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한가위를 맞아 여러분의 가정에 더 큰 평화와 기쁨, 그리고 행복이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오늘 성서일과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찾아보려고 애썼지만 능력부족으로 제대로 읽어 내지를 못했습니다. 무리해서 추론해 본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떤 모습으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시사해 주는 구절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참된 행복은 주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라는 말씀과, 한 남자의 아내로서, 자녀들의 어머니로, 사회의 유능한 지도자로, 마치 슈퍼우먼처럼 그려진 여성의 이야기, 변화산의 체험과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주님의 말씀이 거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더 크냐는 낮은 수준의 다툼에 머물러 있는 제자들의 모습,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지녀서 선한 열매를 맺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분쟁과 탐욕으로 채워진 안타까운 모습들을 들여다 볼 뿐입니다. 몇 주째 이어진 설교를 통해 우리가 함께 고민하고 탐색해온 인간의 선한 의지와 악덕목록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메시지를 또 만나게 됩니다.
내일이면 한가위 명절, 추석입니다. 흩어졌던 가족들이 함께 모여 오순도순 이야기 꽃을 피우고 동기간의 진한 정을 나누는 명절, 풍성한 추수의 계절에 맞는 추석은 더 푸근하게 느껴지는 그런 절기입니다. 애초에 이런 이야기들을 정리하여 우리들이 가정이나 사회에서 어떤 가치나 규범을 토대로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지를 고민해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 며칠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현실들, 남북 정상 간의 실질적인 종전 선언과 민족의 평화와 번영을 만들어내는 대 사변적 뉴스들이 도무지 이런 이야기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다행히도 오늘의 성서일과 말씀을 읽는 중에 야고보서 3장 18절, "정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평화를 위하여 그 씨를 뿌려서 거두어들이는 열매입니다."라는 말씀에 꽂히게 되었고, 이 말씀을 붙들고 다소 긴 사색의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결국 "평화의 씨앗 - 정의, 행복"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2. 평화, 평화를 만드는 사람
지난 며칠간 우리의 시선과 관심은 온통 평양과 백두산에서 벌어진 남북 정상 간의 일거수일투족, 그들의 입으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가 담아내는 의미에 집중했습니다. 겉으로 표현되는 말의 명시적 의미(denotation)뿐 아니라, 그 안에 내포하고 있는 언외(言外)의 의미(connotation)까지를 읽어내려는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물론 말의 내용 이상으로 전달되는 다양한 그림들, 그런 장면만으로도 충분한 메시지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 만큼 이번 회담이 갖는 무게가 우리의 삶뿐만이 아니라, 우리 자손들의 미래의 삶과도 직결되어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과연 한반도에서 전쟁의 위험이 완전히 사라지고 항구적인 평화의 길이 열릴 수 있느냐는 여부가 달려있다고 믿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었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실질적으로 남북 간 종전선언이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전쟁과 그 위협에 기대어 서있는, 안타깝게도 역사의 도도한 물줄기를 거스르는 세력들이 상존하고 있는 것도 현실입니다. 냉전과 갈등, 위협과 대결에 의지해 기득권을 확대 재생산해오면서, 체제에 안주해온 극우주의자들의 반발이 어떤 모습으로 어깃장을 놓을지 궁금합니다. 6.25를 살아왔고,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처절한 생사의 투쟁과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수없이 목도했던 흔적과 기억이 온몸에 배여 있는 저와 같은 사람들은 이번 남북 간의 합의와 그 결과물들이 더 예사롭지 않습니다. 전쟁과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소모되는 천문학적 비용은 외면하고, 그 비용의 몇 십분의 일도 안 되는 통일 및 평화비용을 트집 잡는 접근자체가 그저 안쓰러울 뿐입니다. 내년도 정부가 제출한 국방예산의 규모가 47조원에 이릅니다. 뿐만 아니라 내년부터 2023년까지 국방개혁에 소요되는 예산이 270조원입니다. 이런 규모의 국방예산은 일부 연구기관들에서 통일비용으로 추산하는 규모의 금액을 뛰어넘는 액수라고 판단됩니다. 우리 경제규모나 민간 기업들의 여력에 비추어보거나 평화체제로 얻어지는 투자수익 등을 고려하면, 지금껏 제시되는 통일관계 비용이 그렇게 큰 부담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러 모양의 몽니를 드러내는 볼멘소리를 꽤나 듣고 참아내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성서의 말씀으로 돌아가 봅니다. 먼저 예언자 미가의 외침을 불러내 봅니다. 미가서 4장 3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원근 각처에 있는 열강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 이것은 만군의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다."
