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 ©기독일보DB

[기독일보 조은식 기자] 한국교회 저명한 신학자인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가 본지에 기고한 "퀴어 신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 5번째 글을 통해 "퀴어 신학이 자연스럽다고 하는 동성애는 성적 변태요, 어긋남이요, 부자연스럽다"고 비판했다.

김영한 박사는 동성애에 대해 "창조 질서가 아니기 때문에 괴기하고 부자연스럽다"고 지적하고, "동성애는 천부적인 것이 아니"라며 "이것은 의학연구팀에 의해서도 증명된 것"이라 했다. 그는 "성적 사랑과 우정이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동성애는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것"이라며 "동성애는 이성애의 변태이며 어긋남이요, 창조의 다양성이 아니"라 이야기 했다. 다음은 김 박사 기고글 전문이다.

"퀴어 신학이 자연스럽다고 하는 동성애는 성적 변태요, 어긋남이요, 부자연스럽다"

퀴어 신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IV)

머리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신앙인이 아닐찌라도 동성애는 자연스럽지 않는 것으로 느낀다. 그것은
창조주께서 사랑이나 성적 결합은 동성끼리가 아니라 남녀 간에 이루어지도록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창조주에 의하여 인간에게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젠더주의자들은 이러한 인간이 태어나는 생물학적 질서를 부인하고 성을 사회학적인 산물로 여기고자 한다. 젠더주의자들은 인간이 자기의 성을 스스로 결정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태어 날 때 주어진 생물학적 자연의 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럴 때 창조 질서가 무너지고 개인의 성적 정체성과 가정과 사회의 존속이 허물어지는 것이다. 동성애에서는 자녀들의 생산이 없기 때문이다. 동성 결혼이 아니라 이성 결혼이 창조의 질서요 창조주의 섭리다. 창조의 섭리와 질서를 어겨서는 인간과 문화와 사회는 존립할 수 없게 된다.

한국갤럽이 2017년 5월 30일부터 6월 1일까지 사흘간 전국 성인 1,004명을 대상으로 동성애자 커플에게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 즉 동성결혼 법적 허용에 대해 물은 결과 34%가 '찬성'했고 58%는 '반대'했으며 8%는 의견을 유보했다. 2001년 조사에서 찬성 17%, 반대 67%였던 것과 비교하면, 16년간 찬성이 17%포인트 증가했고 반대는 9%포인트 감소했다. 그러나 2년 6개월 전인 2014년 12월과는 비슷한 수준이다. 동성 결혼 찬성이 늘어난 것은 젠더이데올로기에 의한 퀴어 축제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런데도 여전히 반대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동성애가 정상적인 사람들의 생리에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한국갤럽 - 동성결혼, 동성애에 대한 여론조사 (2001/2014/2017년 비교) 한국갤럽 Report 2017. 6. 8. 18:02 복사 https://blog.naver.com/gallupkorea/221024656901)

퀴어신학은 동성애가 자연스럽고 창조의 다양성과 풍부함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성경의 증언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왜곡하는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1. 동성애는 괴기하고 부자연스럽다. 창조 질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퀴어 신학자들은 동성애가 자연스럽다고 다음같이 주장한다: “동성애는 부자연스럽고 잘못된 것이 아니다. 많은 생명체들과 동물들도 동성애를 하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 사회에 동성애는 존재했다. 생물학적으로나 인류학적으로 동성애는 다수는 아니라도 결코 부자연스럽고 잘못된 것이 아니다. 언제나 자연생명들 속에, 그리고 인간들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동성애는 있어왔다.”(박경미, “한국교회의 성소수자 차별에 대한 여성신학자, 여성 기독교인들의 입장,” 2012년 10월 2일)

