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일과]
1) 시편 111편 - 주님이 하신 일을 찬양하라
2) 신명기 18:15~20 - 예언자를 보낼 약속
3) 고전 8:1~13 - 우상에 바친 제물을 먹는 문제
4) 마가복음 1:21~28 - 악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심으로 권위를 보이심
추가 본문 : 마태복음 28:18~20 -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1. 성서일과의 사색
1) 시편 111편 - 주님을 찬양하라
이 시는 이어지는 112편의 시와 함께 각 행의 첫 글자가 히브리어 자음문자 알레프에서 타우까지 22자의 순서로 시작하는 시로 유대인들이 포로생활에서 풀려난 것을 기념하는 3대 명절에 주로 부르는 노래다. 이스라엘 역사를 회고하면서 역사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주의 백성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며 찬양하자는 노래이다.
이 시처럼 알파벳 순서로 첫 줄을 배열라면서 시를 부르게 되면 자연히 대중이 예배에서 쉽게 암송될 수 있는 장점을 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정리된 생각이나 논리적 일관성을 살리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10절은 이 시를 정리하면서 주는 말씀이다. "주님을 경배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바른 깨달음을 얻으니, 영원토록 주님을 찬양할 일이다." 이 시편보다 훨씬 뒤에 기록된 욥기 28장에서 욥은 지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욥 28장 - 사람들이 아무리 귀한 귀금속이나 보석을 찾는 방법을 알지라도 지혜의 본질을 알 수 없다. 오직 주님만이 아신다고 하면서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요, 악을 멀리하는 것이 슬기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잠언 9장 10절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이를 아는 것이 슬기의 근본이다."라는 말씀을 연상한다.)
이 시에 나오는 지혜의 근본은 오늘 우리들이 묵상하려는 참 권위의 문제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
2) 신명기 18:15~20 - 예언자를 보낼 약속
모세와 같은 예언자 한 사람을 일으켜 세워 주실 것을 약속하시는 말씀이다.
18절에는 "너와 같은 예언자 한 사람을 일으켜 세워,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줄 것이다. 그는, 내가 명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다 일러줄 것이다." 그리고 19절 "그가 내 이름으로 말할 때에, 내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내가 벌을 줄 것이다." 라고 하면서 그의 말에 권위를 위임할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나의 뜻을 떠나 제 마음대로 말하거나 다른 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예언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신다(20절). 예언자에게 주어진 권위의 한계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여기서 예언자 한 사람은 사본에 따라서는 단수가 아닌 복수 형태로 읽을 수 있어서 "예언자들"로 읽을 수도 있다.
9절 이하의 구절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교도들의 풍속에 빠져들지 말 것을 경고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 세워질 예언자의 말씀을 따를 것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19절과 20절의 말씀을 읽으면서 관연 어느 예언자가 하나님을 대변하는 예언자임을 알 수 있을까?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 예레미야 28장의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이야기를 연결시켜 볼 수 있다(예레미야 28장을 인용). 2년 안에 포로생활을 마감하고 돌아온다고 주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 하나냐의 예언은 결국 하나님의 뜻이 아닌 거짓, 그리고 거짓 예언자임이 드러나고 만다. 예언자에게 주어주는 예언의 권위의 진위를 어떻게 파악하고 분별해 낼 수 있겠는지 그 답을 풀어내는 실마리이다.
오늘 이 시대 예언자,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성직자들이 과연 "나는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전하고 있는가?" 되돌아보는 성찰과 겸손함이 강조되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깊은 공부가, 더 철저한 사색이 필요하다. 말씀이 씌어졌거나 선포된 역사적, 사회적 상황이나 문맥에 대한 세밀한 탐구, 그렇게 이해한 문맥 속에서 읽어낸 Text가 오늘의 Context속에서는 어떻게 읽어내야 하는 지를 바르게 옮겨내는 겸손함, 그리고 철두철미한 해석의 결과를 드러내야 할 것이다. 역사를 주관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이 오늘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당신의 뜻을 삶으로 풀어내야 하는 지를 찾아서, 그 말씀을 선포하는 이가 바로 오늘 우리 시대의 예언자일 수 있기 때문이다.
