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동성애 이슈와 관련하여 포스트페미니즘에 관한 논의가 국내에서 활발해지는 가운데 미국의 감리교 여성신학자요 드류대학교(Drew University) 교수 캐서린 켈러(Catherine Keller)가 2017년 10월 한국을 방문하여 트랜스페미니즘(transfeminism)에 관하여 감신대, 연세대, 장신대 등에서 강연하고 심층 이해 특별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그럼으로써 트랜스페미니즘 논의가 한국 교계와 신학계에서 시작되었다. 그녀의 트랜스페미니즘은 과정신학적 부정신학에 근거하고 있는데 상징과 시, 미적 언어를 통한 함축적이고 신비적 내용을 전달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켈러는 부정신학과 과정신학을 결합시키는 시적 신학(theopoetics)에 사상을 담으면서 이를 트랜스페미니즘으로 발전시킨다. 켈러는 트랜스페미니즘을 오늘날의 퀴어신학의 동성애 정당화를 위한 신학적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먼저 과정신학적 부정신학이 주장하는 하나님에 관하여 비판적으로 성찰하고자 한다.
1. 깊음, 태흠, 혼돈으로 상징되는 하나님
1) 깊음에서 창조
(1) 깊음(the deep)은 하나님 자신
켈러는 창세기 1장 1절이 말하는 말씀에 의한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n ex nihilo)를 거부하고 깊음으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profundis, creation out of the deep)를 말한다. 그녀는 과정신학의 관점에서 단 한번의 유일회적인 완성된 창조가 아니라 지속되는 창조(creatio continua)를 주장한다. 켈러는 말씀으로 일회적으로 완결로 끝나는 창조가 아니라 끊임없이 시작하며 여러 존재들의 얽힘 속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창조를 말한다. 켈러는 전통신학이 말하는 말씀에 의한 창조(creation by the Word)가 아니라, 깊음, 혼돈으로부터 창조에 주목한다. 깊음(the deep)은 하나님 자신의 깊음이다. 하나님의 깊음은 하나님 자신을 태어나게 할 뿐 아니라 모든 만물을 탄생시킨다.(Catherine Keller, Face of the Deep: A Theology of Becoming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03, 180.) 모든 존재는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도 모든 존재 안에 있다. 창세기 1장에 대한 켈러의 과정신학적 해석에는 하나님과 만물이 불가분적인 존재로 있는 범재신론의 구조가 드러나고 있다.
(2) 비판적 성찰: 성경적 창조는 완성된 창조와 이에 근거한 지속적 창조
켈러가 주장하는 깊음으로부터의 창조는 창세기가 증언하는 말씀에 의한 창조와 다르다. 말씀에 의한 창조는 무에서의 창조로서 여러 존재들의 얽힘 속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창조가 아니다. 이러한 지속적 창조에서는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한 생성만 있다. 켈러가 말하는 무한한 시작에서는 성공과 실패를 인정하며 이것이 무한한 과정의 하나의 계기 일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륜에도 실패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정통 개혁신학은 말씀에 의한 창조는 창조하신 하나님의 경륜에는 실패가 없다는 것을 천명한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에 따라 반드시 서며 이에 실패가 없다는 것을 선언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사 14:24). 하나님의 경륜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하나님 자신이 반드시 이루신다. “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26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사 14:26-27). 이 말씀은 하나님이 정하신 세계경영은 반드시 이루어지며, 누구도 능히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2. 테홈에서 창조
1) 시작도 끝도 없는 테홈(창조의 근원)
켈러에 의하면 창조가 나오는 깊음은 형태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는 창조의 근원인 테홈(tehom)이다. 태홈은 되어감의 근원이다. 테홈은 단순히 억압하고 격퇴해야 하는 혼돈이나 흑암이 아니다. 테홈으로부터의 창조에서 하나님은 모든 되어감 속에 계시며, 시작과 끝이 없으며, 끝은 항상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진다. 테홈은 창조의 근원으로 시작과 끝이 없는 끊임없는 시작으로서 되어감의 원천이다. 이 되어감 속에 하나님은 함께 계시며, 실패 속에서 잃어버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실패도 배움으로 다시 새로움으로 시작한다. 이러한 거대한 과정 속에서, 선과 악, 성공과 실패, 빛과 어두움, 구원과 타락은 분리되지 않고 관계성 속에서 기회와 새로운 가능성으로 다양하게 얽히고 하나님도 그 과정에 기여한다. 하나님은 과정 속에서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이루어가시는 전능한 존재가 아니라 현실의 사건 속에서 무엇인가를 촉발해내고, 시작하게 하는 존재이다. 테홈은 단순한 흑암이나 혼돈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감싸 안는 근원으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창조의 에너지다. 켈러는 테홈을 불확정성, 삶의 과정의 깊이라 부른다. 테홈은 시작이기도 하고 끝이기도 하며, 불규칙적으로 변화하는 열린 공간이다. 이는 니콜라스 쿠자(Nicholas of Cusa)의 부정신학이 가르쳐주는 것처럼 무지의 구름(cloud of unknowing)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비판적 성찰: 하나님은 남성신이나 여성신아닌 성을 초월한 삼위일체적인 사귐의 존재.
