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13일 오전 횃불회관에서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 김명혁 목사, 이하 한복협) 4월 월례회가 "종교개혁의 모토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이해"란 주제로 개최된 가운데, 김성영 박사(성결대 전 총장)가 "오직 은혜"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이해(은혜의 양면성)에 대한 강연을 전했다. 강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직 은혜’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이해 - 은혜의 양면성
1 서언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와 신학계에서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기 위해 다양한 행사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이 시간 한국복음주의협의회에서는 ‘종교개혁의 모토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이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연구는 지난 날 오랫동안 진행되어 왔기 때문에 새로운 시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시간 종교개혁의 모토에 대해 새삼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아는 것’에 비해 ‘행하는 것’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즉 알면서도 행치 않는 잘못을 우리가 저지르고 있기 때문에 기본으로 돌아가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는 것은 대단히 유익한 일이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발표자는 주어진 논제인 ‘오직 은혜’에 대한 성서적 가르침을 살펴보고 그것을 어떻게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할지 소견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종교개혁의 모토를 보통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등 ’다섯 솔라(Five Solas)', 또는 ‘다섯 가지 오직’이라고 하며, 견해에 따라서는 인류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신앙의 대 전제이므로 제외하고 종교개혁의 모토를 ‘넷 솔라’, 또는 ‘네 가지 오직’이라고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각자의 ‘솔라’가 독립적이면서도 상호 의존적이고 협력적이기 때문에 굳이 따로 떼어놓고 평가하고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지만, 오늘처럼 편의상 역할을 분담하여 발표하고 결론적으로 종합을 하는 것도 유익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럼 제가 맡은 ‘오직 은혜’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오직 은혜’를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인 동시에 ‘하나님의 값비싼 은혜’라는 ‘양면성’의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2. ‘오직 은혜’는 인간에게 베푸시는‘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입니다.
1) ‘은혜(恩惠)’에 대한 성경적 의미
구약에서 사용하고 있는 ‘은혜’의 대표적인 단어는 ‘헨 חֶס’ֶד과 ‘헤세드 חֵן’이고 신약에서는 ‘카리스 χάρις’라고 합니다. ‘헨’은 ‘동정’, ‘호의’, ‘자비’의 뜻을 가지며 ‘헤세드’는 ‘사랑’, ‘자비’, ‘은총’의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카리스’는 ‘호의’, ‘선물’, ‘은혜’, ‘감사’의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1) ‘헨’은 처음에 일반적으로 사람이 이웃과의 관계에서 베푸는 은혜와 호의(민32:5;삼하9:1;시18:25)를 뜻했으나, 점차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은혜(삿6:17,시26:11,잠3:34)’와 ‘은총(잠3:4;슥4:7)’을 의미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과 말씀, 계약[언약]에 근거합니다. 예를 들어 모세가 아론을 통하여 선포한 ‘제사장의 축복(민6:24-26)’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언약하신(민6:1) ‘하나님의 은혜(민6:25)’의 선언인 것입니다.
-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은혜란 사람이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쌍방적’으로 베푸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일방적’것으로서, 인간이 무엇을 지불하고 받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값없는 은혜(롬3:24;)’인 것입니다.
(2) ‘헤세드’ 는 사람 사이의 ‘우정’이나 ‘선행’, ‘친절’ 등을 의미하며(47:29,;삼상20:3,8,;삼하16:17),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은혜(스9:8;욥33:26)’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의무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말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용될 때는 (사람이) 그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의무를 앞세우고 있습니다(출20:6;신7:12;호6:6).
- ‘헤세드’ 역시 언약 안에서 이스라엘[택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뜻합니다(왕상8:23;사55:3;시106:45).
- 하나님과의 은혜의 관계를 위해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언약 상 하나님에 대한 ‘감사’입니다(시6:5)
- 그러나 인간이 이 언약을 깨뜨리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릴 때는 은혜 대신 심판(딤전5:12)과 징벌(벧전5:5)이 따릅니다.
*종합적으로 볼 때, 구약에서 은혜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출15:13;18:9;시106:4;사30:18)로, 하나님의 축복과 은사(출20:6;33:19;민6:25;신5:10)로, 용서(시85:1;86:15;사61:2)로, 보호와 안위(시5:12;30:10;사33:2;렘31:2)로 나타납니다.
(3) 신약 성경에서 ‘카리스’는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 ‘선물’, ‘감사’ 등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은혜는 신약 전반에 나타나 있는데(눅1:30;행11:23;롬3:24;고전1:4;고후1:12;갈2:21;골1:2,6;히12:15;유1:4 등), 근본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의 은혜’(롬3:24; 갈2:21)로 집약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은혜는 그의 능력의 함께 하심(눅1:30;2:40)과, 도우심(행14:26),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고전15:10), 축복(엡3:7)으로 나타납니다.
-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전반, 즉 인간이 되심(빌2:8)과 십자가 고난을 받으심(엡1:7), 부활하심(롬1:4), 그 이름으로 구원하심(행15:11;살후1:12) 등 철저히 구원론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이 ‘카리스’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자비와 자유로운 뜻으로 나타납니다. 이 점은 앞에서 살펴본 구약의 ‘헨’과 상통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값없이 베푸시는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3,24)
여기서 ‘값없다’는 뜻은 “무가치하다”는 뜻이 아니며,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값으로 다 헤아릴 수 없다”는 의미를 훨씬 능가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자유롭게(freely)’ 하신 것이며 ‘하나님의 자유로운 뜻(free will)으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유로운 뜻으로 하신 일이니 감히 인간이 게재될 수 없으며 그 분의 높으신 뜻을 어찌 인간의 상식으로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값없는 은혜요 가장 값비싼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칼뱅이 강조한 구원의 5대 강령 중 ’저항할 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입니다.
