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야 멸망의 미스터리
최근 새 대통령이 국정과제에 가야사 연구와 복원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약간 뜬금없는 얘기일 수 있는데, 국정기획자문위원회 국정과제에 가야사 연구와 복원”도 넣어달라고 청원했다. 문 대통령은 “고대사가 삼국사 이후부터 다뤄지다 보니 연구가 제대로 안된 측면이 있고 특히 가야사는 신라사에 덮여 그런 면이 있다”며 “보통은 가야사가 경상남도를 중심으로 경북(북부 함창)까지 미치는 역사들로 생각을 많이 하지만 광양만, 순천만, 금강 상류 유역까지도 유적이 남은 아주 넓었던 역사”라면서 “영호남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좋은 사업”이라고 강조했다. 최근 연구와 발굴 성과에 의하면 대통령이 언급한 것처럼 전성기 가야의 영역은 오늘날 전남의 순천만과 전북의 남원과 장수 지역에까지 이르렀음이 밝혀지고 있다.
그런데 문헌 근거가 빈약한 가야사 가운데서도 가장 큰 미스터리는 이미 지난번 밝힌 바 있듯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과 달리 가락국은 건국부터 멸망 때까지 왕위를 부자가 상속하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당시 다른 삼국의 현실과 비교해 볼 때 그대로 수긍하기가 쉽지 않은 기록이다. 특히 가야가 멸망한 다음부터 김 씨(金氏)를 왕실의 성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 기록은 주로 수로 왕 후손이라 자처하는 김해 김 씨의 족보를 참조하여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삼국사기에 나타난 삼국 왕들의 평균 재위 연수가 신라 약 18년, 고구려 약 25년, 백제 약 22년 인 데 비해 김해가라는 수로 왕 즉위년인 주후 42년부터 제10대 왕 구형 왕 562년까지 평균 52.1년이나 된다. 그런데 전기(前期) 5왕의 재위 기간이 총 365년, 평균 73년인 데 비해 후기 5왕은 총 155년, 평균 31년이다.
그런데 <가라비문>에 보면 전기 5왕 당시 국구(國舅, 왕비의 아버지), 즉 왕비의 혈족들은 김해가라 특유의 관명인 반면, 후기 5왕 시절 국구의 관명은 신라의 것으로 바뀌어 있다. 이것은 두 가지 사실을 말해 준다. 하나는 초기 가야가 신라 박 씨 족의 갈문왕제가 아닌, 거란족의 국구장제를 따르는 스키타이 계열(즉 흉노 계열)이 지도층을 형성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가야 영역에서 금관, 동복, 철복 등이 발굴된 것도 가야가 북방계(흉노)의 흔적이 강하게 박혀 있는 정권이었음을 말해준다. 또 한 가지는 김해가라의 권력구조에 전·후기 사이 무슨 이유인지 분명 어떤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김해가야의 전·후기 역사 단절 기간은 상당히 길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전기 5왕들의 재위 기간을 어떤 식으로든 연장시켰다고 보아야 한다, 그때 수로왕의 재위 기간도 157년으로 대폭 늘어났다. 후기 김해가야는 자신들의 전기 역사 멸망의 단절기를 숨기고자 전기(前期) 5왕들의 재위 기간을 늘이는 동시에 시조 신화를 후기 가야 시대에 맞추어 당연히 각색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김해가야 전·후기 공백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마 백제 근초고왕(재위 346-375)의 영토 확장 시기, 가야 권력층에 큰 변고가 있었음이 확실하다. 이것은 후기 가야가 친 백제 성향의 정권이었던 점을 설명해 줄 수 있다. 즉 근초고왕의 영토 확장 이후 가야 지역은 백제 특유의 담로 지역으로 편입되면서 급속하게 친 백제 영향권 아래 들어간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즉 가야의 1차 붕괴는 백제 근초고왕 시기요 2차 붕괴는 신라로 인한 멸망이었을 것이다.
2. 가야 멸망 후 가야인들이 내륙 중원 땅에 나타난 이유는?