켈러의 과정신학이 설명하는 하나님은 만물 가운데 만물에 의존하면서 만물과 더불어 만들어지는 과정적 존재이다. 과정적 존재로서의 하나님은 성경이 전해주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주권적인 하나님이 아니다. 과정으로서의 하나님은 더 이상 전능하신 자가 아니라 피조물 가운데서 피조물의 영향을 받고 피조물과 함께 되어감의 존재다. 켈러는 전통적 창조신앙의 하나님은 유일신적 가부장적 하나님으로서 명령 하나로 절대적인 기준을 피조물에 제시하고 단 한번에 창조를 완성하고 존재 피라미드 최상위에 권위적으로 제국주의적 신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자궁을 가진 테홈으로서 여성의 신이거나 남성의 신이 아니라 성을 초월한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창조의 하나님은 여성의 자궁 같은 테홈이 아니라 인격적인 말씀이시다. 그는 로고스로서 없는 것으로부터 만물을 있게하시는 창조의 말씀이시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여성신이나 남성신으로 표시한 곳이 없으며 단지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표시하고 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아버지 품”(καλπον τού πατρός, the bosom of the Father)이란 알이나 자궁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이라는 신성의 원천을 말한다. 이 영원하신 신성의 원천에서 독생하신 하나님 아들 성자가 나왔다. 이것을 정통 개혁신학은 성부로부터 성자의 영원한 출생이라고 말하고 있다. 게세마네의 대제사장 기도에서 예수는 다음같이 기도드란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 이 말씀은 아들이 창세전 영원전부터 창조주로서의 영광을 가졌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여기에는 여성신의 존재나 매개가 없고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하신 성자의 출생이 있었다. 이것은 영원한 출생(eternal birth)이요, 이러한 영원한 아들 출생에서 아버지와 아들을 연결시키는 것은 자궁과 탯줄이 아니라 성령이라는 사랑의 띠다. 여기에는 성부와 성자, 성령 사이의 영원한 삼위일체적인 교제와 일치가 있으며 가부장적 권위의 질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3. 과정으로서 하나님: 테홈에서 시작되는 만물의 서로 얽힘.
1) 테홈, 혼돈, 깊음으로 상징되는 하나님
켈러의 과정신학에 의하면 모든 존재, 세상과 만물은 시작도 끝도 없는 다양성과 개방성 속에서 되어가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 세상과 만물의 역동성을 가능케 하는 힘이면서 동시에 그 역동성과 변화, 과정 안에 함께 있다. 세상과 만물, 즉 모든 되어 가는 것들은 하나님 안에서 되어 가며, 하나님도 그 속에서 되어 간다.(Catherine Keller, Face of the Deep: A Theology of Becoming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03, 180). 하나님은 이러한 되어감 속에서 피조물과 함께 있다. 켈러는 이러한 과정의 추동력이 되는 하나님을 테흠, 혼돈, 깊음이라고 상징했다.
