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실태
제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유원지에 가면 뿅 망치를 가지고 열 몇 개의 구멍으로부터 튀어 나오는 두꺼비 머리를 때려서 집어넣는 놀이기구가 있었습니다. 이 놀이기구의 특징은 한 구멍에서 튀어 나오는 두꺼비 머리를 때려서 집어넣으면 옆 구멍에서 튀어 나오고 옆 구멍에서 튀어 나오는 두꺼비 머리를 때려서 집어넣으면 조금 있다가 그 옆 구멍에서 튀어 나오고 이것을 때려서 집어넣으면 다시 처음 구멍에서 다시 튀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두꺼비 머리는 끊임없이 튀어 나왔습니다. 그 이유는 아예 놀이기구 안에 두꺼비 머리를 집어넣으면 잠시 딸깍하고 멈추었다가 다시 튀어 나오게 하는 자동기계장치가 내장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유사한 현상이 동성애와 동성혼의 합법화를 시도하는 차별금지법안 제정 시도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2007년 10월 노무현 정권 당시 법무부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에 따라서 차별금지법안을 입법예고했는데, 이것이 한국 사회에서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법안은 동성애를 이성애와 다름없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성적 지향으로 정의한 후에 동성애를 왜곡된 성행위로 비판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동성애자에 대한 고용상의 차별을 금지시킨 다음에 이와 같은 규정들을 어길 경우에는 법적 처벌을 받도록 했습니다. 이 법안은 기독교계의 거센 비판 때문에 폐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로써 차별금지법 제정시도가 종결된 것이 아닙니다. 2011년 12월에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 등 10명이 재차 차별금지법 제정을 시도하다가 무산되었고, 2012년 11월 통합진보당 김재연 의원 등 10명이 재차 차별금지법 제정을 시도하다가 무산되었고, 2013년 2월에 민주통합당 김한길 의원 등 51명이 재차 차별금지법 제정을 시도하다가 무산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몇 차례 차별금지법 제정 움직임이 있었으나 현실화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최영애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은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겠다는 의지를 다시 천명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차별금지법 제정이 여의치 않자 아예 전통적인 성(sex) 평등 사회를 젠더(gender) 평등 사회로 개혁하겠다는 의지를 선거공약에 담아 발표하였고, 동성애와 동성혼을 헌법 차원에서 합법화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하고 바로 추진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계의 강력한 반발로 인하여 이 시도는 무산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동성애와 동성혼을 합법화하는 운동은 중단되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기독교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2017년에 만료된 국가인권계획(National Action Plan)을 대체하여 향후 5년간 국가의 정책을 지도할 새로운 국가인권계획안을 2018년 8월에 통과시켰습니다. 이 국가인권계획안에는 동성애와 동성혼과 관련하여 차별금지법에 담겨 있는 내용과 동일한 내용이 권고사항으로 담겨 있습니다. 내년부터는 정부의 모든 정책을 추진할 때 이 권고안을 반영해야 합니다.