3) 고린도전서 8:1~13 - 우상에게 바친 제물의 문제
이 부분은 당시 고린도 공동체의 영지주의들과 자유 분망한 사람들의 태도에서 발단한 문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특히 6:12~13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에도 제재를 받지 않겠습니다. "음식은 배를 위한 것이고, 배는 음식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저것도 다 없애 버리실 것입니다.]는 말씀과 연계하여 읽어야 할 부분이다. 기본적으로 복음서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 즉 "무엇이든지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서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막7:15)"는 말씀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만한 지식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 행동이 다른 이들을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아무 쓸모없는 짓임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1절 후반에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라는 말씀은 지식이 있다고 자만하는 이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삶을 살아내야 하는 지를 깨우치는 말씀으로 와 닿는다. 자유의 활용은 사랑의 의무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한다. 우상에 바쳐진 제물에 관한 문제는 동서고금을 통해 모든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제기되어 왔던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나라의 오랜 제사풍속과 제사음식에서 우리가 얻는 경험과 지식도 떠올려볼만한 사례이기도 하다. 바울은 이 문제를 주님의 최후의 만찬과 연결시켜 놓고 있는 것을 이어지는 10장 16절 이하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필요시 인용)
역사 속에서 많은 지식을 가진 자들이, 다른 말로 말하면 정보를 독점하거나 통제하는 자리에 있는 자들이 결국 권력과 권위를 누리는 것이 당연시 해왔던 사례를 수없이 찾아볼 수 있다. 16세기말 경험론 철학자 F. Bacon이 한 말, '아는 것이 힘이다(scientia est potentia).' 가 격언으로 남아있다. 그는 자연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쌓았을 때, 인간은 비로써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이 명제를 강조한다.
참된 지식은 우리의 무지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참 배움은 사람들을 뽐내게 하는 것이나 우쭐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하는 것이다. 오로지 유익한 지식은 사랑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무엇을 알고 있다는 우리의 지식은 단지 지금까지 알아왔던 한 점 조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무엇을 알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아직 몰랐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다. 그런 지식은 순간에 날아갈 수 있는 자기교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1절의 말씀을 다시 묵상한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삶의 본질에 관한 것이 아닌, 단지 무엇을 먹을 것이냐 아니냐와 같은 얄팍한 지식으로 형제자매를 실족시키는 일은 근본적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의 결핍으로 간주하는 바울의 입장을 읽어낼 수 있다.
4) 마가복음 1:21~28 - 가버나움에서의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의 1장 14절부터 9장 50절까지는 갈릴리에서 시작하신 예수의 공생의 활동 기록이다. 시몬 베드로와 요한 등 제자를 부르신 직후 예수의 첫 번째 행선지는 가버나움이었다. 갈릴리 호수(폭이 10킬로, 길이가 19킬로) 북쪽 끝에 위치하고 프톨레마이스에서 다마스쿠스까지의 고속도로 상에 위치한 도시로 세관이 있었던 갈릴리에서 매우 주요한 지역이었다고 본다.
이곳 회당에서 안식일에 말씀을 전하신 예수는 곧바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그의 가르침이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달리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22절에서 밝히고 있다. 서기관들은 정규학교에서 학식이 풍부한 선생으로부터 철저하게 전통을 따라 율법을 공부한 공식적인 선생이고 해설자였다.(7: 9, 13 참조) 반면 예수는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아니한 평범한 일반인이었지만, 성령의 영감과 직접적인 권위를 갖고 가르치셨다. (참조 요한복음 7:15~16 "유대 사람들이 놀라서 말하였다. '이 사람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저런 학식을 갖추었을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은 사람들의 새로운 삶의 희망을 보여주었지만, 기존의 전통과 권위를 지켜 내야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적개심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오늘의 성서일과 본문들 속에서 우리는 무엇이 참 권위이고, 무엇이 가짜 또는 거짓 권위인지를 분별해야하는 숙제를 안게 된다. 오늘 택한 본문 마태복음 28장 18절 이하는 권위의 본질, 그리고 권위를 바탕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위대한 사명(19절)과 위대한 약속(20절)을 접하게 된다.