여기서 하나님은 테홈, 혼돈, 깊음과 구분되지 않는다. 과정신학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시고 인간의 미래를 결정하시고 심판하시는 성경의 하나님이기보다는 “인간을 끊임없이 추동시키시고, 돌보는 열려 있는 신비”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테홈에서 창조하시는 하나님은 혼돈 속에서 불확실성, 다양성과 개방성을 지니는 존재이다. 켈러는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야웨의 천사들”과 동격으로 묘사되는 것에 근거하여, 엘로힘이 “모든 존재의 힘을 가능하게 하는 힘”, “땅, 물, 공기 그리고 불을 생겨하게 하는 최초의 틀이자 물질”로 표현된다고 해석한다. 그리하여 켈러는 하나님이 창조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피조물이기도 하다는 파격적 제안을 한다. 바다, 숲, 소음, 사회, 삶, 사건들과 나날들이 단순히 창조의 대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은 창조하기도 하지만 창조와 생성 속에서 그 영향을 받기 때문으로 본다.
이러한 테홈의 하나님은 피조물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창조 말씀이신 하나님과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은 만물이나 그 가운데 어떠한 존재와 동일시되는 분이 아니시다. 선지자 이사야는 비길 에 없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관하여 증언한다: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13절) 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사 40:13-14). 이 구절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창조와 경륜은 어느 만물에 의존하거나 인간이나 천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주권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말하고 있다. 선지자 이사야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어떤 피조물과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함을 말하고 있다: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사 40:15).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사 40:17). 하나님의 관점에서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간주하신다는 이사야의 표현에서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성과 초월성을 명료히 찾아 볼 수 있다. 정통 개혁신학은 이러한 만물 속에 내주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만물 위에 뛰어나 전혀 의존하지 아니하시는 주권적인 하나님과 초월성을 믿는다.
2) 비판적 성찰: 테홈으로서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 아니다.
켈러는 테홈을 알과 같고 자궁과도 같은 신비로 본다. 테홈은 신비이기에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존재, 생겨난 존재, 생겨날 존재들을 모두 다 품고 있다. 테홈은 피조물과 같지도 않고, 그러하다고 무관하지도 않다, 테홈은 모든 피조물들이 만들어 내는 사건, 변화, 다양성을 만들어 내는 가능성이면서, 그 변화와 다양성 속에 함께 있다. 이 테홈은 바로 하나님이다. 테홈으로서의 하나님은 깊은 혼돈으로부터 이 세상을 창조했고 시작도 끝도 없는 깊은 바다와 같은 세상 속에 피조물과 함께 존재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진행 중에 있고 종말은 어떻게 되는 지 예기될 수 없다. 테홈으로서의 하나님은 이 거대한 심연의 바다에 피조물과 함께 공존하며, 기쁨과 슬픔, 선과 악의 조화, 성공과 실패 속에서 우리를 이끌어가는 과정적 존재이다.
이러한 시작도 끝도 없는 하나님은 성경이 증언하는 주권적이고 초월적인 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태초부터 만대를 명령하였다고 증언한다: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사 40:21).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종말을 아신다. 성경의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의 과정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 같이 펴셨으며 거주할 천막 같이 치셨고(22),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23), 그들은 겨우 심기고 겨우 뿌려졌으며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이 입김을 부시니 그들은 말라 회오리바람에 불려 가는 초개 같도다”(사 40: 21-24). 인간들은 하나님과 대등한 동역자가 아니라 질적으로 무한한 차이가 있는 존재로서 “메뚜기,” “천막,” “초개” 같은 존재다.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는데 자기가 원하시는 자를 일깨워 열국을 그에게 맡기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게 하며 만대를 불러내신 분이시다: “누가 동방에서 사람을 일깨워서 공의로 그를 불러 자기 발 앞에 이르게 하였느냐 열국을 그의 앞에 넘겨 주며 그가 왕들을 다스리게 하되 그들이 그의 칼에 티끌 같게, 그의 활에 불리는 초개 같게 하매(2), 그가 그들을 쫓아가서 그의 발로 가 보지 못한 길을 안전히 지났나니(3),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사 41: 2-4). 하나님은 만대를 정하신 분으로서 그는 처음이요 나중이시다. 이러한 성경이 증언하시는 하나님은 처음과 끝을 모르고 과정 속에 있는 테홈으로서의 하나님과 전혀 다르다.
