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기독일보 강태광 편집위원] 복음주의자들을 종종 보수주의자라고도 부른다. 신앙의 전통과 영적 유산을 지키는 입장에 서게 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성경에 기초한 바른 신앙은 시대와 문화의 도전에 휩쓸리지 않고 신앙의 전통을 지켜야 한다. 이것이 보수신앙이다. 21세기 문명사회에서 구약의 전통과 초대교회의 영성을 추구하는 보수신앙은 수많은 도전을 이겨 내고 있다.
기자가 만난 전남수 목사는 이런 점에서 보수신앙인이다. 그가 섬기는 알칸사 제자들교회는 믿음의 전통을 지키는 특별한 교회다. 전남수 목사는 구약의 예배신앙, 초대교회의 뜨거움 그리고 교단의 신앙전통인 옥중성도의 순결한 믿음을 지키는 목회를 지향한다. 전남수 목사는 녹록치 않은 이민목회 현장에서 영적 전통을 지키는데 혼신의 힘을 다한다.
교회 마루 냄새를 맡으며 자랐다
전남수 목사는 어린 시절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부모님은 대구에 계시고 할머니와 함께 시골에서 자랐다. 해질녘이 되어 흙장난을 하며 같이 놀던 친구들이 엄마들의 부름을 받고 하나씩 집으로 돌아가면 전남수 어린이는 홀로 남았다. 홀로 남겨진 서글픔이 어린 가슴을 채우면 그는 예배당으로 갔다. 예배당에 가면 전도사님이 늘 반겨주었다.
그런데 예배당에는 반겨주신 전도사님보다 더 편안하고 반가웠던 예배당 마룻바닥이 있었다. 예배당 마룻바닥이 이상하리만치 포근했다. 나아가 예배당 마룻바닥 향기가 너무 좋았다. 때로는 교회에서 잠이 들기도 하고, 때로는 할머니가 찾아오실 때까지 교회당 마룻바닥에 누워 있곤 했다. 전남수 목사의 어린 시절 예배당 추억은 어머니 가슴 같은 포근함이다.
교회에 살고 싶어요
전남수 목사는 중학교 시절 대구에서 광민교회를 다녔다. 광민교회에서 보낸 학생회 시절 많은 은혜를 받았다. 특히 중2 때 SFC 수련회에 참석해서 큰 은혜를 받았고 신앙생활이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 시절 학생회를 지도해 주셨던 곽상봉 전도사님과의 소중한 만남은 많은 성장과 성숙을 경험하는 축복이었다. 광민교회 학생회 시절 뜨겁게 신앙생활을 했다. 매 주일 저녁예배까지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교회에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심지어 종종 '교회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부르심에 반응하며
전남수 목사가 고3 6월 한창 입시 공부에 열중하고 있을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교통사고였다.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그 충격과 아픔을 이기기 위해 전남수 학생은 기도원을 찾았다. 매주 금요일 버스를 타고, 또 걸어서 주암산 기도원을 찾았다. 기도원에 올라가서 서러움과 아픔을 주님께 토해냈다. 뿐만 아니라 학교 주변의 교회들을 찾아서 기도했다.
그 기도의 시간들을 통해 부르심을 다시 확인한다. 그리고 신학교 진학을 구체적으로 준비한다. 신학교 진학을 고민하며 상담을 했다. 대체적으로 일반대학을 마친 후에 신학대학원 진학을 권면했다. 마음으로 이런 결정을 내린 후에 당시 고신대학원 교수였던 전호진 박사님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전 박사님으로부터 대학 졸업 후에 신학교에 와도 좋다는 회신을 받기도 했다.
다시 확인하는 주님의 부르심
신학 공부를 잘 하기 위해서 철학과에 진학을 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고민이 생겼다. 진학하려했던 고신대학원이 분쟁에 휩싸여 시끄러웠다. 그래서 비슷한 신학적 흐름을 가진 합동신학원에 진학을 하고 학사장교로 입대하였다. 임관 후 배속된 포병대대에 교회가 있었다.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은혜가 넘쳤다. 대대 교회를 섬기는 목사님께서 집사로 임명해 영내 교회 집사로 봉사했고 한편 신철원 읍내 민간 교회 청년예배에 참석해서 은혜를 나누었다.
특별한 도전과 갈등없이 순조로웠던 군 생활에 큰 위기가 왔다. 제법 큰 부상을 당했다. 야전병원과 후송병원을 거쳐서 부산 통합병원에 입원했다. 하나님 은혜로 건강은 기적적으로 완쾌되었다. 하나님의 기적이었다. 그 기적을 기억하기 위해 전 목사는 아직도 병적기록카드를 보관하고 있다.