2. 참 권위와 가짜 권위
1) 호가호위(狐假虎威, an ass in a lion's skin) 이야기
중국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선왕(宣王) 때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다. 선왕이 신하들에게 북방의 오랑캐들이 우리 재상 소해휼을 매우 두려워한다는 것이 사실이냐고 묻는다. 이 때 대신 강을이 이렇게 대답한다. 호랑이에게 잡힌 여우가 자신은 하늘 황제의 명을 받고 백수의 제왕으로 임명되었는데, 나를 잡아먹는 것은 그 분의 명을 어기는 것이다. 내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내가 앞장설 테니 내 뒤를 따라와 보라고 하면서 호랑이를 뒤따라오게 하고 앞장서 가면서, 뭇짐승들이 여우를 보기만 하면 달아나는 것을 보여준다. 실은 여우 뒤에 따라오는 호랑이를 보고 달아나는 것인데, 마치 여우를 보고 달아나는 것처럼 되었다고 하면서 오랑캐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재상 소해휼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대군을 거느린 대왕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찌 여우를 호랑이에 비할 수 있겠느냐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시대의 교회가, 아니 많은 목회자와 교인들이 마치 예수를 가리고 자신을 앞세우며 '호가호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이야기로 참 권위와 가짜 권위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싶다.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심지어 사실을 전하는 뉴스까지 '가짜뉴스(fake news)'를 가려내기 위해 '팩트 체크(fact check)'해야 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의 운명인 것 같기도 하다.
2) 권위는 어떤 모습인가?
사전적 의미의 권위는 어느 개인이나 조직, 관념이 사회 속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고 그 사회의 성원들에게 널리 인정되는 영향력을 지닐 경우, 이 영향력을 의미한다. 권위는 그 영향력이 미치는 영역에 따라 도덕적 권위, 또는 정치적, 과학적 권위 등으로 나뉜다. 베버(M. Weber)는 지배자의 권위에 한정하여 3가지 유형의 권위를 말한다. 첫째, 카리스마적 권위로 이는 비일상적인 사건을 실현할 수 있는 초월적 힘을 발휘함으로 얻어진다. 둘째, 전통적 권위는 오래 전부터 인정되어 있는 전통적인 의식에 따름으로서 지배자가 권위를 얻는 것이다. 셋째, 합법적 권위는 법률의 범위 내에서 권위를 집행하는 경우이다.
(1) 사회과학에서의 권위
정치학이나 행정학, 경영학 등에서 조직 관리를 다룰 때 반드시 다루는 개념의 하나가 권위의 문제다. 언론학에서도 언론이 어떤 원리와 철학을 가지고 제도가 만들어지고 운영되느냐를 다룰 때, 권위주의이론이 가장 오래된 이론의 하나가 되어있다. 언론학의 고전으로 불리는 [언론의 4이론]에서는 권위주의, 자유주의, 사회적 책임주의, 소비에트 공산주의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권위주의이론은 권위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조직사회의 기능이나 목적에 관한 권위주의이론에서 개인은 집단을 통해서만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에 개인보다는 집단이 보다 큰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개인은 국가의 존재 없이는 문명인으로서의 속성을 발전시킬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집단 조직의 최고 표현인 국가가 가치 척도에 있어서 개인을 대치한다는 명제를 발전시켰다. 보다 고도의 문명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개인은 국가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은 모든 권위주의 체제에 공통된 요인이었다.
특히 고대 플라톤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소수의 현인(wise men)들에 의해 지배되는 체제를 이상을 한다. 국가는 도덕적 권위가 명하는 대로 행동하고, 또한 이 권위를 서민계층의 통치를 위하여 행사하는 현인들, 즉 통치자 계급이 장악하고 있는 경우에만 안전하다고 생각하였다. 인간 개개인의 자유나 선택의 여지는 전혀 허용하지 않는 철저한 소수 엘리트에 의한 통치를 이상사회로 생각할 정도였다.
중세이후에도 이런 사상의 흐름은 지속되었다. 마키아벨리, 홉스, 헤겔과 같은 이들의 저작을 통해 국가의 권위를 강화하고 인정하는 입장이 확대되어 갔다. 국가의 안정과 전진이 최고의 것이지, 시민 개개인의 사정 등은 2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영국의 토마스 홉스의 국가의 본질 및 국가와 인간의 관계에 관한 이론은 17세기 정부의 권위주의적 정책 대부분을 정당화하는 데 공헌했다. 그의 최대의 저서인 <리바이어던, Leviathan>은 많은 비판과 논쟁에도 불구하고, 그 후 수세기 동안 여러 정부의 자의적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인용해올 정도였다. 결국 진리란 시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지도하고 명령하는 지위에 있는 소수의 현인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며, 진리는 권력 중추에 집중되어있다는 신념을 버리지 않는다.
(2) 성서에서의 권위(eksousia, εξουσια)
그리스어를 독일어로 옮겨 논 바우어의 헬라어사전(Griechisch - deutsches Woerterbuch)과 토마스 그린의 Greek-English Lexicon에서 권위에 대한 여러 의미를 찾아보았다.
