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르면 오늘은 “성령강림 둘째 주일” 혹은 전통에 따라서는 “성령강림후 첫째 주일”이라고도 합니다. 동시에 오늘은 “삼위일체 주일”이기도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이 한 하나님이라고 하는 삼위일체, 그 의미가 신비하다기보다는, 이 개념을 설명하거나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1. 천군천사를 거느리신, 복수(複數)로 표현된 창조주 하나님(성부)
“태초에 하나님(히브리어, ‘엘로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창 1:1)라고 할 때 “하나님”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엘로힘’은 ‘엘’(“신”)의 복수(“신들”)입니다. 문법적 복수 형태 때문에 때로는 창조의 신이 한 신이 아니고 여러 신들일 수 있다고 하는 추측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창조하셨다”라고 하는 히브리어 ‘바라’ 동사가 3인칭 단수 동사이기 때문에 ‘엘’의 복수는 “신들 중의 신”, “으뜸가는 신”처럼 존엄을 나타내는 복수(複數)로 설명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창 1:26)라고 하는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1인칭 복수 대명사 주어도 복수형태이고 “만들자”라고 하는 동사도 복수 형태입니다. 존엄의 복수로 설명되기가 어렵습니다. 기독교 쪽에서는 이것을 삼위일체 개념으로 설명하는 시도도 있습니다만, 한참 후대에 나온 삼위일체론으로 초기의 복수표현 신을 설명하려는 것에는 무리가 따릅니다. 이사야서 6:8에서도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1인칭 복수 “우리”를 씁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이 경우, 하나님과 하나님 둘레에 서 있는 천사들, 신적 존재들, 하나님이 부리시는 천상의 메신저들을 전제하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창조의 과정에 하나님 옆에서 창조하는 일을 직접 맡았던 것으로 전해지는 의인화된 지혜 ‘호크마’가 있습니다.
22 주님께서 일을 시작하시던 그 태초에, 주님께서 모든 것을 지으시기 전에, 이미 주님께서는 나를 데리고 계셨다. 23 영원 전, 아득한 그 옛날, 땅도 생기기 전에, 나는 이미 세움을 받았다. 24 아직 깊은 바다가 생기기도 전에, 물이 가득한 샘이 생기기도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 25 아직 산의 기초가 생기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 26 주님께서 아직 땅도 들도 만들지 않으시고, 세상의 첫 흙덩이도 만들지 않으신 때이다. 27 주님께서 하늘을 제자리에 두시며, 깊은 바다 둘레에 경계선을 그으실 때에도, 내가 거기에 있었다. 28 주님께서 구름 떠도는 창공을 저 위 높이 달아매시고, 깊은 샘물을 솟구치게 하셨을 때에, 29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물이 그분의 명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고, 땅의 기초를 세우셨을 때에, 30 나는 그분 곁에서 창조의 명공(名工)이 되어, 날마다 그분을 즐겁게 하여 드리고, 나 또한 그분 앞에서 늘 기뻐하였다.(잠 8:22-30)
여기 “창조의 명공”은 히브리어 ‘아몬’의 번역입니다. '개역'에서는 이 히브리어를 아예 “창조자”라고 번역하고, 영어 번역들은 “master workman”(ASV), “an architect”(TEV), “the craftsman”(NIV) 등으로 번역합니다. 다 건축기술자들이란 말입니다. “지혜”(‘호크마’)의 직무가 “명공”(‘아몬’)인데,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왕래합니다. 그의 역할은 모두를 “즐겁게”,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30 나는 그분 곁에서 창조의 명공이 되어, 날마다 그분을 즐겁게 하여 드리고, 나 또한 그분 앞에서 늘 기뻐하였다. 31 그분이 지으신 땅을 즐거워하며, 그분이 지으신 사람들을 내 기쁨으로 삼았다”(잠 8:30-31). 저는 어제 이 설교 원고를 마무리할 즈음에 지혜의 명공 역할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고 자기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하는 “지혜”(‘호크마’)의 말을 되새기면서, 세상이 어려운 이 때에 예상 밖에, 하늘을 기쁘게 하고 땅을 기쁘게 하고 자기도 기쁘게 하는, 휴전선을 넘나들며 화해 중재 역할을 하는 한 메신저의 분주한 행보를 알리는 긴급 뉴스를 들으면서 얼마나 기뻤었는지요!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위로해 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
2. 우리를 초월해 계시면서 동시에 우리 안에 내재해 계시는 하나님
오늘의 본문 이사야서를 보면, 남 유다의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본 비전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이었습니다(사 6:1). 감히 범접 못할 초월자를 만난 것입니다. 그분 주위로는 ‘스랍’들이 주님을 호위하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어 ‘사라프’ 의 문자적 의미는 “(활활) 타오르는 불같은 존재”입니다. 아마도 이 피조물이 타오르는 불같은 외모를 지닌 것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구약의 다른 곳에서(민 21:6; 신 8:15; 사 14:29; 30:6) ‘스랍’은 독사를 가리킵니다. 아마도 그 외모가 독액을 분비하는 뱀 같은 모양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달리, 그 ‘스랍들’은 ‘나르는’ 뱀들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아마도 그 피조물이 지닌 돌진하는 재빠른 움직임을 묘사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NET 주해). 창조주 성부 하나님은 이러한 피조물로 호위되어 있어서 아무나 다가 설 수 없는 초월해 계시는 분으로 이해됩니다.