삼국 시대부터 중원(충주)땅은 늘 한반도의 중심이었다. 통일신라 중앙탑의 존재가 그것을 증거 한다. 삼국시대에도 고구려 제 2의 도시(국원성)였고, 통일 신라 시대에도 신라 제 2의 도시(중원경)로서 중심적 역할을 했고, 고려시대에도 충주 유씨(劉氏) 유긍달의 딸은 고려 태조왕건의 셋째 부인인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가 되어 고려 초기 중흥을 이끈 광종(光宗)뿐 아니라 태자 왕태(王泰), 훗날의 정종(定宗)과 문원대왕(文元大王) 왕정(王貞), 증통국사(證通國師) 등의 다섯 왕자와 낙랑(樂浪)과 흥방(興芳) 두 공주를 낳는다. 충주는 호족 유긍달 가문의 세거지요 8목의 하나로서 교통행정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수운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민관군과 노비와 민중들이 합세하여 세계 무적 몽골기병들을 강하게 물리친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유일한 고장도 충주였다. 조선시대에도 충주 고을은 팔도 전국에서 인구가 4번째로 많았던 고장으로 임진왜란 당시 탄금대 전투뿐 아니라 을미의병의 격전지로 일제에 격렬하게 저항한 고장이기도 했다. 일제와 충주 사이의 이 같은 역사적 구원(舊怨) 때문이었을까? 일제는 충주 발전에 방해가 된다는 명분을 핑계로 충주 읍성을 전략적으로 해체해버리고 도청 소재지도 교통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청주로 전격 이전해버리면서 충주 고을을 고사시키기 시작한다. 충주 100년 침체의 시작이었다. 주변 20개 군현을 다스렸던 곳으로 경기도 이천, 여주와 강원도 영월, 정선 등 그 영향력이 상당하였던 내륙의 이 중심도시는 그렇게 이제는 조용한 도시로 바뀌어버렸다.
이렇게 늘 한반도의 중심 도시였던 통일신라 중원경에 가야 사람들이 등장한 적이 있다. 무슨 이유였을까? 충주 사람들이 자랑하는 역사 속 명현 5인 가운데 3인이 통일신라시대 인물인 가운데 2인이 놀랍게도 가야와 관련성이 있다. 왜 가야인들이 오늘날 가파른 소백산맥의 계립령(오늘날의 조령)을 넘어 충주까지 이동해 온 것일까? 더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충주는 본래 임나국(任那國)이었는데 백제의 영토가 되어서는 낭자곡성(狼子谷城)이라 하다가 낭자성(狼子城)이라고도 하고, 미을성(未乙省)이라고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한반도에 두었다는 임나일본부의 그 임나가 지금의 가야 땅이 아니라 내륙 충주에 있었다니, 오늘날 역사학자들도 해석하는 데 고민이 많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우륵은 본래 가야국 궁중 악사였는데 가야가 어지러워지자 악기를 가지고 신라로 귀화하고, 진흥왕은 그를 국원(충주)에서 편안히 살게 해주었고 551년 진흥왕이 낭성에 갔을 때 우륵과 제자 니문을 불러 음악을 연주케 했다는 기록이 있다. 진흥왕은 다음 해 대나마 법지, 계고와 대사 만덕을 보내 업을 전수하게 하니 우륵이 그 기능을 헤아려 계고에게는 금(琴)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우륵은 우리나라 3대 악성 중의 한 사람이다.
신라 3대 문장가 중 한 사람이었던 강수(强首)는 중원경의 사량 사람인데 부친은 석체 나마였다. 태종무열왕 때 당의 사자가 와서 조서를 전하였는데 그 중에 알기 어려운 데가 있어서 무열왕이 강수를 불러 물었고 강수는 한번 보고 해석하여 설명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삼국사기』 강수전에는 강수가 중원땅 부곡(釜谷)의 풀무장이 딸과 야합하였고 유학을 공부하였으며 당대 제일의 문장가로 「답설인귀서」를 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열전에는 강수가 본래 임나가량(任那加良) 출신이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강수의 원적이 어쩌면 가야일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가야와 임나와 중원(충주)은 도대체 어떤 커넥션이 있었던 것일까? 그 미스터리를 푸는 작업은 그리 쉽지 않다. 앞으로 관련 학자들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다만 몇 가지 실마리는 알 수 있다.
