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년에 대한 오해
최근 부동산 문제와 관련하여 국내 정치권은 때 아닌 토지 공(公) 개념 공방이 불거졌다. 여당 대표가 국회 연설에서 헨리 조지(Henry George, 1839~1897)라는 한 인물을 소개하며 그가 살아 있었다면 땅의 사용권은 인민에게 주되 소유권은 국가가 갖는 중국 방식을 지지했을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왜 갑자기 헨리 조지 이야기가 나온 것일까? 그의 주장이 그렇게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것일까? 그가 기독교 신앙적 배경을 가진 인물이었으니 그의 주장도 절대적으로 옳은 것일까? 그의 주장이 옳다면 토지만 공 개념을 가지는 것은 반쪽만 옳은 것이고 오히려 토지와 자본 모두를 국가 소유로 하는 마르크스주의가 더 완전한 유토피아적 주장이고 성경적 주장이 아닌가? 결론부터 말하면 대단히 한심하고 위험한 주장이다. 전혀 성경적이지도 않다. 성경과 경제학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부족한 대단히 미숙한 주장일 뿐이다. 희년은 헨리 조지가 생각한 그런 단순한 토지법이 전혀 아니었다.
국내 소개된 헨리 조지의 경제학
헨리 조지가 국내 정치권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과거 야당이었던 민한당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한 홍사덕 전의원이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경제학자로서 헨리 조지를 국내 방송과 언론에 소개하면서부터라 할 수 있다. 그만큼 헨리 조지는 그저 일부 (경제)학자들이 알고 있는 많은 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 헨리 조지가 기독교계에 알려진 것은 누구보다 성공회 사제였던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가 『신앙계』 등을 통해 줄기차게 헨리 조지의 토지법을 소개한데 기인한다. 대 신부의 칼럼을 읽고 고왕인 박사가 헨리 조지 협회를 만들었고 전국에 헨리 조지 관련 스터디 모임들이 생겨났다. 특별히 대구·경북권 (경제)학자들이 헨리 조지에 대해 유난히 관심을 보이면서 노무현 정부 청와대로 입성했던 지금은 은퇴한 경북대 이 모 교수가 노무현 정부 경제 골격을 구상하면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해 보려 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홍사덕 전 의원이나 헨리 조지를 국내 소개했던 대천덕 신부는 정통 경제학자나 신학자가 아니었다. 헨리 조지 자신도 정통한 신학자나 경제학자가 전혀 아닌 독학으로 경제 전문가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신학이든 경제학이든 독학하여 전문가의 반열에 오르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라도 대 신부의 글이나 헨리 조지의 주장이 마치 절대적 성경적 주장인 것처럼 몰고 가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 어떤 주장이든지 늘 찬반의 그늘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바른 믿음에 근거한 신앙적, 신학적 검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경제학은 그렇게 단순화 할 수 있는 이론이 아니다
하버드대 출신으로 한동대 부총장을 지낸 국내 최고의 경제학자 중 한분이었던 고 박을용 박사는 경제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와 유사하다고 했다. 경제(economy)라는 말은 본래 하나님의 경륜(오이코노미아)에서 온 말이다. '집'이라는 의미의 '오이코스'나 생태학을 나타내는 '이콜로지'도 모두 '오이코노미아'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들 단어들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통해서 알 수 있듯 생물이나 집이나 생태계처럼 경제는 단순화할 수 없는 이론이다. 하나님의 경륜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은 이렇게 이 단어에서 파생된 이 세상 '생태계'나 '가정사'의 복잡함과 다채로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경제는 바로 그런 것이다. 경제학자가 반드시 주식 투자에 성공하는 것도 아니요 최고 경제 전문가들이 최선을 다해 국가를 운영해도 우리가 체험한 것처럼 흑자 파산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 경제다.