5장 10절 이하에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나 주가 선언한다. 그 날이 오면, 너희가 가진 군마를 없애 버리고 말이 끄는 병거를 부수어 버리겠다. 너희 땅에 세운 성곽들을 부수어 버리고, 요새들은 모두 파괴하여 버리겠다." 전쟁과 갈등의 시대를 마감하고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지는 세상을 선포하는 이 말씀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평화의 나라를 노래하는 이사야의 말씀을 이어서 읽어봅니다.
이사야서 11장 3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그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다.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만 재판하지 않으며, 귀에 들리는 대로만 판결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을 공의로 재판하고, 세상에서 억눌린 사람들을 바르게 논죄한다. 그가 하는 말은 몽둥이가 되어 잔인한 자를 치고, 그가 내리는 선고는 사악한 자를 사형에 처한다. 그는 정의로 허리를 동여매고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는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 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이사야 52장 7절, "놀랍고도 반가워라! 희소식을 전하려고 산을 넘어 달려오는 저 발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복된 희소식을 전하는 구나." 이사야가 바라본 평화의 나라, 평화와 함께 이루어지는 정의의 구현, 이런 세상을 꿈꾸는 것은 우리들의 오랜 바람이 아니었나요?
신약의 말씀으로 이어가 봅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입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그분은 오셔서 멀리 떨어져있는 여러분에게 평화를 전하셨으며,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진정한 평화를 이루신 예수의 삶을 고백하고 따르는 것입니까? 평화와 화해를 온 몸으로 풀어내는 사명을 다짐하고, 실제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순간순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오늘의 성서일과 중 야고보서와 마태복음의 말씀으로 옮겨가봅니다.
야고보서 3장 18절의 말씀입니다. "정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평화를 위하여 그 씨를 뿌려서 거두어들이는 열매입니다."
마태복음 5장 9절,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산상설교, 복 있는 사람 중 하나로 평화를 만드는 사람에 대한 예수의 말씀입니다.
평화(είρήνη)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 평화를 만드는 사람(είρηνοποιός)에 의해 구체화되고 실현됩니다. 평화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뿌린 씨와 그들의 끈임 없는 노력과 희생으로 얻어지는 결과물이지, 공짜로 얻을 수도 없고, 결코 쉽게 구현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처하는 그리스도인 모두에게는 평화를 이루는, 평화를 만드는 의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결코 분쟁과 다툼을 조장할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뿌린 씨가 '정의의 열매'로 이어진다고 말합니다. 야고보서가 말하는 정의의 열매(καρπός δε τής δικαιοσύνης)의 사용된 디카이오수네(δικαιοσύνη)라는 그리스어는 공정하고 평등한 거래의 의미를 갖는데, 대부분의 번역은 정의(justice)로 옮겨놓았지만 일부 영어성경에는 친절, 덕의 의미를 갖는 'goodness'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불공평한 사회, 극심한 양극화로 인한 갈등이 정점에 이른 오늘 우리사회를 올바르게 자리매김하는 첫 출발은 새삼 평화, 그리고 평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의 기본적 책무입니다. 우리의 사회적 지위나 역할이 무엇이든 간에 어떤 환경이나 조건 속에서도 미움, 다툼과 경쟁, 갈등보다는 가능한 선한 의지, 화합과 협력을 이루며, 궁극적으로 평화를 만드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명이어야 합니다.
평화(平和)의 한자는 평평할 平과 화목할 和자로 이루어졌습니다. 평평할 평은 균등의 의미를 내포합니다. 화목할 和는 벼 화(禾)자와 입 구(口)자로 구성된 글자입니다. 수확한 벼(禾)를 여럿이 나누어 먹는다(口)는 데서 화목하다의 뜻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누가 더 많이 갖거나 덜 갖지 않고 균등하게 골고루 나누어 갖는 것이 평화의 출발점입니다. 그렇다면 평화를 만드는 일이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한 것 같네요.
3. 가정의 평화
흩어졌던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한가위 명절이 시작됩니다.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하는 명절이기도 하고, 가족 구성원 모두가 행복한 시간을 함께 나누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나는 내 가족들에게 어떤 존재인가, 어떤 아버지, 어떤 어머니였나? 어떤 아들, 딸이었나?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면서 오늘의 성서일과를 중심으로 우리의 관점을 가정으로 좁혀서 몇 가지 생각을 더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먼저 시편 1편은 <참된 행복>의 표제가 붙은 150편 시편 전체의 서시와 같은 성격을 띱니다. 이 시는 복 있는 의인의 품행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다루는 전반부와 악인의 형편을 언급한 부분으로 나뉩니다. 의인의 경우는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으로 구분하여 노래하면서 그의 삶이 얼마나 풍성하고 견실한지를 노래합니다. 이시는 우리가 한 가정의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로서 자녀들에게 어떤 본을 보여야 하는지를 명시하는 노래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삶이 어떤 보상을 수반하는지를 노래하는 3절,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다." 한 생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하는 일마다 잘 되는 축복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지만 이 시인은 자신 있게 그런 축복을 노래합니다.