첫째 신라는 멸망한 국가인 가야 유민들의 분산 작업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대가야가 멸망하면서 신라가 가야의 귀족들을 사민정책(徙民政策)에 의해 강제로 이주시키면서 주 세력들을 충주 중원경으로 이주 시켰음을 암시한다. 당시 중원에는 급격한 변혁의 분위기가 일어났음이 분명하다. 신라에서 온 귀족들 자제들과 가야 유민들 그리고 토착민들이 어우러지면서 급격한 문화적 융합이 일어났을 것이다. 충주를 배경으로 한 우륵과 강수와 충주의 관할권인 진천 출신의 가야 왕족 김유신 가문, 그리고 천하 명필 김생 등이 중원땅을 중심으로 활약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때 정말로 가야가 멸망한 기독교 국가였다면 중원 땅은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기 좋은 피난처로서의 산악지역과 중국과 이어지는 수로를 가진 천혜의 땅으로서의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둘째 가야인은 해양을 기반으로 발전한 연맹체였다. 가야인들은 낙동강과 황강과 남해 바다를 통해 일본 열도, 호남의 뱃길을 오갔고 멀리 중국과도 끝없이 교류하였다. 중원은 한반도 내륙에서 중국 당나라로 가는 남한강 뱃길의 시작점이었다. 가야 연맹체의 멸망으로 바닷길이 끊겼던 가야인들은 중원땅에 들어와서 다시 바다로 나갈 수 있다는 자신들의 새로운 희망을 보았을 것이다. 가야가 정말 기독교 국가였다면 중원의 뱃길은 당나라에 와 있던 선교사들과의 커넥션을 가능케 하는 요소였다. 강변과 천변은 고대 취락지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중원에는 충주천, 요도천 등 다양한 하천들이 남한강으로 유입되며 남한강과 달천강이 합류하는 탄금대 합수머리가 있다. 중원의 선사시대 유적이 목행, 동량의 하천과 용교, 가금, 금가, 단월, 앙성, 산척, 소태, 주덕, 이류, 신니, 칠금, 호암, 용탄, 중앙탑 등 하천과 강 주변 구릉을 중심으로 즐비하게 발굴, 수습되고 있는 것은 고대 중원지역의 취락이 어떤 형태로 형성되어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중원 고을에 노을이 지면 강과 하천을 따라 피어오르는 저녁연기는 정말 장관이었을 것이다. 이 같은 지형적 조건은 만일 가야 기독교인들이 정말 존재했다면 수원(水原)이 풍부한 중원은 고대 기독교인들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그 어느 도시보다 적합한 요소들을 품은 도시였다.
셋째 놀랍게도 중원과 가야는 한반도에서 가장 일찌감치 철 산업이 발달한 두 곳이었다. 고대 중원과 가야 지역은 마치 오늘날의 종합제철소와 실리콘 밸리를 가진 지역이었다. 3한 시대부터 고구려나 신라나 백제나 가야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서 철산지와 제철 관련 장인들을 확보하는 일은 그 어느 일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당시 철은 화폐 대용으로도 쓰였고 무기와 농기구와 장수의 갑옷과 투구에 쓰였다. 가야는 신라와 달리 왜(倭)에 철을 수출하던 당대 첨단국가였고 중원에는 이류면 일대, 가금면 창동 일대, 노은면 일대, 소태면 야동 일대 등에 무수히 많은 제철지가 있었다. 고려 시대 최자가 쓴 삼도부(三都賦)에 보면 중원과 해주의 철은 바위를 뚫지 않아도 산의 골수처럼 철이 흘러나온다고 했다. 고려 시대까지도 중원 일대에는 대규모 철산지가 널려 있었다는 증거다. 중원에는 철기 제작을 위한 산림도 풍부하였다. 중원의 이들 고려 다인철소(多仁鐵所)의 장인들은 민관군, 노비, 민초들과 힘을 합쳐 세계를 휩쓴 몽골 기병들과 맞서 몽골 기병들에게 뼈아픈 세계 최초 패배를 안긴 장본인들이 되었다. 충주박물관 팀에 의하면 이류면 지역에서만 무려 41 군데의 야철지(冶鐵址)가 확인되고 있다. 강수가 부곡(釜谷)의 대장간 집 딸과 혼인했다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부곡이라는 지명 자체가 가마솥(釜)으로 넘쳐나던 제철단지를 연상케 한다. 이 가마(釜)라는 말은 우리말 그대로 일본 열도에 남아있다. 백제왕이 열도에 칠지도를 선물한 것도 예사롭지가 않다. 일본이 아끼는 보물 칠지도는 분명 중원땅(진천 포함) 어느 야철 장인의 작품이었음이 분명하다. 최근에는 탄금대 주변에서 야철 가마 흔적이 속속 발굴되고 있어 그 성과가 주목된다. 신라는 분명 가야의 철기 장인들을 철이 풍부한 중원 지역으로 사민하였다. 예수님이 복음을 주로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와 납달리 평민들과 가난한 자들에게 전했던 것을 보면 복음은 가야 왕가보다 가야의 민초들에게 더 깊이 뿌리박혀 끈질기게 전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 같이 중원땅은 만일 정말 기독교인들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소통의 뱃길과 핍박을 피해 언제든지 피신할 수 있는 산악 지형과 생명 유지의 젖줄인 강과 하천을 따라 공동체를 조직할 수 있는 다양한 지류들의 존재와 생계를 위해 철과 관련된 다양한 첨단 직업들을 언제든지 얼마든지 얻을 수 있었던 하늘이 베푼 천혜의 땅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3. 중원 땅에 정말 가야 기독교 흔적이 있는가?