이러한 주장은 인류문화적인 관습과 성경적 가르침과는 배치된다. 동성애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 사회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곧 동성애가 자연스럽고 정당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동성애는 소돔 고모라나 베냐민 땅 기브아, 희랍 시대와 로마 시대 등 어느 시대에도 있었다. 성경이 동성애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인 성 질서에 관한 하나님 계명에 어긋남이요 생물학적 질서의 왜곡으로 역리요,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경고해주는 것이다. 성적 결합이란 결혼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 창조 질서이다. 동성 끼리 성적 결합이란 창조의 섭리가 아니고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 그러한 행위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해부학적으로 서로 짝이 되는 성기가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성기와 배설기관이 결합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당시 로마 시대의 동성애로 인한 성적 질서의 도착(倒錯)에 관하여 경고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kata phusin)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para phusin)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롬 1:26-27). 사도 바울은 이 구절에서 로마시대의 동성애 행위가 이성애라는 순리(順理)의 행위가 아니라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역리(逆理)라고 하나님의 뜻을 선언한 것이다.

보스웰이나 맥닐은 이 구절이 모든 동성애가 아니라 일탈적 동성애를 비난한 것으로 주장한다. 이들은 “푸신”(phusin, 자연)을 타고난 개인의 성적 본성 혹은 성향으로 해석하고, 전통적인 의미인 자연 내지 본성(nature)으로 해석을 거부한다. 보스웰은 바울이 모든 종류의 동성애를 역리로 본 것이 아니라 개인의 성적 본성에 거스러 행한 동성애 행위를 역리로 보았다고 해석한다(John Boswell, Christianity, Social Tolerance, and Homosexualit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0, 109-112). 보스웰과 맥닐은 바울이 그리스-로마 시대 사상과 유대교 전통의 “푸신”(자연) 이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일부사람들의 성적 일탈로서 동성애 행위를 역리로 정죄한 것으로 해석한다(John McNeill, “The Homosexual and the Church,” in Moral Issues and Christian Response, eds. Paul Jersild and Dale Johnson, New York: Holt, Rinehard and Winston, Inxc. 1988, 157-158). 그러나 “푸신”(자연)의 바른 이해는 개인적 본성이나 성향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시 지으신 인류 전체가 갖는 본성과 자연으로 해석해야 한다(Richard B. Hays, The Moral Vision of the New Testament: A Contemporary Introduction to New Testament Ethics, 유승원 옮김, 『신약의 윤리적 비전』,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2, 578; 신원하, “성경, 동성애 그리고 기독교 윤리,” in: 기독교 동성애 대책 아카데미, 2017, 53-70, 특히, 67).

성이 개방된 오늘날에도 동성애는 여전히 세계 많은 나라에서 금기시 되고 비록 허용되드라도 동성애는 성소수자들의 행위라는 사실이다. 동성애 지지자들이 자연 생물들 속에, 인류문화적인 관습에 동성애가 있어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동성애의 자연스러운 일을 증명하는 것이 못된다. 마약, 도둑질, 절도, 거짓말, 탐욕, 살인 등이 인류 역사에 있어왔다는 사실이 이러한 행위들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말해주지 못한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처럼 인간의 타락된 본성이 표출되어 동성애는 이성애가 변태적인 성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2. 동성애는 천부적이 아니다. 이것은 의학연구팀에 의하여도 증명되었다.

퀴어 신학자들은 동성애가 천부적, 유전적이라고 주장한다: “한국교회가 만일 동성애를 부자연스럽고 잘못된 죄악으로 정죄한다면, 그것은 자연생명과 인간에게 동성애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정죄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연생명과 인간을 잘못 창조했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퀴어 신학자들이 동성애가 하나님의 허락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위에 밝힌 성경 구절(동성애는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행위)에 배치되는 것이다. 신구약 성경 어느 구절도 동성애를 인정하는 구절은 전혀 없다.