또한 현 정부 산하 지방자치단체들은 지속적으로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해 나가고 있고 현재 전국의 지방자체단체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했는데,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면 사실상 차별금지법안이 발효된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학생인권조례는 매우 교활한 조례안입니다. 제가 어느 지방자치단체의 학생인권조례안을 검토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이 조례안은 조례안의 시(市)인권위원회를 두고 시인권위원회가 조례안을 집행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시인권위원회는 설립 되자마자 바로 국가인권위원회의 산하기관이 되고 국가인권위원회의 지시를 받게 됩니다. 둘째로, 시인권위원회는 시의 감독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도록 되어 있으며 시인권위원회에서 논의한 모든 내용들은 대외비로 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시인권위원회가 논의하고 결정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국가인권위원회를 제외하고는 어떤 시차원의 기관도 알 수도 없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습니다. 셋째로, 조례안에는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보호 한다"고만 되어 있을 뿐, 동성애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 조례안이 차별금지법이 되는가? 문제는 조례안에는 사회적 약자라고만 되어 있을 뿐 누가 사회적 약자인가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 사회적 약자의 범주에 대해서는 다른 규정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어떤 기관의 도움을 받는가? 여기서 시인권위원회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산하 기관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조례안이 명시하지 않은 규정은 상위 기관인 국가인권위원회법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국가인권위원회법은 인권보호의 대상으로서 19가지 대상을 나열하고 있는데 이 안에 "성적 지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법은 성적 지향을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은 이성애나 동성애를 근거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적 지향을 근거로 고용상의 차별을 하지 못하며, 동성애에 대한 혐오발언 등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규정을 준수하지 않을 경우 조사 및 수사기관에의 수사 의뢰 등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상위규정들이 그대로 학생인권조례안에 들어옵니다. 그러면 학생인권조례 그 자체에는 동성애에 대한 언명이 없어도 바로 차별금지법이 됩니다.
그런데 초중고등학교 성교육 현장은 문제가 더 심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현재 중학교에서는 세 가지 성교육 교안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학교 성교육표준안입니다. 이 표준안의 내용은 전통적인 성교육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표준안에 대하여 줄기차게 비판이 가해지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양성평등 기본법입니다. 이 기본법의 이름은 남녀평등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젠더 평등이 상당 부분 그 내용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성인지적 성교육입니다. 성인지 성교육은 100% 젠더 평등 교육안으로서 동성애와 이성애를 동등한 차원에서 가르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미 우리나라 초중고등학교에서 동성애 합법화교육이 실행되고 있으며, 이 교육을 받으면서 초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우리의 아이들에게는 동성애가 잘못된 성애라는 말이 낯설고 이상하게 인식되도록 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이 아이들이 자라서 성인이 되었을 때 우리나라 국민들의 성인식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이처럼 동성애 합법화 시도가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는 이유는 그 배후에 이 강력한 이데올로기적인 시대사조가 자리 잡고 있고, 이 시대사조의 후원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사조로서 저는 세 가지를 지적하고자 합니다. 하나는 철학적 배경인 신마르크스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적 배경인 후현대주의적 상황윤리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신학적 배경인 퀴어 신학입니다.