오늘의 잠언의 말씀은 마치 슈퍼우먼 같은 <유능한 아내>를 소개합니다. 이 시는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대로 시작하는 22개의 절로 이루어진 소위 <아크로스틱 시> (acrostic poem)의 형식을 사용하는데, 남편이 진심으로 아내를 믿으며, 선행으로 남편을 도우며, 해를 입히는 일이 없는 여인이라고 적시합니다. 일하기를 즐거워하며, 부지런하고 사업의 수완이 탁월하여 많은 부를 이루어내서 윤택한 가정경제를 일궈냅니다. 지혜와 교훈이 넘칠 뿐 아니라 온 가족의 칭찬이 이어집니다. 가정의 화목과 안정이 여성의 주도하에 이루어지는 이 이야기는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갖가지 생각을 이어가게 합니다.
야고보서는 땅에 속하고 육신에 속한 지혜의 모습은 시기심, 경쟁심으로 이런 것이 지배하는 곳은 혼란과 온갖 악한 행위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4장 1, 2절에서 육신의 욕심이 분쟁을 일으키고 각종 악한 일들이 벌어짐을 경고합니다. 하지만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순결하고,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평화를 위하여 그 씨를 뿌려서 거두어들이는 정의의 열매를 얻게 된다고 언급합니다. 지적 능력은 겸손과 헌신의 마음으로 바르게 사용될 때는 축복이 되지만, 자만과 이기심으로 잘못 사용하게 되면 형언할 수 없는 폐해를 입히게 됩니다. 우리가 바르게 지혜를 발휘하면서, 우리의 가정이 자비와 선한 열매, 정의의 열매를 맺는 축복된 가정이기를 소망하게 됩니다.
복음서 마가복음의 말씀은 거듭되는 수난과 부활의 예고에도 불구하고 가버나움으로 가는 노상에서 제자들 간의 다툼이 있었고, 이를 아신 예수께서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 ...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그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공관복음서 다른 복음서의 기록은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노상에서 다툼이 있었다는 상황은 없고 제자들이 예수께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고 묻고, 이에 예수께서 답하시면서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하고,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마태와 누가복음에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는 35절 부분이 빠져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누가 더 크냐는 다툼의 답을 10장 43절 이하에서 분명하게 기록합니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아무튼 복음서의 말씀은 형제간이나 부모 자식 간에도 작고 사소한 것에 집착하면서 가족 간의 다툼이 일고 있는 우리들의 일상을 돌아보게 합니다. 이번 한가위 명절에 이런 어리석은 다툼이 되풀이 되지 않는, 그래서 진정 화평한 가족모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여기서 잠시 우리 현실에서 맞닥치는 가정의 모습으로 관심을 옮겨봅시다. 지극한 자식사랑이 왜곡되어 나타난 서글픈 우리 사회의 모습을 듣거나 보는 일이 일상처럼 되었습니다. 한 항공사의 사주 가족의 비뚤어진 자식사랑이 빚어낸 이야기, 대형교회의 비성서적인 세습 이야기는 우리를 참으로 서글프게 만듭니다.
사회학자 조은 교수는 한 신문에 기고한 칼럼 <(자본주의적)가족을 사랑하는 방식?!>에서 "계급 양극화 속의 '가족사랑'은 우리의 미래를 오싹하게 만든다. 우리의 젊은 세대들이 이토록 불공평한, 아니 점점 더 불공평한 출발점에서 시작한다면 그들의 미래가 어떨지 상상조차 힘들다. 자본주의에서 가족은 비정한 세계 속의 운신처가 될 수 있을까, 아니 더 비정한 소우주가 되는 것은 아닐까?"라고 안타까워합니다. 그녀는 교회의 세습도 왜곡된 가족 사랑의 결과라고 낙인하며 한탄합니다. 교회세습반대운동연대가 지금까지 공식 확인한 세습교회는 아버지에서 아들로 바로 이어지는 부자 세습이 98곳, 사위나 손자 등으로 넘어가는 변칙세습이 45곳. 하지만 한 인터넷 매체는 모두 364개 교회에서 세습이 이루어졌다고 집계한바 있습니다.
