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전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50주년 기념식 이렇게 탄식하였다. “노르망디 상륙 50주년이 갖는 의미는 우리 장병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자유를 지켜냈다는데 있지 않다. 이 상륙작전이 갖는 현대적 의의는 불필요한 희생을 치르지 않도록 대비해야 한다는데 그 의미를 두어야 한다.” 레이건의 지적처럼 한국전쟁도 우리 국가에 큰 아픔을 주었다. 그리고 그로 인한 분열은 – 국경만이 아니라 이념까지도 - 지금까지 상처를 덧나게 하고 있다.
전쟁은 참혹한 “현실”이기에 우리의 질문은 매우 근본적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참혹한 전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당시 한국전쟁을 지휘했던 맥아더 장군은 퇴역한 후 기자들의 “전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저는 전쟁은 신학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이 통찰력 있는 답변 안에는 전쟁이 정치나 경제의 논리보다 인간 본질에 관한 문제임이 담겨 있다. 교회에게 전쟁과 분열의 아픔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먼저 전쟁은 죄에 대한 심판이다. C.S.루이스는 “나는 전쟁을 원치 않는다. 더더군다나 나는 고통도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이 없다면 인간은 얼마나 오만했겠는가?”라고 말한다. 혹자는 무고한 인명피해를 언급하며 휴머니즘의 시각으로 이해하여 전쟁을 전적으로 부인하려 한다. 하지만 성경은 사람 가운데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단호하게 명시한다. 우리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개인의 죄뿐 아니라 공동체의 죄에 대한 책임도 주어진다. 각 개인들로 구성된 인류는 전쟁을 통하여 죄로 인한 끔찍한 책무를 경험해 왔던 것이다.
그렇기에 전쟁은 인간에게 죄의 심각성을 경고한다. 1차 세계대전 이전 계몽주의자들은 인간에 대한 낙관론을 주장했다. 인간은 교육을 통해 지식을 깨달음으로 진보할 수 있으며 종국에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실 이 견해는 근래 소위 “평화주의자”라고 불리는 이들이 인간은 평화로운 상태에서 살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국가는 전면적으로 전쟁을 포기하는 구체적인 정책을 펼쳐야 하며, 개인의 양심을 강조하는 것이 본래적이란 주장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보자. “우리는 무슨 권리로 평화를 요구하는가?” 인간에게 평화를 지킬 능력이 존재하는가?
지난 세기 인류가 저지른 전쟁은 오히려 인간의 철저한 무능을 깨닫게 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의 간섭을 기대하게 하는 역할을 분명히 해 왔다. 이제 우리의 처절한 현실은 스스로를 낮춰 하나님의 섭리에 소망을 두게 한다.
마지막으로 전쟁이 주는 가장 큰 의미가 있다. 경건한 삶에 대한 하나님의 촉구이다. 시편기자는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외친다. 고난이 그를 정결하게 하며, 인류를 정화시켜 나가게 된다. 인간은 왜 전쟁을 멀리하고 평화를 원하는가? 사도행전 9장 31절은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라고 말한다. 우리가 이 땅의 평화를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기 위함이다. 그러기에 구 평양신학교의 자리를 차지하며 여전히 꼿꼿이 서 있는 동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상당히 크다. 우리가 통일을 바라는 이유도 저 동방의 예루살렘이 다시 하나님을 경외하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소망에 있다고 할 것이다.
유대인 학살을 추모하기 위해서 건립한 야드바셈 박물관 입구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망각은 망국에 이르고, 기억은 구원의 비결이다!” 전쟁의 상처는 치유되어 그 흔적은 희미해질 수 있다. 그럼에도 전쟁이 교회에게 주는 영적 교훈은 또렷해야 한다. 특히 허리가 끊어진 분단국가 속의 교회는 더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평화의 근원이 되시는 아버지 앞에 겸손히 인간의 무능을 고백하며 아버지만이 주시며 유지하실 수 있는 평화를 갈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글·사진=평통연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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