2. 철학적 배경: 신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사회를 소수의 부르조아 계급이 다수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착취하는 사회로 분석한 후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자의식적인 혁명을 통하여 부르조아 계급을 축출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지배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추구한 이상적인 사회는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회는 처음부터 실패로 끝날 운명을 안고 탄생한 유토피아였습니다. 사람들은 능력을 다하여 일하면 가능한 한 많은 보상을 얻으려고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능력을 다하여 일하고 나서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기 위해서는 이타적이라야 하는데, 사람들은 그 정도로 이타적일 수가 없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이 가지지 않은 능력 위에 사회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이타적인 아닌 인간으로 하여금 능력만큼 일하게 한 다음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게 하기 위해서는 전무후무한 국가의 독재적인 강제력이 동원되어야 했고, 강제력이 동원되자 사람들은 능력만큼 일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창의성은 죽었고 생산성은 하락하여 경제가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실험은 100년을 버티지 못하고 1992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는 상징적인 사건을 전후하여 실패로 끝났습니다.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는 데 실패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새로운 사회변혁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모든 행동의 추동력은 성적 충동에서 나오는 것이며, 성적 충동은 윤리적으로 통제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파악한 프로이드의 성 심리학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부르조아 계급에 이성애자들을 대입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동성애자들을 대입한 후에 현존하는 사회의 문제는 이성애자들이 동성애자들을 억압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이상적인 사회는 이성애적 규범으로부터 해방되어 동성애자들이 자유롭게 성관계를 가지는 사회였습니다. 이것이 신마르크스주의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떤 개인이 현실 속에서 실현이 불가능한 어떤 목표를 실현하고자 하면 신경질적인 강박증에 사로잡히기 마련인 것처럼,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일종의 집단 강박증에 사로잡혀 구소련에서 2000만 명, 문화혁명에서 7000만 명을 잔인하게 죽이면서까지 꿈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사실상 동성애는 도덕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나 의료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유토피아입니다. 동성애는 성경이 말하는 규범뿐만 아니라 인류 보편의 도덕적 규범에 어긋나며, 생물학적으로 볼 때 생식기관과 배설기관의 만남이라는 생물학적 상식에 반하며, 의료 보건적으로 볼 때 각종 성기와 장기와 관련된 심각한 감염을 피해 갈 수 없는 위험한 성적 관행입니다. 동성애를 하면서 건설할 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는 없습니다. 이처럼 적어도 서구사회 안에서 신마르크스주의적인 성해방운동이 하나의 시대사조로서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실현 불가능한 성해방사회를 이루고자 하는 강박증이 납득이 안 될 정도로 집요한 동성애 합법화운동의 배경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다수의 국민들의 정서가 반대하는 대도 불구하고 거듭하여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려는 시도, 헌법에 동성애와 동성혼 허용조항을 집어넣으려는 시도, 인권위원회를 헌법기관으로 격상시켜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위에 두려는 비상식적인 시도, 학생인권조례의 차별금지법화, 초중고등학교의 젠더교육, 동성애에 대한 모든 비판을 차단하는 보도지침,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국가인권위원장을 모두 동성애친화적 인사로 의도적으로 배치한 조치 등과 같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동성애 합법화운동은 그 전략과 방법론에 있어서 마르크스주의적이고 혁명적인 해방운동이며, 일종의 강박증으로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성에 대한 이성애적 규범이 철폐된 유토피아적인 사회을 꿈꾸는 것은 진정한 이상사회를 향한 인류의 잠재된 욕망의 병적인 표현입니다. 교회는 이와 같은 병적인 욕구의 분출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교회는 이성애적 규범이 철폐된 사회는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분석하여 비판하면서 참된 이상사회는 성경이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임을 설득력 있게 선포할 필요가 있으며, 이것이 가장 강력하고 근원적인 대응책입니다. 특히 마르크스가 등장하여 활동을 시작한 본거지가 영국이었고, 당시 영국은 빈부의 격차가 극심한 사회로서 사실상 마르크스 혁명이 터질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존 웨슬리가 등장하여 성령의 힘과 강력한 복음을 들고 탄광과 노동자들 속으로 뚫고 들어가 복음의 소망으로 이들을 위로하고 끌어 들이는 일에 성공했기 때문에 영국이 폭력혁명의 마수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됩니다.
3. 윤리적 배경: 후현대주의적 상황윤리