오늘의 본문 시편 29:1은 하나님이 혼자 계시지 않고, 주위에 “하나님을 모시는 권능 있는 자들”(시 29:1)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권능 있는 자들은 히브리어로는 “신들의 자식들”[‘브네 엘림’, “신들의 아이들”]입니다.
3. 혼자 사시는 하나님?
황당한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라이나 마리아 릴케의 “내가 죽는다면”이란 시입니다.
“내가 죽는다면, 하나님, 당신은 어쩌시렵니까? 나는 당신의 항아리입니다 (그런데 내가 깨어진다면요?) 나는 당신이 마시는 물입니다 (그런데 내가 시체가 되어 썩는다면요?) 나는 당신의 옷이고 당신의 관절(關節)입니다. [내가 죽고 나면] 당신은 살아있다는 의미를 상실하실 것입니다. 내가 죽고 나면 당신을 가까이 따스한 말로 맞아 줄 집도 없습니다. 당신의 피곤한 발에 신으실 비로드 샌들도 없을 것입니다. 내가 그 신발이니까요. 당신의 큰 외투도 당신을 버립니다. 베개로 맞아들이듯 내 뺨으로 따스하게 맞아들이는 당신의 눈빛은 돌아와서 나를 아무리 오래 찾아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이면 당신은 낯선 돌의 무릎 위에 누울 것입니다. 어쩌시렵니까, 하나님, (내가 죽고 나면, 당신이 어떻게 살지 참)걱정스럽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시 선집 손재준 옮김, '두이노의 비가', 29)
좀 더 심하게 투정을 부린다면, “하나님, 나 죽으면 하나님만 외로우실 텐데, 어쩔 셈이세요? 나 죽어요? 살아요? 확 자살할까보다! 그러니까 하나님, 죽음으로 나를 위협하지 마세요!” 뭐, 이런 식입니다. 나를 죽이시는 하나님에 대한 진술은 구약의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시 88:5-6; 삼상 2:6), “나 죽으면 하나님은 나 보고 싶어도 못 보십니다.”(욥 7:21), “하나님과 나 사이에 사귐이 단절되면 하나님만 손해 아닌가?”라는 생각입니다(시 88:10-12.)
그런데, 이런 겁박 같은 말이 신성모독처럼 들리지 않고 하나님과 시인 사이의 친밀관계가 부러울 정도로 귀여운 투정으로 들립니다. 하나님을 겁박한다는 것이 어디 가당키라도 한 말입니까? 하지만 이 시인이 하나님께 대드는 모습은 귀여운 구석이 있습니다. 자기가 죽고 나면 하나님이 얼마나 외롭고 아쉬울 것인지를 말하는 대목은 어린 아이처럼 천진난만합니다.
4. 광야로 잠적하여 인간을 떠나 홀로 계시겠다는 하나님?
