헤리티지재단의 올리비아 에노스는 북한의 시장이 중요한 이유는 이 시장은 북한 사회의 평등화에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라면서 "북한 당국의 방침에 의하면 결혼한 여성은 가정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더 이상 직장과 일에 대해 보고할 의무가 없다. 북한 여성의 사회와 시장 참여가 활성화될 뿐만 아니라 여성과 정부와의 관계를 완전히 바꿔놓고 있는 것은 놀라운 변화"라고 평가했다.
올리비아 에노스는 시장의 활성화가 가져오는 북한 주민들의 정신적 영향에 대해서도 “드라마나, 라디오, 텔레비전 같은 발전된 테크놀로지 등을 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통해 다양한 대안적인 생각과 관념들을 접할 수 있게 됐다”면서 “북한 주민이 스스로 생각을 정립하고 결정할 수 있는 의지를 심어주기 위해 그것을 좋은 의도로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북한 인권에 관한 책을 집필한 바 있는 미국 카톨릭대 교수 앤드류 여는 "정치학에서 이해하는 시민사회는 국가 안에서 자발적으로 자생해 경제를 발생시키는 조직된 사회이고, 일반적으로 시민사회란 대중적인 두려움을 넘어서 단결된 행동을 행하는 것을 의미 한다"면서 "북한의 통제 안에서는 하기 힘든 일이지만 시장은 정부의 눈을 피해 상호교환과 교류가 이루어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시장에서의 교류는 서로가 신뢰를 바탕으로 거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구조이기 때문에 복잡한 네크워크를 형성하면서 새로운 관계들을 형성하게 된다"면서 "북한에 시민사회가 형성됐느냐고 물으면 정의상 물론 대답은 '아니다' 겠지만 언더 그라운드에서는 그것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앤드류 여 교수는 또 시장의 활성화로 인한 북한의 민간 통제 시스템 약화와 관련, “시장은 북한 사람들에게 시장에 많이 참여할수록 더 많은 수입을 만들 수 있다는 개념을 구축하게 했다”면서 “현재 북한 현지 사정상 당에서 지정해 주는 일을 열심히 한다 해도 월급은 똑같을 것이고 충분치도 않을 것이지만 시장 참여를 통해 노동력과 부의 상관 관계를 알게 되고, 정부를 위해 쏟을 노력과 시간을 좀 더 편하고 쉬운 방법으로 많은 수익을 내는 일로 대체하려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앤드류 여 교수는 “모든 것을 정부에서 배급받던 시대에서 이제는 내가 스스로 삶을 꾸려나가는 시대가 됐다”면서 “여기서 정부가 지속적으로 주입시켜 온 말과 내가 보는 현실에서의 큰 차이를 북한 주민들은 느끼게 되며, 결과적으로 정부에서 말하는 것과 사적으로 생각하는 것 사이에 간극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분석했다.
빅터차 교수는 "시장에서 상인들이 서로 교류하고 상호작용하며 그들만의 법칙을 만들고 지위를 만드는 이 모든 요소들은 시민사회의 형성에 중요한 것이고 미래에 언젠가 북한이 열릴 때에 시민사회의 형성에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면서 "그때는 국제 금융기구나 외국계 회사들이 들어가기 시작할 것인데 현지 언어와 시장 사정에 가장 익숙한 이들, 특히 시장 경제를 작동하게 하고 있는 여성들이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두번째 세션 '장마당에서의 여성' 발표에서는 세 명의 탈북 여성들은 북한의 장마당은 고난의 행군 이후 본격화 됐으며, 국가의 강제 노역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여성들이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시장으로 나선 것이 발단이 됐다고 설명했다. 탈북 여성들에 따르면 현재의 장마당은 북한 경제의 80%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다.
한 탈북 여성은 장마당의 현 실태와 관련 “현재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는 자발적인 소비자 시장, 생산재 시장, 금융 시장, 노동 시장, 주택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면서 “지금은 부동산 중개업을 비롯해 부동산 투기까지 생겨나고 있다”고 밝혔다.
이 탈북 여성은 “지금은 공식적으로 북한 내 시장이 500여 개 정도이고 메뚜기 시장(단속을 피해 옮겨 다니는 시장)까지 포함해서 지금 1000개 정도 된다”면서 “중국 국경지대에서 대량으로 물건을 가져 올 수 있었던 이들은 큰돈을 벌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금융 시장까지 형성됐다. 현재는 환전 사업까지 하는 큰 손들도 출현했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이날 워크숍에서 탈북 여성들이 장마당에 대해 발표한 주요 내용들이다.