고대 희랍철학에서 세계를 해석하는 방법에는 두 흐름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파르메니데스의 정의 철학이고, 다른 하나는 헤라클리토스의 생성의 철학입니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는 생성도 소멸도 하지 않는 상태로 영원히 있는 것이라고 파악했습니다. 이에 반하여 헤라클리토스는 만물은 영원한 흐름 즉, 끊임없는 운동과 변화 안에 있다고 파악했습니다. 철학의 역사라는 진자는 정의 철학과 생성의 철학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근대철학의 흐름을 보면 계몽주의 시대는 이성이 사유의 중심이 되면서 이성을 통하여 변하지 않는 영구적인 형이상학의 수립이 가능하다고 본 정의 철학의 시대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를 모더니즘 곧 현대주의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철학적 윤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19세기 말 직각론(intuitionism)과 정서론(emotivism)이 등장하면서 진자는 생성의 철학의 방향으로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직각론에서는 이성적 사유가 아닌 직관이 진리 또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척도가 된다고 보았고, 정서론에서는 직관은 곧 정서 또는 감정을 의미하므로 감정에 근거한 직관적 판단이 진리 혹은 옳고 그름의 척도가 된다고 파악했습니다. 그런데 직관이나 감정은 극히 주관적이고 각 사람마다 다 다른 것이므로, 직관이나 감정이 판단의 척도가 된다면 이제는 보편적인 진리나 규범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진리나 규범은 각 사람들 마다 다 다른 것이며, 공동체마다 다 다른 것이며, 시대마다 다 다른 것이라는 상황윤리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철학적 윤리학의 사조의 영향을 받아 현대 성윤리는 두 가지를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는 성정체성은 생물학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주관적인 인식에 따라서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주관적인 인식에 따라서 성정체성이 결정된다는 말은 성정체성은 생물학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라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생물학적으로는 남자이지만 여자로 자신을 규정하고 싶으면 자신의 성정체성은 여자가 되는 것이고, 여자이지만 남자로 자신을 규정하고 싶으면 자신의 성정체성은 남자가 되는 것이고, 남성와 여성을 오가고 싶으면 자신의 성정체성은 양성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젠더(gender)의 기본뜻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와 같은 성정체성의 규정에 자연스럽게 뒤따라오는 결론으로서 이성애적인 규범으로부터 성관계를 해방시켜 이성이나 동성이나를 불문하고 자유롭게 성관계를 가질 수 있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동성애자들은 성정체성과 관련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이성애적 성향을 타고난 사람들도 있지만 동성애적 성향을 타고난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선천적으로 이성애적 성향을 타고난 사람은 주관적인 인식에 있어서도 이성을 향하여 사랑을 느끼지만, 선천적으로 동성애적 성향을 타고 난 사람은 주관적인 인식에 있어서도 동성을 향하여 사랑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동성애자들은 세 영역에서 연구를 수행 또는 위탁한 후에 결과물을 가지고 동성애는 유전자, 뇌의 구조, 호르몬에 의하여 선천적으로 결정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알려진 과학적 연구들은 모두 재현에 실패했든지, 통계조작임이 드러났든지, 아니면 해석을 잘못 했음이 다 드러나서 지금은 이런 주장을 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만일 유전자에 동성애적 성향이 내재해 있다면 일란성 쌍둥이의 경우에 한 쪽이 동성애자이면 다른 쪽도 100% 동성애자라야 하는데, 실제 일치율은 20% 이내에 불과했습니다. 게다가 동성애를 유발한다고 알려진 유전자 X28은 실제로는 동성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유전자임이 밝혀졌습니다. 동성애자의 뇌의 시상하부와 이성애자의 뇌의 시상하부의 크기가 다르다는 점이 동성애의 선천성의 근거로 제시되었으나 시상하부는 동성애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남성 동성애자의 경우에 여성 호르몬이 많이 분비되고 여성 동성애자의 경우에 남성 호르몬이 많이 분비된다는 주장이 제시되었으나 호르몬은 성정체성의 결정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동성애자들은 또한 동성애가 죄라는 비판을 피해 가기 위하여 동성애를 비판하고 있는 성경구절들을 아전인수격으로 재해석하여 성경은 동성애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거나 동성애를 용인한다는 주장을 전개했습니다. 이들은 동성애를 금지하고 있는 레위기18장22절을 신약시대에는 문자적으로 적용되지 않는 의식법에 속한 규정이라고 해석하거나 일반적인 동성애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전 안에서 행해지는 이방신숭배절차 가운데 하나를 가리킨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의식법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여 적용되는 도덕법으로 보아야 합니다. 구약시대에 의식법을 범한 경우에는 며칠 동안 격리하는 정도의 처벌을 받았으나 도덕법을 범한 죄에 대해서는 형사 처벌을 받았던 반면에 동성애를 범한 죄는 사형의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또한 동성애자들은 로마서1장26절과 27절에 있는 순리와 역리는 특정한 사회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인류 보편의 죄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로마서1장에서 3장의 문맥에서는 순리는 이성애를, 역리는 동성애를 가리키는 것이 자연스러운 해석입니다. 또한 동성애자들은 동성애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본문인 고린도전서6장9절에 있는 "남색하는 자"를 남성창부로, "탐색하는 자"를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로 해석하고 있으나, 전자는 남성 동성애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하는 자, 후자는 수동적인 역할을 하는 자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바른 해석입니다.
