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칼럼] 필자는 어려서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부친을 원망하였다. 부친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이별을 하여서도 그러했지만 어머니와의 원할 하지 못하신 관계로 형과 누나는 일직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떠났고 집과 많지 않은 농사 채 얼마를 분배해 주고 거의 돌보지 않은데 대한 불만의 표출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어느 해 농사를 잘 지었는데 추수 할 직전 근래에 드문 태풍으로 둑이 무너져 농사를 망치게 되었는데 그 고통을 모친께서 혼자 감당하는 모습을 곁에서 보면서 부친에 대한 원망으로 사로잡히게 되고 그 감정을 누그러트리지 못하고 장성하여서도 그 감정을 씻어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얼마나 어리석은지 일이었는지 이제야 늦은 후회를 하게 돼 후회 막심하다. 영어에서 ‘나’는 ‘아이’(i)이다. 온 천하를 다 주어도 나의 생명과는 바꿀 수 없는 것, 나의 생명 속에는 내 부모의 뼈와 살과 피와 혼이 숨 쉬고 있다.
고(故) 안병욱 박사의 글에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마치 100년 마다 한번 씩 바다위에 떠오르는 애꾸눈의 거북이가 망망대해의 거센 파도에 휩쓸려 떠도는 그 나무판자의 조그마한 구멍을 만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하였는데 공감이 가는 내용이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는 당연히 조물주 하나님께와 부모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기본 인륜의 예의이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로마 제국 멸망의 요인을 지적하여 로마의 부(富)와 힘에 도취된 젊은이들이 노인을 거부하고 멸시 한데 있었다고 말 하였다. 그들은 말하기를 “60세 이상된 자들은 모조리 다리에서 떠내려 버리라고”고 하였다. 깊이 음미해 볼만한 내용이다.
우리를 기르는 부모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이제 늦깎이 인생을 후회하며 생각해 본다.
첫째, 부모님들은 지극히 사소한 일에도 자식의 일에 마음을 쓰신다. 구약 시대의 인물 가운데 가장 재미있는 동화적인 인물은 요셉이다. 그는 형제들의 농간으로 남의 몸종으로 팔려갔으나 후일 이집트의 총리대신이 된 사람이다.
요셉은 어렸을 때부터 꿈을 자주 꾸었다고 한다. 결국 그것 때문에 형들의 미움을 샀지만 아버지만은 그 꿈 이야기를 잊지 않고 마음에 간직했었다. 이것이 단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둘째, 부모님의 마음은 자녀와 함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부모의 은덕을 기리며 감사한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부모를 저 버리는 자식들 부모의 유산을 가로채는 망나니들, 심지어 부모를 살해하고 그 재산을 제 것으로 만드는 패륜아들이 적지 않다. 그들의 결과 잘 되었다는 소문을 거의 듣지를 못했다. 성경에 아버지의 유산을 강탈하다 시피 빼앗아간 둘째 아들은 망나니 친구들과 허랑 방 탕하게 탕진한 뒤 거지가 되었다. 예수께서 부모의 것을 빼앗는 자들의 말로가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는 말씀이다.
성서는 그런 망나니 아들을 용서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가정이 없는 인간 사회 그것은 인간 사회 일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 사회는 아니다. 다시 사람의 도리를 찾아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가정의 달’ 어버이날에 부모의 은덕을 기려 본다.
부모의 은덕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 있겠는가? 낳아서 길러주신 그 따뜻하신 부모님의 은공도 헤아리지 못하는데 친구, 도움이나 스승의 가르치신 은혜인들 제대로 헤아릴 수 있겠는가?
결국 그에게 남는 것은 ‘불효자’, ‘배은망덕’이라는 칭호일 뿐이다.
“자녀이신 여러분, 주 안에서 여러분의 부모에게 복종하십시오. 이것이 옳은 일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한 계명은 약속이 딸려 있는 첫째 계명입니다.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한 약속입니다.” (엡 6:1~3 / 표준새번역)
수없이 전한 말씀이지만 금년 어버이날에 가슴에 와 닿는다. 늦은 후회를 해보나 세월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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