① 선택의 자유, 마음대로 처리하는 권리 (요 10:18, 고전 9:4~6, 히 13:10, 살후 3:9, 계 13:5)
② 실행하는 능력, 역량, 재능, 권능, 힘(마 9:8, 막 3:15, 눅 4:32, 눅 12:5, 행 8:19, 계 9:19)
③ 권위, 절대적 권력, 전권, 권한((마21:23,24,27, 마 28:18, 막 11:28, 29, 눅 20:2,8, 막 13:34)
④ 통치자 혹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가진 권력, 권세(눅 20;20, 눅 7:8, 12:11, 롬 13:1~3)
성서에 나타난 권위(eksousia, εξουσια)는 이처럼 폭 넓게, 다양한 범위와 형식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그 정확한 의미를 읽어내는 것은 그 단어가 사용된 문맥과 상황을 면밀히 고려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의 성서일과중 하나인 마가복음 1:22, 27에 나오는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라는 부분에 한정해서 문맥과 행간을 읽어보고자 한다.
대개의 권위 있는 가르침은 제도화된 교육기관이나 과정을 필하여 일정한 자격을 얻은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얼마나 많이, 얼마나 오랜 동안 그 분야의 전문성을 얻기 위한 과정을 필하고, 업적을 남기고 있는지를 따지는 것이 상례이다. 석사, 박사는 어디서, 얼마나 오랜 동안 공부하고 어떤 학문적 업적을 남겼는지를 따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전통적인 교육과정을 필하고 율법학자가 된 서기관들이 나름의 권위를 갖는 것은 그래서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정규교육을 받지 아니한 나사렛 목수 예수의 가르침이 왜 그토록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었는가?
우리는 두 가지 성서 본문을 떠올려보려고 한다. 하나는 오늘의 성서일과 중 하나인 고린도전서 8장 1절 후반의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라는 말씀과, 지난 주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 62편 11절과 12절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한 가지를 말씀하셨을 때에, 나는 두 가지를 배웠다. '권세는 하나님의 것'이요. '한결같은 사랑도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지식이 힘이고 권력이 되는 것이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세상의 이치이다. 물론 권위주의시대에는 소수의 엘리트나 현자들이 독점하던 지식이었지만, 인간의 자유를 기본으로 하는 오늘 우리 시대에는 누구라도 지식에의 접근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교묘한 방법으로 지식의 통제나 제어를 통한 힘의 왜곡이 일어나고 있는 것도 우리가 목도하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동반하지 아니하는 지식, 힘, 권세, 권위는 참다운 것이 아니다. 참 권위는 사랑을 동반하거나 사랑의 결과로 드러나는 것이어야 한다. 시편 62편 기자의 노래처럼 하나님의 두 모습, 권세와 사랑, 이 둘이 구별되거나 분리되지 아니하여야 하나님의 참 모습에 접근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사랑이 배제된 지식, 사랑이 결여된 권세, 그 것은 참 권위가 아닌 가짜 권위일 수밖에 없다.
3. 맺는 말 - 참 권위를 드러내신 주님
예수 없는 교회, 예수를 가장한 목회자, 사랑이 배제된 권력과 권위의 위선, 마치 삼위의 하나님을 등에 업은 것처럼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오늘의 한국교회, 종교개혁 500주년을 아무런 반성과 뉘우침 없이 보내고 또 한 해를 맞는 교회, 그리고 그 교인 - 우리 또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통렬하게 반성하는 모습을 잠시라도 갖고 싶다.
참 사람으로 오신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천착하며 보내야하는 주현절, 이제 사순절의 시작도 얼마 남지 않은 주현절의 끝자락에 들어선 우리는 참 권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주님이 스스로 드러내신 권위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 내면이 어떤 것인지를 조용히, 그러나 세밀하게 묵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오늘의 성서일과를 통해 주시는 메시지는 진정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참 모습, 사랑의 모습으로 채색되고 그런 옷을 입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 주님의 참 권위의 모습을 읽어내며, 우리 삶의 옷깃을 여미어야 할 때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교회의 훼손된 공동체의 복원, 창조질서의 회복은 우리 앞에 놓인 과제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아울러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주님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남기신 위대한 사명과 약속, 마태복음 28장 19절과 20절의 말씀을 묵상하며 주현절 넷째 주일을 보내야 하겠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 강대인 교수는 미디어시민 모임 이사장(현)으로 방송위원장, 한국방송학회장을 역임했으며 건국대 언론정보대학원장, 계명대 사회과학대 학장 등을 지냈다.
* 설교는 지난 2018년 1월 28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현절 넷 주일예배 설교문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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