[여성 사례 1] 1996년 여름부터 제가 장마당을 처음 경험했다. 배급소에서 쌀을 받아서 살았던 사람들이 주린 배를 잡고 계속 일을 해야 했다. 북한 정책으로서 아내들은 직장이 없어서 집에서 쉬어도 되지만 남자들은 무조건 나가서 일해야 하는 것이 법이다. 그러나 고난이 시작 되면서 나라에서 배급을 하지 않아도 남자들은 일을 해야 했고, 그런 계기로 집에 있는 여성들이 대신 나가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제가 맨 처음 장마당을 경험하게 된 것은 북한의 가뭄이 절정이 됐던 때이다. 저는 당시 중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직장을 갖게 되고 실제 사회가 학교에서 배운 것과 얼마나 다른지 사회주의가 가진 우월성과 가식을 알게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집에 있는 장롱이나 숟가락 젓가락 등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팔기 시작했다. 북한 당국은 처음에는 썩어빠진 자본주의 정신을 뿌리 뽑고 정체성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단속을 했다.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팔던 걸 들고 도망 다녀야 했다. 이런 장마당은 ‘메뚜기 장’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장마당이 점점 활성화 되었고 북한당국은 1999년 사람들이 장마당에서 물건을 팔 수 있게 하였다. 안전부는 대신 자릿세를 받기 시작했다. 당시 제 친구 중에 부모님이 쌀을 구하러 다니다 돌아가셔서 고아가 되어 장사를 시작한 이가 있는데, 싱글 여성은 장마당에서 팔 수 없는 정부의 방침이 있었기 때문에 몰래 장사를 하며 매일 쫓겼고 팔던 물건을 뺏기기도 했다. 결국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한 후에야 장마당에 설수 있었다.
북한에서 유치원에 일했던 저도 주말에 장마당에는 일했다. 푼돈을 겨우 버는 걸로 생계가 어려워 돈을 더 벌기 위해 디젤 오일을 팔기 시작했다. 김정은의 단속을 피해 디젤 오일을 팔았다. 걸리면 사형에 처할 수 있었지만 이윤이 많이 남았기에 사람들이 많이 팔기 시작했다. 저도 디젤 장사를 시작했고, 돈을 많이 벌었다. 하지만 몇 달 뒤 디젤유를 팔던 주민이 사형에 처하면서 주춤하게 되었다. 김정은의 선물을 팔았다는 죄로 사형을 받은 이들도 있다.
[여성 사례 2] 1997년 담배장사를 하면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삶을 살았다. 중국에서 넘어오는 담배를 남자들에게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다. 마음을 놓고 장사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담배 파는 행위가 발각되면 경찰들이 물건을 회수하고 막았기 때문에 경찰 눈을 피해 장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지정된 장마당에서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못하고 역전을 돌며 하루하루 살았다. 이미 북한은 돈 있는 사람만 살아 갈 수 있는 사회로 흘러가고 있었다.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남성보다 여성들이 활성화 되어 있다는 것이다. 부녀자들은 다른 곳에서 쌀과 음식을 받아 그것을 팔아 하루하루 장사하며 살았다. 다만 마음 놓고 팔 수 없다. 경찰들이 물건을 회수하고 돈도 다 빼앗아갔다. 항상 경찰 눈을 피해야 했다. 물건과 돈을 빼앗기면 집안이 굶는 것이 생활이었다. 북한 여성들은 강해져야 했던 현실이다. 다만 경찰들에게 뇌물을 바치고 살아야 해야 했다. 바칠 뇌물이 없으면 하루하루 어렵게 살아야 했다. 또한 도둑들이 많아서 물건을 빼앗기기도 했다. 마음 놓고 장사하는 그날이 오길 소망하면서 살았다.