4. 과정신학적 범재신론
1) 영이신 하나님은 신체요 물질인 세상, 만물과 연결
켈러는 과정신학적 범재신론을 천명한다: “모든 존재는 하나님 안에 있다.” 그리고 그 어느 존재 하나도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는다고 천명한다. 과정신학적 범재신론은 모든 악과 고통을 하나님에게만 돌리지 않고 하나님이 모든 사건에 연결된 것으로 이해하고 하나님은 이 모든 연결된 사건 안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범재신론에서 모든 존재는 놀라우리 만큼 상호의존적이며 관계적이다. 모든 존재는 서로 서로의 힘 안에 존재한다. 그리하여 과정신학은 하나님과 피조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나 분리를 부정하지는 않으나 그 둘이 늘 상호 연관되어 있고 얽혀 있음을 강조한다. 범재신론에서 영이신 하나님은 신체요 물질인 세상, 만물과 연결되어 있다. 과정신학에서 고통과 악이란 모든 존재들 사이에 흐르는 힘(에너지)의 오용과 독점에서 발생한다고 본다.
2) 비판적 성찰: 성경적 하나님은 만물에 의존하지 않는다.
① 신인협동아닌 하나님의 주관적 행위
과정신학은 신인협동설을 말하나 이는 이사야가 말하는 하나님의 주권론에 배치된다: 선지자 이사야는 당시 북왕국을 멸망시킨 앗수르 왕이 자기 왕국 건설이 자기의 힘, 지혜, 총명, 용감에 의한 것이라는 교만과 자만을 비판한다: “그의 말에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 열국의 경계선을 걷어치웠고 그들의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또 용감한 자처럼 위에 거주한 자들을 낮추었으며(13), 내 손으로 열국의 재물을 얻은 것은 새의 보금자리를 얻음 같고 온 세계를 얻은 것은 내버린 알을 주움 같았으나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지저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는도다”(사 10:13-14). 선지자 이사야는 이러한 앗수르 왕의 교만과 자만이란 도끼가 찍는 자에게 자랑하며 막대가 드는 자에게 자랑하는 것과 같다고 비판한다: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사 10:15). 성경은 세상사를 주관하시는 주권적인 하나님의 행사를 인정하는 신단독설을 천명하며 하나님이 인간이나 세상과정에 의존하는 신인협동론을 인정하지 않는다.
② 하나님의 영은 물질적이지 않다.
정통 개혁신학적 성찰에 의하면 이러한 켈러의 범재신론은 하나님은 영의 존재가 아니라 그의 신체인 세상과 불가분적인 관계 속에 존재함을 말한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을 세상적 존재로 평가절하하고 그의 신체인 세상에 의존시키고 있다. 켈러는 하나님의 영은 물질적이며 구체성과 신체성을 지닌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만물의 되어가는 과정 중에 태어나고 성장하는 모든 생명체에게 반응하고 이끌고 초대한다고 본다. 그러나 정통 개혁신학의 신론에 의하면 하나님은 물질이나 신체성을 지닌 분이 아니시다. 그는 영이시다. 예수님은 보이는 우상을 숭배하고자 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찌라.” 천사는 “하나님의 부리시는 영”(히 1:14a) 인 것처럼 하나님은 신체를 지니지 않으신 영이시며 그는 영원하시다. 사도 바울은 천명한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 시편 저자가 노래하듯이 세상은 물질로서 그것은 옷과 같이 변하지만 하나님은 영으로서 영원토록 변하지 아니하신다: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10).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11),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은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히 1: 10-12).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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