가야에 기독교가 전파되었었다는 주장과 가야가 기독교 국가였다는 주장은 전혀 다르다. 기독교계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바로 가야가 기독교 국가였다는 주장을 말한다. 가야연맹체의 맹주였던 김해가라(금관가야)는 주후 42년에 개국했다. 공식적 세계 최초 기독교 국가는 아라랏 산 근처에 있던 아르메니아였다. 12제자 중 하나였던 유다 다대오가 선교한 나라였던 아르메니아가 로마보다도 먼저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된 것은 주후 301년경이었다. 그런데 팔레스틴에서 멀리 떨어진 극동 지방의 낙동강 유역에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아르메니아보다도 260년 먼저인 주후 42년 이미 김수로 왕이 기독교인이 되어, 사도 도마의 선교에 의해 복음화 된 인도 아유타 왕국의 공주를 배필로 맞았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기독교 역사에 엄청난 충격을 주는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가야연맹체가 집단적 친기독교 종교국가였다면 그 흔적이 어떤 식으로든 가야 연맹 지역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 기독교는 창조와 구속 중심의 경전과 예배의 종교이다. 문헌과 유적과 유물과 구전 형태로 무수한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성경과 예배와 기도와 그리스도에 대한 전승의 편린이 남아 있느냐 하는 문제다. 중원 땅은 그런 면에서 중요하다.
필자는 고향 충주 주변을 샅샅이 수소문해 보았으나 고대 기독교의 흔적은 전혀 찾지를 못하였다. 오히려 중원 지방에는 다른 한반도 지역처럼 다양한 불교문화와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다만 남한 최초로 확인된 고구려비인 충주 중원고구려비에 대해 역사교사였던 유우식 장로가 광개토왕을 기독교인으로 설정하여 1984년 6월 2일 한국미술사학회가 주관한 제 27회 전국역사학대회 한국사부(韓國史部)에서 “중원고구려비와 관련사의 고찰”에 대해 발표한 적이 있다. 유 장로는 이 요약 논문에서 환인을 아브라함으로, 환웅을 야곱으로, 호태(好太, 광개토대왕)를 개구리에 비유된 부활신앙으로, 현묘지도(玄妙之道)를 기독교로, 충주 중원의 국망산(國望山)을 호태왕(광개토대왕)이 바라본 산으로, 고모루(古牟婁)성을 중원고구려비가 있던 입석 마을 뒷산에 있는 장미산성으로, 신라 매금(寐錦)을 실성(實聖)으로, 실성의 “실”을 성신숭배(기독교신자)의 뜻으로 비정하여 중원 땅이 기독교로 충만했던 땅으로 묘사하였다. 유 장로는 “이 논문 발표 도중과 뒤에 참가자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받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유 장로는 호태왕은 노객주가 되어 천노(天奴)로 인지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자로서 그의 이름이 담덕(談德)인 것도 그와 같은 이유라고 설명한다. 심지어 유 장로는 고구려와 가야 뿐 아니라 신라까지도 기독교가 일찌감치 들어와 정착했다고 보았다. 이 같은 해석은 동의하기 어려운 논리적, 해석적 비약이기도 할 뿐 만아니라 중원 땅에 나타난 가야인들이 기독교인들이었다는 설정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멸망한 가야의 유민들이 쏟아져 들어왔던 중원땅에 가야 기독교의 결정적 흔적은 아직까지는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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