그리고 동성애가 천부적이라는 주장은 의학적인 검증을 통과하지 못했다. 동성애가 선천적이라는 주장은 동성애 의학자인 해머(D. H. Hamer)의 영향에 기인한다. 그는 1993년 두명의 남성 동성애자 형제가 있는 40가계의 X염색체를 조사하여 X염색체 위에 있는 Xq28과 남성 동서애 사이에 높은 관련성이 있다고 「사이엔스」(Science) 학술지에 발표하였다. 그는 동성애는 99% 이상이 유전이라고 주장하였으나 그의 이론은 의학자 라이스(G. Rice)에 의하여 도전받았다. 1999년 라이스는 52쌍 동성애자와 33쌍 일반인을 비교하여 Xq28이 남성 동성애와 관련이 없다는 연구결과를 「사이엔스」(Science)에 발표하였다.(G. Rich et (1999),“Male Homosexuality: Absence of Linkage to Microsatellite m28arkers at Xq28,” Science 284. 665.; 길원평, “동성애의 유발요인과 보건적 문제점,” in 김영한 외, 『동성애, 21세기 문화충돌』, 킹덤북스, 2016, 507.) 이어서 2005년에는 해머를 포함한 연구팀이 456명을 대상으로 전체 게놈과 동성애의 상관관계를 조사한 결과, Xq28은 동성애와 상관관계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B. S. Mustanski, et (2005), “A Genomewide Scan of Male Sexual Orientation,” Human Genetics 16. 272 길원평, “동성애의 유발요인과 보건적 문제점,” in 김영한 외, 『동성애, 21세기 문화충돌』, 킹덤북스, 2016, 507.) 그리하여 의학적인 연구실험에 의하여 동성애는 생물학적 유전적인 요인에 의해서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는 확실한 결과를 획득한 것이다

3. 성적 사랑과 우정은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동성 간의 깊은 교감은 육체적인 차원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을 우정(友情)이라고 한다. 동성 간의 교감을 육체적인 성행위로 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가 아니고 신체 해부학적으로 맞지 않다. 퀴어 신학자들은 동성애와 이성애를 성적 사랑의 다른 방식으로 다음같이 본다: “동성애와 남녀의 사랑은 성적 사랑의 서로 다른 방식이다. 동성애와 남녀 사랑은 둘 다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남녀의 사랑이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라면, 동성의 사랑도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다. 남녀의 사랑과 동성의 사랑은 어느 것이 좋고 나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일 뿐이다. 남녀의 사랑에서 벗어난 동성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이 더욱 깊고 다양하고 풍부한 것임을 인정하게 된다.” 위 문장에서 퀴어 신학자들은 성적 사랑과 우정의 관계를 혼동하고 있다.

'동성 간 우정'은 성적 사랑이 아니라 마음의 사랑이다. 동성애와 '동성 간 우정'은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동성 사이에도 성격적으로 다르고 차이가 있어서 서로 끌릴 수 있다. 그러나 동성 간의 끌림은 정신적 관계지 성적인 관계는 아니다. 이는 창조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성적으로 서로 끌리는 것은 이성 간에 끌리는 것이지 동성 간에 끌리는 것이 아니다. 자연만물과 생명과 인간정신에는 서로 비슷하고 같은 것끼리 가까이 하고 끌리는 성향은 천부적인 우정이 있기 때문이다. 비슷하고 같은 것끼리 사귀고 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당연한 것이다. 이는 동성애가 아니라 동성 간에 이루어지는 정신적인 교감이다. 비슷하고 같은 성을 가진 인간들이 서로 끌리고 좋아하는 것은 정신적인 교통(交通)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육체적인 교통(게이들의 항문성교, 레즈비안들의 성적 교통 등)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동성 간의 성적(性的) 교통(交通)은 변태적인 소통으로서 자연(phusin)의 질서에 어긋나기 때문에 정상인에 의하여 비난받고 심지어 정죄받는 것이다. 그것은 창조주가 내리신 우정이라는 동성 간의 정신적 교통을 신체적인 성적 교통으로 바꾸는 것으로 자연(phusin)에 반하는 것이다. 창조질서인 몸의 질서에 반하기 때문에 몸이 스스로를 더럽히는 것이다.

4. 동성애는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것이다.

