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르틴 루터의 입장
로마서 1장 17절을 통해 오직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칭의 개념을 이해한 마르틴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마 루터는 야고보서를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봅니다.
2. 유대 랍비의 입장
유대 랍비들은 신앙과 행위, 신앙과 순종, 율법과 행위, 순종과 공로를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하나의 통일체였습니다. 따라서 랍비들은 아브라함이 그의 공로로 의롭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출신 기독신자들이 믿음으로 의롭게 됨(칭의)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이유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과 야고보 사이에 행위 문제에 있어 설명이 달라졌습니다.
3. 사도 바울의 입장과 야고보서의 입장
1) 사도 바울의 입장
사도 바울은 유대출신 신자들을 유대 전통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분명하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합니다(롬 1: 17; 롬 4: 2-3). 유대 출신신자들에게 행위는 유대 율법(특별히 할례 의식)을 지키는 것이므로 행위와 믿음 문제를 분명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었다면 인간은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롬 4:2).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롬 4:2).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빚진 자로 만드는 일입니다(롬 4:4). 피조물인 우리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기에 이 부분을 이해하기 어렵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부분을 신자들에게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이었으며(롬 1:5) 근본적으로 그것은 아브라함이 가진 바로 그런 믿음이었습니다.
2) 사도 야고보의 입장
사도 야고보가 야고보서에서 행위를 강조하나 이것이 야고보가 믿음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야고보가 강조하는 것은 행위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자는 아브라함처럼(약 2:21) 당연히 행위를 동반해야 한다는(약 2:14) 점이었습니다. 이런 믿음은 형제자매의 궁핍을 보고 반응하는 믿음입니다(약 2:15-17). 즉 <신앙 없는 행위(행위 구원)>가 아니라 <신앙 있는 행위>를 강조합니다.
즉 야고보는 신앙과 행위를 분리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앙과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는 성도라면 구원 받은 자답게 당연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행함을 통해 자신의 믿음이 일시적 회심이나 죽은 믿음이 아님을 보이라는 거지요. 심지어 야고보 사도는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믿음(우리 성경에 <믿음>이라고 했으나 실은 <아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의미에 더 맞음)은 귀신들조차 가진 것이라고 말합니다(약 2:19). 귀신들조차 알고 믿고 떠는 그런 믿음은 참 된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실 귀신들조차 잘 아는 그런 믿음조차 없는 자들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하며 사는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부처 믿듯 예수 믿는 한국인들 참 많습니다. 이런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라고 예수님 동생 사도 야고보는 말하고 있습니다.
3) 두 사도 사이의 진정한 입장 차이는 없다
따라서 의롭게 되는 것은 행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부터 온다는 사도 바울의 입장과 믿음을 지닌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과 순종과 신뢰의 행함(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믿음의 행함)이 따라온다고 본 야고보, 이들 사도 두 사람이 이해한 믿음과 행함의 문제에 있어 사실 본질적 차이나 모순은 없다고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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