성정체성을 인간의 주관적인 의식에 따라서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응하여 교회는 성정체성은 인간이 자의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질서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인간을 남자 아니면 여자로 결정했으며, 하나님이 정하신 이 질서는 인간이 자의적으로 바꿀 수 없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강조해야 합니다. 이 창조질서에 근거하여 성관계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그리고 결혼관계 안에서만 합법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임을 지속적으로 강조함과 동시에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규범을 거스르는 심각한 죄임을 지속적으로 강조해야 합니다. 특히 소돔과 고모라 사건이 명확히 보여 주는 것처럼 동성애는 공동체의 존망을 결정하는 죄임을 강조해야 합니다. 동성애가 편만한 나라는 하나님의 분노를 사게 되고 망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함과 동시에 특히 동성애를 어정쩡하게 허용하는 교회는 해체된다는 점을 주지시켜야 합니다.
4. 신학적 배경: 퀴어 신학
이미 살펴 본 것처럼 동성애 합법화 운동이 집요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이 운동이 사회변혁 이데올로기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성애를 둘러싼 논쟁과 싸움은 궁극적으로는 이데올로기의 싸움인데, 동성애 진영에서 가장 눈에 거슬리는 영역이 바로 정통신학입니다. 그 이유는 정통신학의 체계 자체가 강고한 반동성애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통신학이 건재하는 한 동성애 진영은 항상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동성애 진영은 정통신학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는데, 이 공격이 퀴어 신학(Queer Theology)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퀴어 신학은 신학방법론에 있어서 슐라이에르마허에게서 시작된 자유주의신학의 전통을 그대로 채용하고 있는데,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유주의신학의 한 분파가 퀴어 신학입니다.
퀴어 신학은 어떤 점에서 자유주의신학의 방법론을 채용했는가? 칸트의 비판철학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가 말하는 초월적인 주제들 - 영생, 하나님, 심판, 부활, 내세 -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난감한 청중을 맞이한 19세기 말의 신학자들은 두 가지 길 앞에 서서 고민에 빠졌습니다. 하나의 길은 초월적인 주제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청중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설득하여 초월적 주제들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길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이 방법은 너무나 힘들게 느껴졌고 낡은 방식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다른 하나의 길은 현대인의 논리와 감성에 맞추어 전통적인 교리들과 성경의 내용들을 재해석하고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초월"에 있었기 때문에 이 길은 결국 전통적 교리들과 성경의 내용들로부터 초월적인 것들을 모두 삭제하든지 세계내재적인 주제들도 다 바꾸어 버림으로써 현대인들이 친근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 신학자들은 첫 번째 길을 버리고 두 번째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처럼 현대인의 기호에 맞추어서 자유롭게 교리와 성경을 바꾼다는 의미에서 이들의 신학을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부릅니다. 슐라이에르마허가 물꼬를 튼 이후에 슐라이에르마허를 포함하여 스트라우스, 리츨, 트로엘취 등의 구자유주의자들, 바르트, 불트만, 틸리히, 라인홀드 니버 등의 신정통주의자들, 본회퍼, 로빈슨, 하비 콕스, 몰트만, 해방신학, 여성신학 등의 신자유주의, 오그덴 등의 과정신학과 같은 다양한 학파들은 서로서로 특징의 차이는 있지만 슐라이에르마허가 채택한 방법론을 따른 학파들입니다.