퀴어 신학은 “동성애가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라고 다음같이 말한다: “서로 다른 것을 두려워하고 미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겸허하게 기쁘고 고마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동성애를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에 더욱 가까이 다가설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에 충실하여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계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정상인들은 동성애자(성 소수자)를 미워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동성애 행위가 창조주가 내리신 몸의 질서에 맞지 않기 때문에 회피하고 그 행위 자체를 혐오하게 되는 것이다. 동성애자의 인격을 혐오하는 것은 아니다. 정상인이 동성애자를 인정하고 존중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천부적인 몸의 질서와 생리 때문이다. 그리고 기독교 신자들이 동성애자를 은총과 축복으로 받아 들일 수 없는 이유는 퀴어 성경의 증언(레위기 18장과 20장의 동성애 금지법)이 퀴어신학의 견해와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면서 모세를 통하여 동성애를 비롯한 이방인들의 가증한 풍습을 본받지 말라고 명하신다: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레 18:22). 하나님은 동성애 행위가 가나안 이방인들의 가증한 풍속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런 풍습을 행하는 것은 스스로 더럽히는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이 가증한 모든 일을 행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내 명령을 지키고 너희가 들어가기 전에 행하던 가증한 풍속을 하나라도 따름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8:29-30). 하나님은 가난안 족속들이 여자와 여자가 동침하고, 남자와 남자가 동침하는 것은 스스로 더럽히는 가증한 풍습이라고 평가하신다. 이러한 가증한 풍습을 행하는 자들은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5. 동성애는 이성애의 변태이며 어긋남이요, 창조의 다양성이 아니다.

가정이란 동성 사이에 성립되는 동성애로 이루어지지 않고 남녀 사이에 성립되는 이성애로 이루어진다. 동성애는 원죄에 의하여 생겨난 이성애의 변태다. 그런데 퀴어 신학자들은 동성애 거부는 창조세계의 다양함과 풍부함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다음 같이 왜곡하고 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을 기쁘고 고맙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서로 다르게, 다양하게 창조한 하나님의 세상에서 사랑의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동성애를 거부하고 비난하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다양함과 풍부함을 비난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것을 두려워하고 미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겸허하게 기쁘고 고마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동성애를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에 더욱 가까이 다가설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에 충실하여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계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동성애를 인정하고 존중하라고 퀴어 신학자들은 주장하나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일을 그의 백성들은 행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퀴어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동성애가 창조 질서의 다양성과 풍부함이라고 말할 수 없다. 마약 사용과 중독, 알콜 중독, 노름 탐닉은 창조질서의 일탈이지 다양성과 풍부함이라고 말할 수 없듯이 동성애는 성적 일탈, 변태이지, 성적 다양성과 풍부함이라고 말할 수 없다. 정말 동성애가 성적 다양성과 풍부함이었다면 하나님이 이를 허용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허용은 커녕 동성애 행위는 가증스러운 행위요, 스스로 더럽히는 것이라고 금지하시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서 동성애를 받아들이는 것은 이방 세상의 풍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동성애는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된다고 성경은 우리들에게 경고해주고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동성애자들(탐색하는 자, 남색하는 자)을 음행하는 자, 우상 숭배자, 도적질 하는 자, 술 취하는 자들과 동일한 부류로 분류하고 이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경고하고 있다(고전 6:9-10). “남색하는 자”(άρσενοκοίται, 아르세노코이타이)는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 레위기18장22절과 20장13절에 등장하는 동성애자(homosexuals)를 표현하기 위하여 고안되어 사용한 신조어였다. 이 용어는 남성 동성애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하는 자를 뜻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은 이전의 이방인의 그릇된 풍습에 있었으나 이제는 이러한 풍습을 끊어 버림으로 씻음을 받아 거룩하게 되었다고 천명하고 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11). 고린도교회 교인들 중에는 예전에는 동성애자들이 있었으나 회심하여 복음을 받아 들이고 난후 이러한 가증한 일에서 벗어나 씻음으로 받아 거룩하게 되었다고 바울은 증언하고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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