[여성 사례 3] 2003년 7월 제가 탈북 할 때도 장마당이 있었는데 최근 북한의 장마당에서 판다는 물건들을 보고 깜작 놀랐다. 저는 북한에 살 때 계급적 토대가 좋아 유치원부터 중고등학교까지 당의 보호로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살았고 충성을 다짐했었다. 그러나 300만의 북한 주민이 굶어 죽자 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고난의 행군이 자본주의를 북한 주민들에게 심어준 계기가 됐다. 김일성의 죽음은 그도 인간이구나 김정은도 언젠가는 죽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었다. 94년부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70, 80년대는 농토산물 시장 밖에 없었다. 당시 시장은 아무 볼거리 없는 곳이었다. 그러던 1995년 고난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이 시장의 가치를 알아가고 굶어 죽는 집들이 늘어나고 동네에는 술장사와 두부를 만들어 파는 자들이 많아졌다. 여성들이 집에서 만든 식량을 역 근처에서 파는 것을 계기로 시장이 커지기 시작했다. 가족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식량을 바꿔가는 물물교환이 이뤄지기도 했다. 처음에는 돈이 될 수 있는 집안의 물건을 팔다가 기차를 타고 팔 물건을 구하러 다녔다. 더 나중에는 바다에서 싼 물고기를 사서 비싸게 팔았다. 여성이 가족의 생계를 위해 움직였다.
중국 국경지대에서는 친척방문을 구실로 보따리 시장에서 도매로 물건을 사서 파는 장사꾼들이 늘어났다. 이 때부터 없는 것이 없는 시장이 되었고 자본주의 시장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북경에서부터 들어오는 물건들을 운송하는 장사꾼들이 늘어나는데 중국물건을 가득 채워왔다가 또 갈 때는 지역 특산물인 말린 오징어 같은 물건을 가지고 가는 식이다.
저를 놀라게 한 것은 죽도 없어 못 먹던 친구 집이 몇 년 후 그 엄마가 장사를 하고 오빠가 밀수를 시작하자 생활이 가능하게 된 것이었다. 처음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시작한 엄마들의 장사로 돈의 유익을 알게 됐고 이에 대한 욕구가 생기고 돈이 돈을 낳는다는 정신을 갖게 됐다. 당시 장사는 불법이었기 때문에 장사를 하면 체포해 갔다. 그러나 경찰도 먹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나중에 비리를 뇌물을 받고 눈감아주는 범죄의 나라로 변화됐다. 장마당을 막을 수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들을 통제해야 하는 경찰들이나 공무원들도 배고팠기 때문이다. 현재 북한에는 소비자 시장, 생산재 시장, 금융 시장, 노동 시장, 주택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이 국가가 합법적으로 허락한 것은 아니고 은근슬쩍 눈감아 준 것이다. 국가 소유의 집에서 살던 사람들이 돈을 받고 국가 몰래 집을 사고 팔면서 지금은 부동산 투기나 중개업 및 숙박업이 성행하고 있다.
생산제 시장은 수많은 중국의 원단들로 해서 시작됐다. 주민들은 옷과 커튼 등이 필요로 했고 디자이너들은 원단을 미싱 하는 여자들을 시켜 옷을 만들고 신발을 디자인 하면서 시장이 활성화되었다.
2002년 7월 시장 관리소가 생겨나고 북한은 장사꾼들에게 자리세를 받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시장이 이제는 80%의 북한 경제를 담당할 만큼 확산되어 있다. 지금은 공식적으로 시장이 500개 정도이고 메뚜기 시장까지 포함해서 지금 1000개 정도 된다고 한다.
처음에는 보따리 장사를 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물건을 화물차로 나르는 일꾼들을 고용하기도 한다. 국가의 운송수단을 믿을 수 없던 사람들은 물건을 경쟁자들보다 더욱 빨리 운송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화물을 운송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만들어낸 버스와 택시가 운영되기 시작했다.
중국 친척의 물건을 도매로 팔아주던 자들은 이제 물주가 되어 있고 그들을 중심으로 금융시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북한에서 물건을 팔고 중국으로 돌아가려면 중국 돈으로 환전해야 하는데 개인들이 주변에서 환전을 시작했고 이들이 북한의 재벌로 성장했다. 그들은 앉은 자리에서 돈을 바꿔주면서 신용사업을 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북한 최고 대학이라 불리는 김일성대학에 입학했다. 입학하면서 돈의 용도에 대해 또 권력에 대해 사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돈이 사람을 만들고 직업을 만들었다. 간부의 자식이 90% 대부분인 우리 대학생들은 배고픔도 몰랐고 죽을 먹어 본 사람들이 없었다. 죽어가는 북한의 주민들이란 그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방학에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놀란 것은 국경이었던 고향의 시장이 활성화 되어 있었고, 장사를 하던 사람들이 물주가 되어 있었다. 가족 배경이 안 좋아 대학도 못 갔던 친구는 장사를 시작해 아파트까지 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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