퀴어 신학도 이 방법론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습니다. 퀴어 신학은 신마르크스주의와 후현대주의적 상황윤리의 영향을 받아 동성애를 정당화하는 새로운 성윤리를 주장하는 새로운 시대사조에 아부하면서 이들의 기호를 신학적으로 맞추어 주기 시작했습니다.
퀴어라는 말은 낯설다는 뜻입니다. 퀴어 신학자들은 전통적인 신학적 주제들이 사람들이 보기에 낯선 면모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예컨대 성관계도 갖지 않았는데, 아기가 태어난다든지(동정녀 탄생), 여호수아가 명령하자 해가 중천에 머무른다든지,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다든지, 죽은 몸이 부활한다든지 - 하는 등등의 교리들이 모두 평범한 상식을 가진 일반인들의 눈에는 낯설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통신학자들의 눈에 낯설게 보이는 동성애도 "낯설음"이라는 공통된 특징이 있으므로 정통신학의 당당한 주제들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시켜 놓고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에 대한 독신(瀆神)적인 해석들을 감행합니다. 동정녀 탄생의 경우에, 마리아가 남성과 성관계를 가진 일이 없기 때문에 아기 예수님에게는 여성인 마리아의 성분만이 들어갔으므로 예수님은 외형상으로는 남성이지만 내용은 여성인 자웅동체라고 주장합니다. 자웅동체이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 여성화되신다고 합니다. 그 증거가 바로 옆구리에 난 상처인데, 이 상처는 여성의 성기이며,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액체는 여성의 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액체라고 해석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남성과 여성 사이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몸으로 변화되었으며, 신자들이 세례를 받을 때 신자들의 몸도 예수님의 몸처럼 남성과 여성 사이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유동성이 있는 몸으로 변화되며, 성찬 시에는 유동성을 지닌 예수님의 몸과 연합되어 확실하게 남성과 여성 사이를 오갈 수 있는 몸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퀴어 신학에 대하여 교회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퀴어 신학은 교회가 용인할 수 있는 다양한 신학 분과들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퀴어 신학은 성경과 교리에 대하여 다른 어떤 이단보다도 더 파괴적인 해석을 자행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구속사건을 외설적으로 왜곡하여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사실상 성령 훼방죄를 범하는 신성모독적인 신학입니다. 교회는 퀴어 신학을 단호하게 비판해야 하며, 이에 대응하여 정통신학을 선명하게 천명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마리아가 남자와 성관계를 갖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기적적인 작용에 의하여 성관계를 가진 것과 똑같은 과정을 거쳐서 남자아기를 출산한 사건으로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상처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셨다는 죽음의 증거일 뿐, 여성의 성기가 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썩지 않는 새 몸이지만 성정체성이 반대의 성으로 변하는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신자가 세례 - 성령세례 - 를 받을 때 속사람이 거듭나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지 성정체성이 바뀌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성찬 시에 성정체성이 유동적인 된 예수님의 몸과 연합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떡을 떼고 잔을 마실 때 영으로 임재하시는 예수님과 연합되는 것입니다.
현재 문재인 정부의 주도 하에 진행되고 있는 동성애 합법화 운동은 특히 복음주의 전통의 교회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게 될 것입니다. 이미 이 운동은 자라나는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을 세뇌시키기 시작함으로써 전도와 바른 윤리교육에 심각한 장애가 되기 시작하고 있으며, 이 운동이 성공하는 경우 교회에서 동성애를 비판하는 설교를 할 수 없는 때가 올 것이며, 동성애자를 목사로 임직시키거나 직분자로 임명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때가 올 것입니다. 이미 한국 대학교나 중고등학교에서는 동성애비판을 사실상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운동이 성공을 거두면 그것으로 이 운동이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운동은 바로 타종교혐오금지법으로 연결되어 교회의 전도와 선교를 법으로 금지시키는 단계로 옮겨 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 단계에서 교회들이 연합하여 사력을 다하여 동성애 합법화 저지 운동에 나서야 하는 이유입니다.
/자료제공=한국복음주의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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