이 기간 영적 회복은 더 큰 축복이었다. 후송의 시간과 치료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과 친밀해졌다. 영적 회복의 끝은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진학이었다. 선배와 은사들의 도움도 많았다. 병상에서 원서를 작성하여 제출하고 특별한 방법으로 면접시험까지 마쳤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대학 그리고 군복무 시절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한 셈이다.
유학과 개척 그리고 이민 목회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더 깊은 공부의 필요성을 느껴 유학을 결심한다. 유학을 위해 찾아 온 곳이 알칸사 리틀락이다. 종착지가 아닌 경유지였다. 리틀락에서 공부를 마치고 밥존스 대학 박사 과정 입학 허락도 받고, 부교역자로 섬길 교회도 결정되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희망에 부풀어 있던 중 요청에 의해서 소그룹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성경공부 그룹이 성장하면서 교회 개척을 소망하게 된다. 물론 갈 길이 있는 전남수 목사에게는 남의 일이었다. 전 목사의 의중을 파악한 성경공부 멤버들은 항공료를 제공할 테니 주말 통학으로 개척만이라도 해 달라는 제안을 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된 교회 개척 사역은 주말 사역으로 1년간 지속되었다. 교회를 시작하면서 예배에 관한 기본적 목표를 갖게 되었다. 새벽기도를 쉬지 않는 것, 금요심야기도회, 그리고 주일 오후 예배를 꼭 드리기로 한 것이다. 잠시 개척만 돕기로 했던 목회는 우여곡절 끝에 전담케 되었다.
전남수 목사는 예배를 소중히 여기는 교회와 성도를 세우는 목회를 한다. 그래서 전남수 목사가 섬기는 알칸사 제자들교회에는 다양한 예배 프로그램이 있다. 예컨대 부모와 자녀들이 함께 드리는 패밀리 예배, 매월 첫날 드리는 월삭예배(모든 자녀들이 강단에서 무릎 꿇고 예배를 드리고 담임목사의 안수기도를 받는다), 십일조 새벽기도(매년 연초 아이들과 함께 40일간 새벽기도를 드리는 신년 새벽기도) 등이다.
온 교회가 동참하는 운동들도 벌였다. 예컨대 "이사운동"이다. 성도들이 교회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자는 운동이었다. 많은 성도들이 이 운동에 동참하였다. 집을 사기도 하고, 교회 가까운 아파트를 구하고, 교회 쪽으로 창문이 난 아파트를 구하였다. 이 운동의 결과로 2005년, 2006년 두 해동안 18가정이 집을 구입하였다.
비전과 기도의 제목
인터뷰를 마무리 하며 기자는 전남수 목사의 기도 제목과 비전을 물었다. 전남수 목사는 폭포수가 쏟아지듯 기도를 토해냈다. 늘 품고 기도하고 있다는 증거다. 전남수 목사 기도 제목을 간략하게 정리한다. 첫째로 '예배에 목숨을 거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다. 그는 그야말로 예배에 목숨을 건다. 전목사는 예배자다. 그의 목회와 삶에 예배자의 열정이 진하게 느껴진다.
둘째로 '영혼을 구원하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다. 교회는 모름지기 영혼구원에 힘써야 한다. 그러나 현대 교회가 전도의 동력을 상실하여 영혼구원의 열정과 능력을 상실했다. 그래서 현실 유지나 수평이동을 통한 성장을 꾀하는 교회들이 많아지고 있는 이 시대에 영혼구원을 목회와 교회의 비전으로 삼고 기도하는 것은 귀하고 아름답다.
셋째 '양육된 제자를 세우게 하소서!'다. 제자훈련하는 교회들의 아픔으로 제자라는 용어의 의미가 희석되기도 했다. 하지만 참 성도는 주님을 따르는 군중이 아닌 제자들이 되어야 한다.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나가고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거는 참 제자를 세우는 것이 전남수 목사의 기도 제목이다.
넷째로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게 하소서!'다. 전남수 목사는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은 것을 감사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아울러 전 목사는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것을 사명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유학생들을 돌보고 2세들을 돌보는 일에 전심을 다한다.
전남수 목사는 행복한 목사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누리는 은혜를 힘을 다해 전한다. 목사의 열정과 마음을 이해해주는 성도들과 젊은이들이 있어서 더욱 행복하다. 한국어도 잘 모르는 청소년들이 매 주일 전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설교를 요약해서 제출하는 노트를 보면서 저절로 미소가 번진다.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 목회자의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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