헨리 조지는 독학의 경제전문가였다. 공식 교육은 14세까지가 전부였다. 따라서 그리 복잡한 경제 이론이나 용어들이 그에게는 필요 없었다. 그가 원고 없이 즉흥 연설에 능한 뛰어난 연설가였던 것도 그 때문이다. 중국의 쑨원(孫文)이나 톨스토이가 소설 부활에서 헨리 조지를 언급했다고 헨리 조지의 토지법이 탁월하고 복음인 것도 아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대단한 집중력과 통합의 예술성을 요구한다. 경제의 지휘자가 된다는 것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채로운 변수와 상황들을 유기적으로 잘 융합해야 하는 종합 예술가의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경제학의 이 같은 심오한 속성에 비해 헨리 조지의 경제학은 너무 소박하고 단순하다. 그렇다고 성경적 심오한 속성을 가진 것도 아니다. 이제 헨리 조지의 토지법이 참된 성경적 토지법이라 볼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 성경의 희년이 무엇인지 먼저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희년은 안식년과 연관된 법이다
희년은 출애굽 이후 안식년과 관련하여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린 유대의 법이었다. 애굽의 이스라엘 민족은 자기 땅이 없고 자기 법이 없던 민족이다. 그런 민족이 조상 아브라함이 먼 옛날 살던 가나안 입성을 할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613 가지 율법 가운데서도 아주 특이한 법을 준비한다. 바로 안식년과 희년의 법이다. 이 두 법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법이 아니었다. 즉 안식년을 지키지 않는 민족에게 희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안식년 준수와 아무런 연관 없이 오직 해마다 토지의 연간 임대 가치인 지대(地代)만 정부가 환수하고 다른 조세는 모두 면제해도 되는 지대 조세 제(land value taxation)를 실시하면 소위 만민이 만사형통할 수 있다는 헨리 조지의 토지법은 희년과 전혀 다른 법이었다.
희년은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선포하고 약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 법이다
먼저 안식년은 힘써 6년을 일하되 7년째에는 땅을 완전히 쉬어야 되는 법이다. 이때 파종과 포도원을 가꾸는 일이 모두 금지되었다. 저절로 자란 곡식이나 가꾸지 않은 포도송이도 추수는 금지되었다. 이들 안식년에 저절로 자란 농산물은 거두지 않을 뿐이지 방치하여 버리는 것은 아니었다. 안식년에 자란 이들 농산물들은 이스라엘의 종들과 품군과 이방 나그네와 가축과 들짐승의 몫이었다. 여기서 안식년 제도의 중요한 의미를 한 가지 찾을 수 있다.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방 나그네들과 가축과 들짐승까지 포함한 모든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와 사랑이다.
희년은 바로 그 연장선상에 있는 절기였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거나 안식년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들에게 희년 준수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지킬 수도 없는 율례였다. 사실 안식년 율례는 이스라엘조차 지키기 쉬운 법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당연히 우리 인간이 가진 보편적 죄성(罪性) 때문이다. 희년은 7년마다 돌아오는 이 안식년을 일곱 번 바르게 지킨 다음, 곧 49년이 지난 다음 50년째가 되는 해의 대 속죄일인 7월 10일 전국적으로 수양 나팔을 불며 이 날을 거룩한 해로 정하고 땅에 사는 모든 백성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율례였다. 안식년과 대 속죄일을 지키고 양각 나팔을 불지 않는 희년이란 희년이 아니다. 헨리 조지의 토지법에는 약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도, 안식년도, 대 속죄일도, 참된 자유함도, 양각 나팔도 당연히 없다.
희년은 믿음으로 지켜야하는 법이다
희년은 안식년과 관련된 법이요 반드시 수양 나팔을 불어야 하는 법이요 50년마다 돌아오는 법이요 대 속죄일과 관련된 법이라는 점 말고도 몇 가지 부가된 규례가 첨가되어 있었다. 먼저 희년에는 안식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안식년처럼 파종과 경작과 추수가 금지된다. 경작 금지는 안식년 포함 희년까지 2년이 연속되므로 유대인들은 파종하는 3년차 수확 때까지 도합 3년을 경작 없이 지내야 했다. 하나님은 6년째 되는 해에 추수할 때까지 묵은 양식이 떨어지지 않도록 복을 내려 대풍년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렇게 경작 없이 3년을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경작 없이 하나님께서 3년을 먹여주신다는 것을 믿는 다는 것은 보통 믿음이 아니다. 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히 12:6). 그리스도를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이 더 복된 이유다. 희년에는 이렇게 믿음의 요소가 담겨있다. 헨리 조지의 토지법에 3년 경작 금지나 3년 토지세 면제 제도가 있던가?