예레미야서를 보면 예레미야가 만난 하나님의 한 때의 모습이 적혀 있습니다. 하루는 웬 허름한 옷차림의 고단한 나그네가 집 앞에 서있는 예레미야에게 다가옵니다. 날은 저물었습니다. 그 나그네는 하룻밤 잘 숙소를 찾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숙박비도 지불할 능력이 없어 보이는 초라한 이 나그네가 예레미야에게 다가오더니, 하룻밤만 좀 재워줄 수 없느냐고 묻습니다. 예레미야가 그 나그네에게 가까이 가서 그 행색을 위아래로 자세히 살펴봅니다. 길손은 경기(驚氣)까지 일으키고 있습니다. 무엇엔가 심한 충격을 받아 놀란 것 같습니다. 손으로 살짝 밀기만 해도 쓰러질 듯, 기력이 없이 발발 떨고 있습니다. 그 순간, 하마터면, 예레미야는 놀라 자빠질 뻔, 아니 졸도할 뻔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까, 그 나그네는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를 억지로 예언자로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보냈던 바로 그 분, 그 엄청남 존엄과 영광과 능력을 지니셨던 그 하나님이십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하나님 앞에서 어쩔 줄 모릅니다. “아니, 주님 아니십니까! 우리 이스라엘의 희망이신 우리 주님 아니십니까! 이스라엘이 환난을 당할 때마다 구하여 주시던 주님께서,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폐인의 모습으로 제 앞에 지금 서 계신단 말입니까! 어쩌다가 이렇게 정처 없이 헤매는 나그네가 되셨단 말입니까? 어쩌다가 이런 누추한 움막에서 저하고 하룻밤을 같이 보내시겠다고 절 찾아오셨단 말입니까! 도대체 누가 우리 주님을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무엇에 놀라셔서 이렇게 경기(驚氣)까지 일으키시며 벌벌 떨고 계십니까! 천천만만 하늘 군대를 호령하시는 만군(萬軍)의 하나님께서 이런 패잔병이 되시어서 제 앞에 나타나시다니요!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셨습니까?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렘 14:8-9 패러디)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그러한 연약한 모습은 듣도 보도 못하였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방에 모시고 들어와서 더 자세히 살피니 하나님은 단순히 지쳐계신 것만이 아니고 분노를 참지 못하여 벌벌 떨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알아본 예레미야에게 급하게 부탁하십니다. “저 광야 사막 어디에, 아무도 날 못 찾을 곳에 내가 좀 머무를 움막 하나만 마련해 다오. 나 이제 내 백성을 버리고 싶다. 멀리 떠나 사막에서 혼자 살고 싶다. 제발 거기 내가 머물 숙소, 하나만, 마련해 줄 수 없겠냐, 예레미야야?”(렘 9:2 패러디)
당신의 백성에게로 오시어서 백성과 함께 사시던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이제 백성을 버리고 멀리 떠나 홀로 계시려고 하십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예레미야에게 하시는 말씀을 더 들어 보십시오! “너는 다시는 이 백성을 보살펴 달라고 내게 기도하지 마라”, “너는 다시는 그들을 도와달라고 나에게 호소하지도 마라! “간구하지도 말고, 조르지도 마라!” “나 이제 네 말도 안 듣는다.” 이 분이 하나님 맞기는 맞습니까? (렘 11:14; 14:11 패러디)
5. 사람 품에 안기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
예레미야가 “주님께서 이 땅에 새 것을 창조하셨으니, 그것은 곧 ‘여자가 남자를 안는’ 것”(렘 31:22)이라고 한 것은 영어 뉴리빙역(New Living Translation)이 같은 본문을 “이스라엘이 자기 남편 하나님을 포옹할 것이다”(Israel will embrace her God.)(렘 31:22)라고 번역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아내 이스라엘이 남편 하나님을 안아드리는 것입니다. 이미 호세아가 “그 날에 너는 나를 '나의 남편'이라고 부르고, 다시는 '나의 주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호 2:16)라고 한 것은 기존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주종관계가 부정되고, “남편과 아내”관계로 관계가 재정립되는(호 2:16) 것을 보여 줍니다.
“너를 폐인이 되게 하고/ 네 땅 폐허로 만들고/ 네 아내 침략군에게 능욕 당하게 하고/ 네 몸 발가벗겨 먼 나라로 끌려가게 해놓고도/ 내 분노 풀지 못하고/ 내 오명(汚名) 씻지 못하다니// 너를 이방 땅으로 잡혀가게 한/ 저승보다 더 잔혹한 내 질투/ 너를 다시 데려오려 적지(敵地)로 들어가/ 속전(贖錢) 지불하는 내 어리석음/ 너를 미워하면서도 못 버리는 내 미련/ 너를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내 허약/ 네가 한꺼번에 다 알아버리고 말았구나// 사로잡혀서 갔던 그 길 다시 지나/ 귀향길에 올라라/ 새색시 되어 새신랑을 맞이하거라/ 지나는 광야 곳곳에 이정표 세워라/ 우리의 밀월 다시 회복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수치 씻을 길 없으니/ 이제 너는 나를 신랑이라 부르고/ 다시는 주인이라 일컫지 마라// 내가 창조하는 새 세상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안는다/ 내가 너의 품에 안겨/ 착한 자식들 낳으며/ 너와 함께 영원히 살리라” (민영진, 시집 '공중도시' 41-42쪽, <여자가 남자를 안는다> 전문)
6. 임마누엘 하나님
예언자 이사야 때 와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 사상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다윗 왕실에 한 징조를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새번역' 사 7:14). 마태복음서는 예수의 탄생이 바로 임마누엘의 예언의 실현이라고 재해석합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마 1:23)
7. 사람과 함께 사시는 하나님(성령)
요한복음서 14장 16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우리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지금까지는 “아드님”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였는데, 그 아드님이 이제 곧 승천하시어서 제자들과 작별하십니다. 아들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위해 당신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혜사를 보내어 주셔서 그 보혜사가 그들과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요청하시겠다고 하십니다.