- 종교개혁자들이 개혁의 모토로서 ‘오직 은혜’를 내세운 것도 바로 여기에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께 아무 것도 요구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이끌며 죄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2) 은혜에 대한 신학적 두 가지 구분
신학에서는 은혜를 성경에 근거하여 일반은혜와 특별은혜로 구분합니다.
- 일반은혜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주시는 것으로(마5:44,45;행14:16,17), 세상의 보존과 권선징악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롬13:1-4).
- 특별은혜는 인간이 죄를 범하여 죽게 되었음에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하신[기쁘신] 뜻에 따라(시25:7;엡1:5) 그 크신 사랑으로(요일4:10;계1:5) 인간에게 값없이 속죄와 생명을 주시는 것으로(롬3:24;고후11:7;엡2:8), 구원과 관련된 은혜입니다. 보편적으로 ‘은혜’라고 하면 이 경우를 뜻합니다. (발표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학적 구분에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구원과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
- 은혜를 하나님의 거저 주어지는 관용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는 자발적(빌2:6-8)이고 무죄(無罪)한 희생(고후5:21;히4:15)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자발적인 순종과 희생으로 하나님의 공의(롬3:22-26)를 이룸으로써 이루어집니다.
- 간과하지 말 것은 은혜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한 것이지 인간의 어떤 행위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도 요구할 권한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대가(代價)나 보상(補償)이 될 것입니다.(롬4:4-8) 이런 점에서 은혜는 율법의 행위와 반대됩니다.(롬3:20-24)
3. ‘오직 은혜’는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하는‘하나님의 값있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에는 인간이 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값없는 은혜,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웃에게 받은 은혜를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6:1)는 말씀에 함축되어 있듯이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에게 은혜에 합당한 행위[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은혜의 양면성, 또는 은혜에 대한 인간의 호응입니다. 그것을 성경에서 살펴봄으로써 은혜의 입체적인 이해를 하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행13:43)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받고 은혜를 떠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은혜 안에 거하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를 받았습니다. 믿음으로 ‘은혜에 굳건히 속해야’ 합니다(롬4:16). ‘은혜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롬5:2). ‘은혜 안에 있어서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롬6:15).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엡4:1;빌1:27)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고 봉사해야 합니다(벧전4:10). 믿음을 강조한 나머지 구원에 합당한 삶은 무시한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먼 사람일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약2:17).
2) 은혜 받은 우리는 담대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면 담대히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 즉 은혜를 받은 증거는 전도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롬15:16) 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담대히 서신을 기록하는 것도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15:15).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롬1:16). 전도는 하나님 은혜에로의 초청입니다. 이 위기의 시대에 부지런히 ‘주님의 은혜의 해’를 전파해야 하겠습니다(눅4:19)
‘족한 은혜’(고후12:9), ‘넘치는 은혜’(고후9:8)를 받은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3,24)
3) 받은 은혜를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면 그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즉 은혜를 받은 증거는 나눔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역대하 7장을 보면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의 낙성식 기사가 나오는데, 7일 동안 성회를 연 솔로몬이 백성들을 그들의 장막으로 돌려보내니 백성들이 왕과 그의 백성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 받은 왕은 선정을 베풀고 백성은 그 은혜를 함께 누나며 즐거워한 것입니다. 이처럼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 자이며(시37:21),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을 것입니다(시37:26).
은혜를 받은 사람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고후4:15). 감사는 은혜 받은 사람이 나타내는 구체적인 은혜의 표시인데, 그것이 이웃에 대한 봉사와 섬김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을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밀접하게 표현했습니다(고후 8:4).
*그런데, 우리가 이처럼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거나, 은혜의 복음을 전하지 않거나, 은혜를 이웃과 나누지 않는 자를 성경은 ‘은혜에서 떨어진 자’(갈5:4)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6,8하)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깨달음을 갖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아서는 안 됩니다(고후6:1). 은혜에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갈5:4). 은혜에서 떠나서는 안 됩니다(갈1:6). 이것은 우리가 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으니 다 됐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자는 사실 은혜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스스로 ‘저항할 수 있는 은혜(resistible grace)'로 착각하는 자들입니다.
4. 결언
정리하겠습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롭게, 값없이 베푸시는 사랑과 호의의 총칭입니다. 은혜를 일반적인 것과 특별한 것으로 구분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구원과 생명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은혜는 일방적이고 값없으며 저항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이 반응해야 한다는 점에서 상호적이고 값비싼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은혜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감사로, 찬송으로, 기쁨으로, 사랑으로, 전도와 봉사와 섬김으로 나타납니다[나타나야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반응을 발표자는 예배, ‘삶의 예배’, ‘예배의 삶’라고 이해합니다. 우리가 이 삶의 예배를 바로 살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에 대해 이 점을 소홀히 생각하기 쉽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와 여기 모인 종들은 개혁의 선진들이 부르짖은 ‘오직 은혜’의 깊은 뜻을 새롭게 되새기며 ‘은혜를 받고’ ‘은혜를 끼치는’ 예배의 삶에 더욱 힘써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지속적인 개혁일 것입니다.
/글=한복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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