이외에도 희년 속에는 613개 율례 가운데 (336) 무엇을 사거나 팔 때에 부당한 이익을 남겨서는 안 되며(레 25:14). (337) 땅을 사고 팔 때 속이지 말며(레 25:14) (338) 말을 함부로 하여 이웃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되며(레 25:17) (339)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하며(레 25:23) (340) 희년에는 땅을 본래의 주인에게로 돌려주어야 하며(레 25:24) (341) 성곽 안에 있는 집을 판 경우에는 일 년 안에는 언제든지 다시 살 수 있으나, 일 년이 지나면 그렇게 할 수 없고 희년이 되어도 집은 본래의 주인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레 25:29, 30). 그 외에도 (342) 제사장 가문인 레위 사람의 땅과 집에 관한 규정(레 25:32-34), (343) 가난한 사람에게서 이자를 취해서는 안 되는 규정(레 25:36, 37), (344) 가난하여 종이 된 동족(同族)을 노예 부리듯 하지 말 것(레 25:39), (345) 동족인 종은 팔 수 없고(레 25:42), (346) 동족인 종을 심하게 부려서는 안 되며(레 25:43), (347) 종이 가나안 사람인 경우에는 그를 영원히 부릴 수 있다(레 25:46). 그리고 (348) 이교도들에게 동족이 종으로 팔려갔으면, 값을 치르고 그를 다시 되돌려 와야 한다(레 25:53)는 10여 가지 율례 항목이 추가되어 있다. 이렇게 모세가 시내 산에서 계시로 받은 율례인 희년 법과 단순한 땅의 토지법이요 경제법 체계인 헨리 조지의 토지법과는 전혀 유사성이 없는 것이다.
희년은 헨리 조지의 경제법과 달리 단순한 경제법이나 토지법이 전혀 아니다
희년은 신앙 없는 세상 사람들이나 성경을 겉핥기식으로 아는 미숙한 신자들이 제멋대로 아전인수식으로 이해하는 그런 <단순한 토지법이 전혀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백 년 애굽의 노예로 체념하며 살다 모세를 얼떨결에 하나님의 선지자요 지도자로 인정하고 애굽에서 탈출한 집단이다. 희년은 땅이 없던 이들 이스라엘 민족이 앞으로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를 하나님이 보내신 수장으로 모시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 치열한 전쟁 수행을 통해 이방 가나안 족속들을 점령하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내린 율례를 따라 안식년과 연계하여 지켜야 되었던 쉽지 않은 규례였다. 희년의 내용이나 은혜 시대의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어디에도 토지법만 바꾸면 모든 경제 문제가 해결된다는 실마리는 없다. 희년이나 예수님이나 토지법 문제가 '메시지의 중심'은 당연히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희년을 포함한 모든 율법에는 참된 인간 영생과 구원의 길이 보이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율법은 구원의 길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죄만 깨닫게 만드는 도구일 뿐임을 분명히 한다(롬 3:20). 여호와께서 엄하게 명한 율례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희년을 제대로 지켰다는 역사적 기록이 없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희년(율법) 아닌 성전 재건(주님의 오심)으로 완성된 율법
이스라엘의 솔로몬 성전은 주전 586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철저히 훼파되었다. 성경은 유대 백성들이 안식년을 비롯한 절기를 제대로 지키지 않고 불순종한 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샀으며 바벨론에 노예로 끌려간 근본 원인이었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사야서의 예언대로 바사 왕 고레스의 칙령에 따라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정치 지도자 스룹바벨과 종교 지도자 여호수아를 따라 극적으로 귀환한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놀랍게도 이들 지도자들에게 과거 선조들이 지키지 못했던 절기 준수가 아닌 성전 재건을 명한다. 유대 전통적 가르침을 전하는 미쉬나(Mishna)도 공식 견해로 바벨론 포로 이후 희년은 폐지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학개 선지서에 기록된 이 계시의 내용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미 무너져버린 과거의 일이 되어버린 솔로몬의 성전보다 더한 새 성전의 영광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이었을까?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는 것은 보이는 새 성전이었을까? 학개서 마지막 장(2장) 마지막 구절(2절)에 그 실마리가 있다. 스룹바벨이 받은 참된 복은 보이는 성전이 주는 복이 아니었다. 온 우주의 창조주요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택함 받은 자가 누리는 복이었다. 조금 나은 토지법이 조금 나은 땅의 복을 누릴 수는 있다. 하지만 솔로몬이 잠시 누린 세상 영광은 들의 백합화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보이는 소망은 참된 소망이 아니다(롬 8:24). 세상의 토지법이란 그저 잠시 잠간 보이는 소망일뿐이다. 성경은 토지법으로서의 희년이 아닌 참된 희년으로서의 온 세상 구주 '그리스도'의 오심의 진리를 담은 책이다. 그것이 바로 희년이 주는 참된 자유요 사랑인 것이다. 이제 헨리 조지의 토지법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계속)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