한자어 보혜사는 도울 보(保)에, 은혜 혜(惠), 스승 사(師), 세 글자로 만들어진 말입니다. 한문권에서는 보혜사는 “선생” 곧 “스승”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말씀드려서 우리를 지키고 도와주고[保],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惠] 선생님[師]을 보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도 당신을 대신해서 우리를 지키시고 도와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선생님을 우리 곁에 계시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놀랍습니다! 보혜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요청으로 우리에게 보내시는 선생님이십니다!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요 14:26)
하나님께서 예수의 이름으로, 곧 예수 대신 보혜사를 보내십니다. 그런데, 그의 별명이 “성령”입니다. “거룩하신 영”이란 말입니다. 이분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뭐든지 가르쳐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생”이십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성경에서 읽는데, 우리가 읽고 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 성령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다 생각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굉장한 선생님이십니다! 이런 선생님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성령이고,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이십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 없이 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 영이 나를 위하여 증언하실 것이다.”(요 15:26)
보혜사 선생님께는 또 다른 별명이 있습니다. “진리의 영”이십니다. 그분이 하시는 중요한 일이 바로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증언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지 성령께서 증명하시고, 법적 증인이 되셔서 예수와 관련된 사실을 진술하신다는 것입니다.
8. 우리 몸이 하나님 거하시는 성전이고, 하나님도 우리의 성전이다
바울의 비전, 요한의 비전을 그대로 공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聖殿)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고전 3:16);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聖殿)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성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모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고전 6:19). “10나를 성령으로 휩싸서 크고 높은 산 위로 데리고 가서,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 ...22 나는 그 안에서 성전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어린 양이 그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계 21:10, 22)
우리는 “하나님은 혼자 사시나?”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오늘의 말씀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혹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라면, “하나님은 혼자 사시나?”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나왔습니다. 모든 “나” 속에 하나님께서 사신다는 것 아닙니까!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결국 모든 사람 속에서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사십니다. 우리를 초월해 계시면서 동시에 우리 안에 내재해 계시는 하나님(사 6:1-8)이십니다. 비록 용서 받았더라도 죄인인 우리가 두려운 마음으로 그분을 모실 때만 말씀은 우리에게 그 얼굴을 보일 것입니다. 말씀의 얼굴 만나는 우리의 감회는 다 다를 겁니다. 그것은 마치 열리는 말씀이 각자에게 다 다른 깨달음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서 1장 1절에 다음과 같은 진술이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여기 주제가 “말씀”입니다. 이 짧은 한 문장은 “말”이 태초부터 있었다는 진술로 시작하고, 다음에는 “말”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것으로 회고하고, 급기야 그 “말”이 곧 하나님이라는 비약적 선언으로 끝납니다. 태초 이전부터 있었고, 창조 때는 기능공(“아몬”) 역할을 했던 ‘호크마’가 생각납니다. 유대교는 이 호크마와 ‘토라’를 연결시킵니다. 우리 기독교는 태초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말씀/도(道)/로고스를 상정(想定)합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태초 이전 우주가 창조되기 이전부터 이미 “말씀”은 계셨고, 홀로 계시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밝힌 성서는 “말씀”을 신성(神聖)의 영역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중용(中庸)' 첫 장과 '대학(大學)' 6장에 “신기독(愼其獨)”이란 말이 나옵니다. 일반적으로 이 말을 군자가 홀로 있을 때도 행동거지를 삼가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남이 안 본다고 몸가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주석가들은 중용 첫 장이 신성의 영역에 속하는 살아 있는 생명으로서의 “도(道)”를 다룬다는 점에 착안하여 “신기독(愼其獨)”을 군자가 도를 떠나서 홀로 있는 것을 삼가야 한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후자의 견해에 최근에 부쩍 사로잡혀 있습니다. 사람이 도(道) 없이도 살 수 있다면 그런 도는 도가 아니라고 합니다. 사람과 도는 불가분리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어 성경들은 아직도 요한복음 1장 1절을 번역할 때 “말”을 “도(道)”라고 번역합니다.
“신기독(愼其獨)”을 사람이 도(道)를 떠나서 홀로 있는 것을 삼가야 한다는 경고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일찍이 도성인신(道成人身)의 사상을 발전시킨 동양의 기독교는 이 “로고스, 말씀”의 구체적이고 완전한 표현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습니다. 예수 떠나서 홀로 있지 말 일입니다.
■ 민영진 박사는 전 대한성서공회 총무로, 구약 신학학자로서 모두가 인정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성경번역가이다. 연세대신학대학을 거쳐 이스라엘 히브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민 목사는 '표준새번역'과 '새번역' '개역개정판' '공동번역' 등의 성경 개정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 설교는 지난 2018년 5월 27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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