또 다른 신문 칼럼을 소개합니다. 김비환 교수의 칼럼, <촛불정신, 욕망의 사회, 그리고 정치> 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아파트 값 폭등으로 고삐가 풀린 사람들의 욕망은 그 동안 조금씩 형성되어온 사회적 자본 - 신뢰, 준법과 예의, 상호존중과 배려 -을 여지없이 파괴하고 있다. 아파트 소유자들이 재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공공주택이나 특수학교 건설에 결사반대하는 현상은 흔한 일이 되었다. 집값을 올리기 위해 불법행위를 서슴지 않으면서도 정작 불로소득에 매기는 합법적인 세금은 부당하다고 항변하기도 한다. 아파트 가격 담합이나 자전 거래가 시장경제를 왜곡시키는 현상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파트 시장을 안정화시키려는 정부의 노력은 자유경제에 역행한다고 비난해댄다. 비정상적인 아파트 가격폭등에 한숨짓는 무주택자들을 무능한 사람들로 치부하거나 가진 자들을 시기하는 부도덕한 사람들로 매도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사회는 주택을 소유한 사람들과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그리고 고가 아파트를 소유한 사람들과 값싼 주택을 소유한 사람들 사이에 극심한 위화감과 불신이 쌓여가고 있다. 어디에서도 공정하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외쳤던 촛불시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불법을 범하든 편법을 쓰든 그저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쟁취하면 그만이라는 그릇된 의식이 팽배해 있다. 정녕 이 사회가 살을 에는 추위와 강풍을 무릅쓰고 촛불을 지폈던 시민들이 살고 있는 곳이란 말인가! ... 불신과 시기, 의심과 위화감이 팽배해 있는 시민사회를 호혜적인 협동체계로 회생시키고, 투전판이 된 시장을 공정한 시장경제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부풀대로 부푼 사람들의 욕망을 진정시킬 수 있는 현명한 대응이 시급하다."
왜곡된 자식사랑, 부의 대물림이 빚어내는 비극, 그리고 부모와 자식이 천륜을 거스르는 악행이 끊이지 않으면서 전통적인 가족이 해체되는 서글픈 현상을 우리는 너무 자주 접하면서 살아갑니다. 평화가 결여된 사회에서 뿜어내는 독소들이 가정까지 병들게 합니다. 정의의 열매는 기대 난망입니다.
4. 맺는 말
오늘의 성서본문으로 돌아갑니다. 마태복음 5장 9절,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이어서 야고보서 3장 18절의 말씀입니다. "정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평화를 위하여 그 씨를 뿌려서 거두어들이는 열매입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peacemaker, είρηνοποιός)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자녀는 당연히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는 평화의 씨를 뿌려서 정의의 열매를 거두어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복,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의 덕목은 어렵지 않습니다. 복 있는 사람을 언급하신 주께서 마태복음 5장 13절 이하에서 강조하신 말씀에 의지하면 됩니다.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고, 형제자매에게 성내거나 얼간이, 바보라고 무시하지 말아야 하며, 폭언과 폭력을 쓰지 않고, 이웃과 원한을 맺지 말며, 그런 일이 생기면 즉시 화해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부부 간에, 부모와 자식 간에, 형제자매 간에, 이웃과 동료 간에, 그리고 더 나아가 나라와 나라 간에 이 원칙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지난 며칠 우리를 놀라게 한 대사건, 남북 정상 간 평화의 언사와 다양한 퍼포먼스는 확실히 우리 민족의 미래를 낙관하게 만들었습니다. 냉전적 사고의 틀에 갇혀있는 평화 훼방꾼들의 딴지에도 불구하고, 도도한 역사의 진보는 그 발걸음의 속도를 높여가리라고 믿습니다.
김연철 통일연구원장의 글, <남과 북은 이제 냉전의 강을 건넜다>는 제목의 글은 명료하게 이번 남북 평화의 대장정을 압축적으로 간파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났다. 한반도는 이제 항구적인 평화로 간다. 평화가 오면, 북한이 핵을 가질 이유가 없다. 한반도가 달라지면, 동북아 질서도 달라진다. 남북관계가 진전하면, 북-미 관계도 돌아간다. 가야할 길이 멀지만, 남과 북은 냉전의 강을 건넜다. 평화의 땅에도 수많은 난관이 기다릴 것이다. 이제는 냉전의 관성에서 벗어나, 평화의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사고를 하자."(2018. 9.22 한겨레)
감사합니다.
■ 강대인 교수는 미디어시민 모임 이사장(현)으로 방송위원장, 한국방송학회장을 역임했으며 건국대 언론정보대학원장, 계명대 사회과학대 학장 등을 지냈다.
* 설교는 지난 2018년 9월 23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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