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은 ‘북한교회 수난 70년의 해’라고 할 수 있다.
1945년 8월 25일 경 소련을 등에 업고 한반도 북쪽을 점거한 공산당원들은 처음에는 ‘통일전선’을 구축하여 교회에 협력을 요청했다. 그러나 1946년에 들어서서 2월 8일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결성하여 김일성을 위원장에 앉히고 그의 외할아버지 강돈욱의 6촌 형제인 강량욱 목사를 서기장에 앉힌 북한정권은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하였다.
1907년 대부흥운동이 시작된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는 1946년 3월 1일 3․1절 기념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무장 적위대가 난입하였다. 인민위원회에서 평양 역전에서 3․1절 기념식이 있으니 참석하라는 요구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에는 만 명 가까운 교인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적위대가 난입하여 이들을 해산시켰다. 이에 이들은 평양역에서 화신백화점까지 시가행진을 하며 찬송가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 …”를 불러 외쳤다. 그 결과 50여명이 잡혀갔다. 이 장대현교회 자리에는 1963년 평양학생소년궁전이 세워졌다.
그리고 3월 5일에는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골자로 한 토지개혁을 발표 하였다. 1만 5천 평 이상의 토지를 소작으로 준 사람은 ‘지주계급’으로 간주되어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토지뿐만 아니라 주택과 가축까지 몰수당하고 다른 군으로 이주해야 했다. 이때 토지를 많이 소유하고 있던 불교와 천주교가 많은 피해를 보았지만, 기독교 교인들 가운데 중소 규모의 지주들이 많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기독교가 가장 큰 타격을 보았다. 이로 인해 생활기반을 잃은 사람들이 월남하였으니, 북한교회 입장에서는 교인도 잃고 경제적 기반도 흔들리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 토지를 농민들에게 돌려준 것이 아니라 실질적 소유권은 국가가 가지고 있었으며, 1954년부터는 이를 ‘집단농장’으로 만들었다.
또한 임시인민위원회는 9월 5일 면․군․시․도 인민위원회 위원들을 선출하겠다는 결정서를 발표하였는데, 하필이면 그 선거일이 11월 3일 주일이었다. 이에 일부 교회들은 종일예배 실시로 이에 맞섰으며, 일부 교인들은 하루 종일 교회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어떤 목사는 자정이 넘어 집으로 가다가 보위부원들이 잡아가려고 집을 지키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그 길로 월남하게 되었다. 이때 큰 곤혹을 치른 김일성은 기독교 안에서 자기를 돕는 조직의 필요성을 느껴 서기장 강량욱 목사에게 지시하여 11월 28일 ‘북조선기독교도련맹’을 발족시키게 하였다. 그리고 이에 가입하지 않은 목사들에게는 담임목사직을 박탈하고 사택에서 나가도록 하였으니, 이로써 북한에 ‘국가교회’가 태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순수한 기독교인들은 ‘지하교회’로 ‘가정교회’로 들어가 “온 마음으로” 여호와를 구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70년이 찼으므로 하나님은 북한교회에 “미래와 희망”을 주실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 ‘남한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때까지, ‘북한교회의 회복’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기도”해야 할 것이다(예레미아 29:10-14).
/글=평통기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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